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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CCCC 上

집단주의는 무릇 원시공동체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가진 인간의 본능이다. 아무리 요새 들어서 개인주의니 뭐니 하지만 그래도 다들 집단에 속해 있지 않는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혈연이라는 집단에서부터 유치원, 초등, 중등, 고등학교에서 사귄 친구라는 이름의 집단에까지.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수능을 치고 대학교에 와서는 동아리라는 집단에 들곤 한다. 서두가 길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지금부터 말할 동아리에 대한 거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학회랑 중앙동아리가 있다. 먼저 학회는 해당 단과대학의 소속인 학생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그룹이고, 동아리는 해당 학교에 다니는 재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그룹이다. 예를 들면, 경상대 학회들 중 하나인 유칼(youth colors)은 경상대학 학생들만이 가입할 수 있고, 공대나 체대 학생들은 가입할 수 없다. 그러나 중앙 동아리에 속한 여행 동아리 파라다이스에는 경영 학생이든, 미대 학생이든 가입이 가능하다. 이해가 됐는지? 무튼 보통은 학회나 동아리 둘 중 하나만 하는데, 나는 두개 다 들었다. 더 완벽한 대학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여기서 하나 중요한 점은, 내가 속한 동아리가 비밀 동아리라는 것이다. 우리 동아리는 비밀리에 활동하며 다른 동아리들처럼 신입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홍보하지도 않는다. 비밀 동아리기에 쉽게 들어올 수도 없다. 아는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고,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암호를 대야 하지. 암호는 바로 이거다. 세상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솔로 천국과 커플 지옥이라는 뜻이다."



...응?


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이 누군가에게서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근육질 토끼를 생각하게 하는 남자애 하나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선배, CCCC 사람 맞죠?






CCCC

Campus Couple Cutting Club






CCCC. 캠퍼스 커플 컷팅 클럽. 이름 그대로 커플들을 갈라놓는 동아리다. 이 동아리를 만든 초대 선배님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캠퍼스 내에서 애정행각들을 벌이는 잔혹무도한 커플들에 신경쇠약을 겪으셨다고 했다. 이리 돌려도 쪽, 저리 돌려도 쪽쪽. 서로에게 눈이 멀어 아까운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그들을 구해주어 솔로의 참된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CCCC를 개설 - 은 사실 구라고, 그냥 갈라놓는 게 재미있어서. 커플들을 갈라놓을 생각을 하다니 자기는 연인을 사귈 수 없이 못생기고 매력도 없으니까 못된 심보가 발동한 게 아닐까 싶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CCCC사람들은 대부분 잘생기고 예쁘다. 그것도 초대박 미남들과 미녀가 대다수. 당연히 거기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서 수많은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이쁨을 받아온 김태형! 하!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가입했는지 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에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던 손을 내리고 걜 쳐다봤다. 그때 암호를 읊고 동아리 가입 신청을 한 이름은 전정국으로, 이번 경영 새내기였다. 먼저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을 정도로 꽤 유명했다. 16학번에서 나와 박지민이 있었다면 17학번에서는 전정국. 저렇게 잘생긴 애를 내가 속한 학회로 데리고 오면 가입자가 늘어날 건 뻔한 일이었기에 데려오려 신환회때 갖은 수를 다 썼었는데 노력이 무색하게 박지민이 있는 유칼로 홀랑 가 버렸다. 많은 인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 앞 음식점의 수는 거기서 거기인지라 총회가 끝나고 뒷풀이를 하러 음식점에 들어가 거기서 박지민네 학회에 있는 전정국을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쟬 데리고 왔다면 이번 가입자 수는 두배였을 텐데...



"무릇 사람은 혼자일때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것이니. 내가 바로 불쌍한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서이니라."

"뭐래."

"그러는 넌 왜 여기 들어온 건데? 경신회로 오라는 내 말도 씹고 유칼로 간 후배님. 내가 밥도 두 번이나 사줬는데."

"크게 될 사람은 뒤끝 있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커플 갈라놓는 거, 관심이 생겨서요."

"난 이미 커서 더 안 커도 돼. 왜 뭐 갈라놓고 싶은 커플이라도 있어?"

"네."



심드렁한 얼굴로 한껏 건들거리며 묻던 나는 긍정의 대답이 돌아오자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대박. 있었으면 오자마자 이야기 했어야지! 곧 임무가 내려올 거란 생각에 눈앞이 탁 트이고 없던 힘도 마구 치솟는다. 방학이 되기 전에 솔로로 만들어주리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는 들려오는 이름에 귀를 의심했다. 박지민이요. 정적. 아냐 내가 생각하는 그 박지민은 아니겠지.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내 앞의 신입은 못을 박아버리고 말았다.



