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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CCCC 下

"너 게이야?"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다. 그리고 돌려 말하는 화법보다는 직설적인 화법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내 물음에 전정국은 부대찌개를 집어먹던 행동을 잠시 멈추고서는 날 빤히 쳐다봤다. 깜장색 눈동자. 수저로 뜬 국물을 후루룩 들이킨 후에 갑자기 왜요? 하고 묻는데, 묻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태연하다. 도리어 내가 뻘쭘해졌다. 원래 약간 당황하는 게 정상이지 않나, 찔리는 게 있으면. 당당한 태도에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착각했나, 해서 말을 돌리겠지만 내 촉을 믿기로 했다.



"너 박지민 좋아하잖아."



의심이 단 1프로도 섞여있지 않은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런 걸 추궁할 때는 증거가 몹시 허접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당당한 자세가 중요하다. 전정국은 내 말에도 별 동요없이 물수건으로 손등에 흘린 국물을 닦아냈다. 명탐정 코난에 빙의된 양 걔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증거를 모으려는데 내 노력이 무색하게 전정국은 그래서요? 라고 했다. 어? 맞아요, 지민이 형 좋아하는 거. 그래서요? 한 치도 흔들림 없는 눈빛에 당황했다. 궁금한 게 그것뿐이라면 뭐. 대답을 잊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을 날 쳐다본 전정국은 다시 찌개로 눈을 돌렸다. 햄과 스팸을 다 가져가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되찾고 전정국에게 충고했다.

 


"걔 남자 안 좋아해."

"........."

"어... 그러니까.... 연애적 감정으로는."

"알아요."



어라?


전정국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어찌된 지 말을 꺼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정국은 내 예상과는 다른 반응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이냐는 물음에 당황하지도 않고, 박지민이 널 좋아하게 될 일이 없을 거라는 내 말에도 실망한 기색 하나 없고. 전정국은 수저 끝으로 큰 햄을 반으로 조각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민이형이랑 이어지기를 기대했으면 이 동아리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죠. 그냥 김주연이랑 헤어지기만 해도 난 족해요."

"다른 여친 또 사귀면?"

"그럼 또 찢어놓으면 되지."

"너 그러다 벌받는다."

"내가 그러면 형은 진작에 지옥불로 떨어졌을 걸요."



인정. 맞는 말이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본전도 못 찾은 나는 조용히 입을 닥치고 거의 남은 게 없는 찌개에서 콩나물을 건져올렸다. 짠 맛이 배인 콩나물을 아삭아삭 씹고 있는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전정국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요, 형.



"내가 좋아한다는 거, 지민이 형한테 말하면 죽어요."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만일 내가 귀띔해주기라도 하면 아주 아작낼 듯한 기세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CCCC

Campus Couple Cutting Club






전정국은 당당했다. 내가 봐온 시간이 그리 길다고는 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 시무룩하거나 축 쳐져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자신감 넘치고 뻔뻔하게 사는데, 이상하게 박지민 앞에서만 가면 행동이 180도 달라졌다. 말만 형이라고 하지, 후배보다 못한 취급을 해주는 나와는 달리 박지민 옆에만 가면 꺄르르 웃는 새내기가 된다. 톡 튀어나온 앞니마저 보이며 웃는게... 조금 토끼 닮았다. 그러니까 쟤가 전정국더러 귀엽다고 했지. 저렇게 웃는 걸 보니 박지민이 귀엽다 귀엽다 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놀라운 건, 제 감정도 잘 숨긴다는 거다. 가끔 김주연이 박지민을 보러 오는 시간과 마주칠 때가 있었는데, 전정국은 생글생글 웃으며 김주연을 맞이했다. 물론 김주연과 같이 떠나는 박지민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동아리 방으로 들어오면 상황은 달라지긴 했다. 오금이 저릴 만한 표정으로 뭐라뭐라 중얼거리는데 흑마법사 저리 가라였다. 넘치는 열정과 감정을 감쪽같이 숨기는 패기라면 나는 조만간 박지민 쪽이 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지민과 김주연네 커플은 생각보다 질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결국에 그 둘이 깨졌다는 소식이 들려올 거라 믿었다. ... 나의 모든 예상들은 빗나갔다. 나는,


절대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던 전정국의 축 쳐진 모습을 보았다.



아직 장마 기간이 아닌데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오후부터 비가 대폭 쏟아졌다. 천둥에 번개에 난리도 아니었다. 콰르르릉 하는 소리가 아까부터 몇 번 반복해서 들렸다. 비 오는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딱인데.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던 나는 박지민을 흘끗 쳐다보았다. 파전 콜? 하고 외치고 싶었는데 어찌 표정이 심각해서 물을 수가 없다. 답지 않게 가오 잡고 있는 걸 보니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 같다만. 쟨 혼자 속으로만 고민할 놈이다. 고민은 나누면 나눌수록 가벼워진다는 말이 있지, 어디 한 번 이 형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막 떼려던 참이었다. 지이이이이잉. 희미한 빗소리만 들려 조용한 방이었던지라 진동음이 상대적으로 크게 들렸다. 나는 소음의 근원지인 핸드폰을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올렸다. 박지민이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얼른 받지 않고 뭐하고 있지, 하고 생각하자마자 통화를 받아든다. 박지민의 손끝이 침대 위를 배회하는 꼴을 가만히 응시했다. 입이 열리고 통화 속의 상대에게 말한다.



"응."



뭐라고 말을 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취했어?"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 저 버릇 안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모로 누워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박지민을 관찰했다. 입매 끝이 살짝 굳어졌다. 혼자 있어? 묻는 목소리에는 걱정 30, 고민 30, 우울함과 그 밖의 잡다함 40. 분석 결과 통화의 상대방이 아까부터 박지민이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을 가능성 80프로. 상대가 대체 누구길래. 잠시 뒤에 전화를 끊은 박지민은 날 바라보았다.



"너 지금 바빠?"

"아니."

"그럼 나 대신 데리러 가줄래?"

"아 그렇다면 바빠. 나 지금 파전 먹을 생각 하고 있었거든, 막걸리랑."

"약속 있어? 누구랑?"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랑."



농담따먹기 놀이처럼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박지민은 보통 뚱한 표정을 짓기 마련이었는데, 오늘은 그조차도 안 했다. 뭐야...진짜, 이상하게.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서는 물어봤다. 왜, 누군데? 너더러 나오래?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왜 안 가? 너 바쁜 일 생겼어? 그 물음에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왜? 박지민은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냥...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탁할게. 그리고 누구냐면... 가면 알 거야.



결국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알려준 포차로 가던 나는 음식점 앞에서 주저앉아있는 뒤통수를 발견했다. 팔 사이에 얼굴을 푹 묻고 있는 모습. 전정국이었구나. 평소같았으면 귀여운 후배를 선뜻 데리러 나왔을 텐데, 박지민이 내게 부탁한 이유는, 그럼. 멈춰섰던 발걸음을 도로 움직여 전정국의 앞에 섰다. 제 앞에 멈춘 발소리를 들었는지 푹 숙여져 있던 고개가 들어올려졌다. 우산을 들고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딱 봐도 술기운이 어려 있다.



"궁상맞게 뭐하냐."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요."

"걔 안 와. 나더러 가 달라고 했어."



그러자 다른 쪽을 응시하던 고개가 홱 돌려졌다. 두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렇구나. 전정국은 그 말만을 하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흘렀다. 박지민이 전정국을 데리러 가지 않고 나를 시킨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안쓰러워진 나는 우산을 기울여주며 입을 열었다. 취했다며, 우산 없다며. 내 물음에도 전정국은 동문서답을 했다.



"선배 바빠요? 그래서 형을 보낸 거예요?"

"........."

"...그렇구나."



나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답을 읽어낸 전정국은 슬쩍 웃어보였다. 그럼 괜찮아요. 전정국은 일어나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비틀거리는 모습에 나는 재빨리 다가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전정국은 날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꺼냈다. 귀찮을 텐데 들어가지 그래요. 아냐,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뭐. 역 앞까지 데려다 줄게. 감사해요.


대화가 끊기고 비가 우산을 토도독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나는 말없이 걷고만 있는 전정국의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멍하니 앞만을 응시하는 눈빛, 의식하지 못해 살짝 벌어져 있는 입.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제자리에 섰다. 그러자 내가 멈췄다는 것도 모르고 앞으로 걸어나간다. 옷과 머리칼이 비에 빠르게 젖어가는데도 얼이 빠진 듯이,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전정국을 불렀다. 전정국. 그러자 뒤를 돌아보아 내가 떨어져 있단걸 그제야 발견한다. 자신이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려나.



"박지민 나랑 룸메이트야."