"유칼 박지민 선배 말하는 거 맞는데요. 김주연이랑 사귀는."





위에서 박지민이랑 내가 무슨 철천지 원수인 양 써놨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알아왔고, 같은 대학과 같은 학과에 붙었으며 현재 기숙사 룸메이트니까. 16학번에서 내가 조각미남으로 유명했다면, 박지민은 분위기 미남으로 유명했다. 때묻지 않은 천사처럼 순수한 이미지였다가도 섹시하게 훅 바뀌는 모습에 무수히 많은 여인네들의 암투가 분분했다. 걔 때문에 내 머리채가 잡힌 적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 연유로 내가 CCCC에 가입한 이유에는 박지민이 한몫 하기도 했다. 그토록 인기가 많았어도 박지민은 씨씨를 하지 않았는데, 올해 17학번 미대 여신이랑 커플이 되었다. 한 달 밖에 안 된 풋풋한 커플이랄까. 커플을 갈라놓는 게 내 취미이긴 하지만, 걔네 커플에는 손 대지 않았다. 친구니까. 김주연에게 접근해서 바람피우게 만드는 건 쉽지만, 친구한테 그러는 건 최소한의 양심이 찔린다. 나는 박지민과 김주연 커플에는 연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고 동아리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동아리에서 아마 진행되고 있을 커플 브레이킹 계획을 하나도 모른다. 맨.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박지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응? 연애는 순항 중이냐? 핸드폰을 열심히 만지고 있던 박지민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응. 그래? 아직까지는 실행을 하지 않았나 보군. 아니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거나. 나는 머릿속을 열심히 굴렸다. 접근을 한다면 박지민에게일까 김주연에게일까. 김주연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컸다. 박지민은 모두에게 친절하긴 해도 호구는 아니었고, 멍청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4년지기의 견해, 꼬셔낼려고 해도 그닥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미래에 박지민이 차이는 상황을 그리며 어깨를 토닥여줬다.



"나중에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이 형이 술을 사주마."

"갑자기 뭔 소리야?"

"인생이란 힘들고도 힘든 법이지."



너 더위 먹었어? 묻는 말을 뒤로 한 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불쌍한 내 친구. 그러게 누가 커플이 되랬니. 마음의 소리가 들릴 리 없는 박지민은 괴상한 얼굴로 나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몇 분쯤을 그렇게 있었을까. 여보세요? 응. 지금? 아냐 괜찮아. 조금만 기다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가? 김주연?



"아니, 정국이."

"전정국? 왜?"

"지갑을 잃어버려서 차비가 없대. 역 앞인데 택시에 두고 내렸다나봐."

"다른 애한테 빌리라고 그럼 되지. 역까지 가게?"

"나한테 전화를 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 그래."



그리고 '선배, 도와주세요'라니 귀엽잖아. 피식 웃으며 기숙사를 나가는 박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애도를 표했다. 전정국이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에 한 표를 던진다. 아마 걘 박지민을 골탕먹이려고 거짓말을 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불행을 비는 애인지도 모르고 귀여운 후배라며 나가는 꼴이란. 나중에 술 10병 정도는 사야 할 느낌이 온다. 



* *



자고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두 말을 지나 세 말, 네 말, 여러 말을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내 입으로 박지민의 연애사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요즘 들어 관여하고 싶어 죽겠다. 동아리 사람들은 쓸데없이 배려심만 넘쳤다. 정말 나에게 박지민과 김주연네 커플 망치기 작전을 먼지만큼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어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냐며 딱 잘라 끊었다. 쓸데없이 단호박인 사람들이다. 나는 전정국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0분 전부터 쳐다보고 있으면 한 번쯤은 뭘 그렇게 바라보냐고 물어볼 법한데 그러지도 않는다.



"와 진짜 어떻게 한 번도 안 돌아보냐. 너 얼굴 철로 되어 있어?"

"뻔하잖아요. 눈 마주치면 계획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물어볼 거였으면서."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맞는 말이라 반박하지도 못했다. 탁자에 볼을 대고 계속해서 전정국을 노려보다가 자세가 불편해 턱을 괴었다. 검지로 탁자를 토도도독 치며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궁금증이 생겼다. 나야 연애도 싫어하고 커플도 싫어하기에 씨씨라면 갈라놓겠다는 이토록 불건전한 목적을 가진 동아리에 든 거라지만, 얜 그런 건 아니었다. 목적이 분명했지 않았던가. 박지민과 김주연을 갈라놓고 싶어서 가입한 거라고. 잠시간의 생각 끝에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정구가. 왜여.