"...그랬어요?"

"걔 지금 기숙사에 있거든."

"........."

"약속도 없고."

"........."

"어디 아프지도 않고."

"........."

"같이 갈래?"

  


전정국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일분 일초가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나는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의 질문이자 표현이었다. 온몸이 푹 젖어 더 이상 몸에 젖지 않은 부분이 없어져서야 전정국은 대답을 했다. 고개를 저으면서, 아뇨, 괜찮아요. 하고. 힘없이 대답하고 셔틀 버스를 타러 가는 전정국을 잡지 않고 그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기숙사에 돌아와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고 발을 들여놓자 아까 나갈 때 보았던 모습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박지민이 눈에 들어왔다. 박지민은 자신이 전혀 바쁘지 않는데 일부러 데리러 나가지 않았다는 걸 전정국에게 말해준 사실을 모른다. 이제 둘의 관계는 순전히 전정국이 어떻게 반응하기에 따라 달렸다. 멀어질 걸 선택하느냐, 마느냐로. 생각하며 나는 투덜거리며 불평했다. 밖에 비 존나 많이 와. 별로 친하지도 않은 후배 데리러 나가느라 혼났다, 야. 박지민은 피식 웃었다. 나는 비바람에 약간 젖은 머리를 털어내고서는 겉옷을 벗었다. 태형아. 뒤돌자 박지민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경신회 말고 동아리도 하는 거, 알아."

"...뭐?"

"그게 무슨 동아리인지도 알아. 딱히 말릴 생각으로 입 연 건 아니야. 그랬으면 작년에 말 했겠지. 네가 나랑 주연이는 관여하지 않는 듯 보여서... 그 점은 고맙기도 하고."



박지민이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내뱉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지금에서야 꺼낸 이유는,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 박지민의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했다.



"정국이, 네가 있는 동아리에서 친해졌어?" 



똑바로 날 바라보는 눈을 보면서 나는 결국 거짓말을 했다. 아니. 나는 한 사람에게는 진실을, 또 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해서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을 모두 상처준 놈이 되어버렸다. 



* *



조만간 폭풍이 불어닥치겠다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햇볕이 쨍쨍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날씨가 쨍쨍했다는 뜻 뿐만 아니라 박지민이나 전정국이나 아주 평화로웠다는 뜻이다. 박지민이 널 쌩깠다는 걸 알려줬기에 전정국이 더 이상 걜 안좋아하거나 최소한 험담이라도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학회 뒷풀이에서 아주 신나서 선배니 후배니 아주 사이가 좋다 못해 난리가 나셨다. 꺄륵 웃으며 박지민과 술잔을 맞부딪히는 전정국을 보면서 눈깔을 세모나게 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건 박지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게 전정국을 조지겠다는 별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기더니만 또 귀여운 우리 후배! 하며 둥가둥가 부둥부둥 납셨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화해라도 한 걸까.


...는 남의 사정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얼얼한 볼을 붙잡고 방금 지나간 싸다구에 날아간 정신줄을 붙들고 있었다. 쌍욕을 퍼붓곤 여자가 가게를 또각또각 나가자 이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황급히 돌려졌다. 쪽팔려 죽겠군. 전정국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했다. 와 대박.



"방금 주먹으로 친 거 아니죠, 소리 진짜 짱 컸는데."

"...아프냐고 먼저 물어봐줘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한 건 물어볼 의미가 없죠. 가끔 이렇게 쳐맞기도 해요?"



약간 목숨걸고 하는 동아리구나 이거. 전정국은 신기함이 담긴 목소리로 쭝얼거렸다. 쟤 말이 맞았다. CCCC활동을 하다보면 가끔 이렇게 처맞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우리쪽 꼬임수에 넘어가서 헤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매우 드물게 알아차리고 복수를 하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선배들 말로 들어봤는데 실제로 걸려 맞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형 볼 완전 빨개요. 전정국은 위로할 생각도 안 드는지 입을 자유자재로 놀렸다.



"그래, 그러니까 너도 들키지 않게 잘 하라고."

"뭘요?"

"김주연 성깔 세다는 말 돌아서. 걸리면 너도 내 꼴 될 걸."

"아 그거요? 그만뒀는데."

"잉?"

"그만둔지 좀 됐는데 왜 몰랐지? 아, 형은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서 몰랐나."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태연하게 들려오는 말에 눈을 괴상하게 떴다. 진짜? 진짜. 왜? 왜긴 뭘 왜에요, 흥미가 사라졌어요. 헤어질 기미도 안 보이고, 만일 헤어지게 만든다 해도 지민이 형에게 들킨다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그건 싫으니까 그만두기로 했어요. 술술 나오는 말들은 일리가 있었지만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전정국은 턱을 괴고 시선을 살짝 내리깔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더 좋아해봤자, 소용없을 거 같고."



약간 체념한 어조였다. 전정국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형 뺨 좀 부어올랐는데 여기 있어봐요, 가서 물수건이라도 얻어 올게요." 라고 했다.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포기한 건가? 미움받기 싫어서 그만둘 거였으면 애초에 동아리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한 건, 어쩌면... 정말로. 물잔으로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십분은 족히 넘었는데 오기는 커녕 머리털 하나도 안 보인다. 물수건부터 만들어 오나, 얜. 결국 기다리다 못해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카운터에도 없고, 화장실에도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가게 뒷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퉁이에서 전정국을 발견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김주연이 걔 옆에 있었다.


거리가 있어서 대화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김주연이 뭐라뭐라 말하자 전정국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이내 김주연의 손이 뻗어져서 나는 전정국의 뺨이라도 치는 걸까, 말려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김주연은 눈웃음을 치며 그 애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분명히, 어떠한 의도를 담은 손. '지민이 오빠 후배 맞지. 이름이... 정국이었나?'. 이상하리만치 소문이 없던 여자였다. 그렇기에 더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전정국은 김주연의 손을 뿌리쳐야 했다.


- 좋아한다는 이유로 포장해봤자 나쁜 짓이겠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김주연은 고개를 흔들며 지나치려는 전정국을 다시 붙잡는다. 이번에도 뿌리치겠지. 그러나, 전정국은 두 번째에는 뿌리치지 못했다.




근래들어 혼자만 아는 비밀만 많아진다. 전정국이 김주연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는 것, 전정국은 내가 그 때 그 장면을 목격했단 걸 모르는 것도, 박지민은 김주연이 바람 비스무리한 걸 피는 지도 모르고 여전히 김주연과 전정국을 챙겨준다는 것도. 관계가 이리저리 비틀리고 치이는 꼴이 보이는데 나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손을 댈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전정국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걔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전정국은 하루에도 몇 번씩 끙끙거렸다. 박지민 앞에서도 몇 번씩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옴싹달싹 거렸는데 결국은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하는 걸로 끝났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저번에 나한테 말했던 대로, 완전히 그만뒀어야지. 김주연의 손을 한 번 더, 여러 번 뿌리쳤어야지. 지금껏 경험으로 보아 결말이 어떤지 안다. 내 생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뭐야?"



박지민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다. 한껏 당황한 모습으로 있는 전정국과는 달리 김주연은 태연했다. 양다리 사건 현장을 적발당한 여자친구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살 게 있어서 동행한 나는 박지민과 같이, 영화관에서 나오는 전정국과 김주연을 맞닥뜨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박지민은 침착한 얼굴로 물었지만 주변으로 뿜어져나오는 냉기는 비교할 바가 못 됐다. 한마디도 변명하지 못하는 전정국을 뒤로 하고 김주연이 입을 열었다.



"아, 오빠."

" '아, 오빠?' "

"그냥, 영화보러 온 거야."

"근데 손을 그렇게 꼭 잡으면서 봐? 미처 몰랐네."



박지민이 비아냥거렸다. 김주연도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언제 둘이 그렇게 친해졌어? 나 없이 만날 만큼. 손도 그렇게 꼭 잡을 만큼, 친해진 줄은 미처 몰랐네. 요새 바쁘다더니만, 두 사람을 만나느라 바빴던 거구나. 박지민의 시선이 전정국에게로 향했다. 보는 사람마저 얼어붙을 정도로 냉한 얼굴이다.



"너 진짜 웃긴 애다."

"..........."

"내가 좋은 후배라고 말할 때마다 존나 웃겼겠네."

"..........."

"하하, 이 씨발......"



박지민은 언성을 높이지도, 손을 들어 때리지도 않았지만 자조적으로 내뱉는 욕은 그 어떤 행동들보다 천만 배는 더 크게 느껴졌다. 박지민이 말할 때마다 입술을 더 세게 깨무는 전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진짜, 화를 꾹꾹 내리누르는 듯 목소리가 보기 싫게 갈라지고 있었다.