"너 김주연 좋아해? 그래서 둘 헤어지게 만드려고 하는 거야?"



저번에 박지민한테 지갑 잃어버렸다고 전화해서 역까지 나오게 만들고. 그거 김주연이랑 사귀니까 약간 엿 먹일려고 한 행동 맞지? 내 말에 전정국은 드디어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렇게 보여요? 긍정의 말 대신 역으로 던지는 질문은 암묵적으로 인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랬단 말이지. 그제야 납득이 되었다. 굳이, 제 친구들 말고 선배인 박지민한테 전화를 걸어 역으로 나오게 만든 것도. 그게 다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를 채갔으니까 빡치게 하려고 그랬던 거겠지. 하지만 전정국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박지민은 그런 일들에 하나하나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기꺼이 도와주며 그 부분에서 기분이 업 되는 애니까. 괜히 헛짓거리하는게 안타까워 사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지갑 잃어버렸다고 구라치고 나오게 만드는 거, 너 나름대로 티나지 않게 귀찮고 짜증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니다? 지민이 성격이 좀 독특해서. 남 도와주는 거 좋아하는 애야."

"저 그때 정말 지갑 잃어버려서 전화한 거거든요?"

"잉? 그럼 왜 동기들이나 나한테, 나한테는 왜 전화 안했어?"

"형이 도와줄 위인 같아요? 커플 깨뜨리는 걸 낙으로 삼는 인간인데."



또 맞는 말이라 반박불가.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전정국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이 김주연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전에 들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다시 고개를 돌려 과제에 집중하는 전정국을 보며 생각했다. CCCC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4년마다 CC가 되어 CCCC를 탈퇴하는 사람이 나온다는 괴담이다. 커플이라는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는 우리 동아리 사람들은 그거 정말로 괴담 아니냐며 소름끼쳐 했고 나도 말을 전해준 선배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었다. 근데 괴담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난 3년 동안은 동아리를 탈퇴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이번이 4년째가 되는 년도인데, 나는 어쩌면 그게 전정국이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김주연이랑 커플이 되어 나갈 전정국, 의 모습이.



속마음을 대충 눈치깐 이후 나는 전보다 전정국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학회가 같아서 그런지 박지민과 전정국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박지민의 앞에서 웃으면서 착한 후배를 연기하고 있는 전정국. 노트북 너머로 그 모습을 훔쳐본 나는 팔에 돋아난 닭살을 문질렀다. 연적인데 어찌 그렇게 순수한 척 잘 대할 수 있지? 고단수다. 세상이 두쪽나도 배신 때리지 않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그 누구보다 뒤통수가 아픈 걸 알아서 저러는 거겠지. 무섭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박지민에게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여름방학이 오기 전에 네 첫 씨씨가 끝날 거야, 같은. 


합강에서 교양을 듣고 오던 나는 저쪽에서 박지민이랑 같이 걸어가는 전정국의 모습을 또다시 발견했다. 어떻게 보면 박지민은 김주연이랑 같이 다니는 시간보다 전정국이랑 같이 다니는 시간이 많은 거 같다. 뭐, 김주연이 미대고 전공이 다르니 상대적으로 같은 과인 전정국이랑 마주칠 기회가 많겠지만. 나중에 전정국의 시간표를 우연히 봐서 알게 된 건데, 전정국의 시간표는 박지민의 시간표랑 거의 똑같았다. 학년이 달라 들을 수 없는 전공 수업을 제외하면, 내가 박지민이랑 같은 수업을 듣는 것보다 더 겹쳤으니. 이쯤 되면 전정국은 정말로 무서운 놈인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애를 귀여운 후배라며 잘 챙겨주는 박지민이 조금 불쌍해졌다. 그래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연애는 아직도 순항 중이지?"

"으응."

"그럼 됐고. 너 전정국이랑 많이 친해?"

"친하지. 왜?"

"그냥."



이새끼 불쌍해서 어떡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박지민이 애잔해서 껴안고 흑흑 우는 소리를 냈더니 미친거 아니냐며 진저리를 치며 밀어냈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짚었음을 알게 되었던 때는 그로부터 약 2주가 지난 후였다.