"연을 이렇게 끊을 줄은 미처 몰랐다."

"..........."

"미리 끊어서 다행이네, 고맙다. 그리고 너,"

"..........."

"양심 있으면 앞으로 아는 척 하지 마라."



박지민의 눈은 정확하게 전정국을 향해 있었다. 가자 태형아. 나는 잠시 전정국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를 떠났다. 뒤돌기 전까지 전정국은 바닥으로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둘에게 배신당한지 이틀. 그때 사건 현장을 떠나온 박지민은 밤새 뒤척였다. 겉으로 침착하게 대처하길래 의외로 굳세구나 했는데 속은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덕분에 밤새 나도 잠을 못 잔 건 물론이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전정국에게 연락을 취했다. 야, 너 어쩔 거야? 김주연이랑 사귀어 설마? 다 망했으니 빨리 걍 깨지고 끝내. 어떠한 말을 보내도 전정국은 답을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는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박지민과 시간표가 거의 똑같았기에 같은 강의실에서 나와야 했는데. 나는 불편한 얼굴로 안 강의실을 기웃거렸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학회에도, 동아리에도, 학교 그 어느 구석에도 보이지 않았다. 박지민의 얼굴을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설마 휴학계라도 낸 걸까? 그러나 학사에 물어본 바 그렇진 않다고 했다. 사흘째가 되니 나는 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전국아 죽었냐....... 대답좀 해 ]


세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보낸 메세지를 보던 나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이렇게 마음 약할 거면서 하긴 왜 했어, 멍청이같이. 현명하게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사흘간 연락이 없던 전정국이었다. 헉. 나는 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박지민을 힐끔 바라보았다.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있었는데, 한참 전부터 저 자세인 걸로 보아 저러다 잠이 든 듯 했다. 여보세요?



- 형....혀엉.....

"야, 울어?"



귀에 가져다대자마자 코맹맹이 소리가 들렸다. 훌쩍이는 소리도 쉼없이 들렸다. 나 진짜 어떡하냐구..... 진짜 답이 없어..... 내가 왜 그랬지....응? 죽고싶어 정말....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리는데 목소리에서부터 후회가 묻어나왔다.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주지 못하고 듣고만 있자 한탄이 흘러나온다.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민이 형....형... 근데도 지민이 형 보고싶어.... 듣다못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받아쳤다. 그러고도 보고 싶냐? 으응..... 너 같으면 보고 싶겠냐 정그가. 그러자 우는 목소리가 더 깊어진다. 잘못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열심히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어? 하는 심정으로 올려다봤더니 박지민이 핸드폰을 빼앗아 듣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는 박지민이 내 핸드폰을 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쭝얼거리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 진짜....진짜,

"..........."

- 잘못했다고......



조용히 듣고 있던 박지민이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통화를 끊고 나가는 박지민의 뒤를 몰래 따라나갔다. 도착한 곳은 가로등 하나가 비스듬이 내리쬐고 있는 학교 앞 원룸 골목길이었다. 벽 부근에 주저앉아 있던 전정국의 앞에 박지민이 섰다. 그러자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얼굴. 아무도 오가지 않아 조용한 골목길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말이 떨어지자 전정국은 또 울음을 터뜨렸다. 박지민은 화내거나 짜증내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전정국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물기어린 목소리로 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요, 다... 선배랑 김주연 사이 흩뜨리려고 한 거, 그렇게 속이면서 선배 앞에서는 모르는 척 순진한 척 한 거요.... 죄송해요... 그게 다야? ...네? 그게 다냐고. 아직 다 안 말했잖아, 대답해. 박지민을 한참동안 올려다보던 전정국이 손을 부들부들 떤다. 흐..........



"제가, 선배 좋아,해서, 죄송해요.........."

"............."

"진짜, 진짜 죄송,해요........."



제 입으로 치부까지 까발린 전정국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서는 서럽게 울었다. 진짜....너무...죄송해요.......선배..... 나는 다음 순간 박지민이 보인 행동에 숨을 멈췄다. 제자리에 앉은 박지민이 손을 뻗어 울고 있는 전정국의 고개를 들어올린 거였다. 그리고, 목 뒤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비틀고는... 입을 맞췄다. 잠시동안 그걸 바라보고 있던 나는 뒤로 돌아 기숙사로 향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일이면 전정국이 동아리에 탈퇴서를 제출하러 오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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