* *



5월 중순에는 축제가 있다. 낮에는 플리마켓이 열리고, 저녁에는 주점이 열리고 갖가지 공연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학교 주점은 가격이 비싼 편이며 맛도 그닥이다. 게다가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비위생적이기 그지없다. 대학 축제에 환상을 가지고 작년 축제에 참석했던 나는 부추가 떨어졌다며 잔디를 뜯어 반죽에 넣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며칠동안 속이 안 좋은 상태로 지내야 했다. 작년은 새내기라 거부 권한이 없어 강제로 함께해야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나는 자유로운 집요정이 되어 축제에 들뜬 학교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칵테일을 하나 사 쪽쪽 빨아마시며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톡톡 치는 느낌에 고개를 살짝 꺾어 쳐다봤다.



"형 한가해요?"

 


나는 하얀 와이셔츠에 단정한 검은 바지를 입고 쉼표머리를 하고 있는 전정국을 발견했다. 차림새를 보니 손님을 모아오는 삐끼 역할이나 서빙을 맡은 거 같았다. 하긴, 전정국 같은 얼굴은 주점에서 할 역할이 하나뿐이지. 전정국은 양 손에 빈 정수기 통을 들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물을 뜨러 오는 역할을 맡은 모양이었다. 나에게 도와달라고 할 생각인가 본데,



"어딜 가려고요?"



튀지 못하게 빠르게 뒷목을 잡아채서 그러지도 못했다.

 

결국 잡혀서 물이나 떠오는 심부름을 대신 해주고 있는 나. 얘랑 같은 학회도 아닌데 왜 내가. 쪼르르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긴 생각에 잠겼다. 양 쪽에 모두 물이 가득 채워지자 하나를 손쉽게 들어올린 전정국은 나를 쳐다봤다. 빨리 들지 않고 뭐하냐는 뜻이 담긴 눈빛이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했다가는 다른 손으로 나를 날릴 거 같아 조용히 물통을 들어올렸다. 진짜 너 선배를 막 부려먹고 그러는 거 아니다, 어? 부려먹는 게 아니라 형이 저한테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세요. 나쁜 짓만 하다가 가끔은 착한 짓 해야지 벌 안 받아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전정국은 따박따박 대답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든 지 얼마나 되었다고 팔이 아픈 나는 물통을 내려놓고 제자리에 섰다. 이번 방학에는 헬스클럽이나 끊을까봐. 아, 이거 이번 겨울에도 다짐했던 거 같은데.



"내려놓으면 어떡해요? 반도 안 왔는데."

"야 정국아 네가 뭐 모르나 본데, 이런 건 농땡이를 치라고 주는 시간이야."



나는 열심히 입을 털기 시작했다. 너 지금까지 손님 끌어오느라 쉬지도 못했지? 형도 작년에 해봐서 안다. 물을 뜨고 바로 돌아가는 건 호구 짓이야. 가자마자 또 열심히 사람들 끌어모아야 한다니까? 근거 쩌는 내 말에 전정국은 슬슬 납득을 하는 눈치였다. 나는 양 팔을 벌려 웅변대회에 나온 자세를 취하며 마지막 말을 마쳤다. 물 뜨러 보내는 시간은 불쌍한 삐끼에게 요령껏 쉬고 오라는 깊은 뜻이니....! 결국 내 말에 넘어간 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물통을 내려놓았다. 그럼 5분만 있다 갈래요.


오늘 공연에 유명한 밴드가 온다고 했었던가.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무대 위에서 신나게 연주하는 밴드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웃고, 즐기고. 커플들도 몇몇 보이고, 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가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눈을 가늘게 떴다. 끝줄에 있는 얼굴은 확실히 박지민이었다. 옆에 있는 건 카톡 프사로 많이 봤던 여자친구, 김주연이었고. 어쩐지 아까 기숙사 나갈 때 차려입고 나가더니만. 오늘 김주연을 만나기로 약속했던 모양이었다. 푸스스 웃는 박지민, 예쁘게 미소 짓는 김주연. 딱히 여자친구에 대해 말도 없고, 둘이 같이 있는 모습도 많이 보지 못해서 데면데면한 커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닌 듯싶었다. 손을 잡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러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고. 사이 좋네. 저 둘은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신경도 쓰지 않아 보이는데 떨어진 내 시선을 느낄 리가. 다음 순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박지민이 고개를 숙여 김주연에게 키스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키스 장면을 보던 나는 내 옆에 있을 전정국의 존재가 생각났다. 얘도 나처럼 저 둘을 보고 있을까? 만일 보고 있다면, 김주연을 좋아하는데 박지민이 저 여자애랑 키스하고 있으니 얼마나 열이 뻗칠까.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전정국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전정국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정국 시선의 끝은 김주연이 아니라 박지민이었다. 허망한 기운이 어려 있는 눈동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말로 표현하지 못할 눈동자였다. 나는 한참동안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전정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정국은 김주연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박지민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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