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와라. 지상세계와는 달리 어둠이 내린 저녁에서야 비로소 하루가 시작되는 이 곳. 눈을 돌리면 사방에는 매혹적인 주홍색 불이 흔들거리고,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들이 부드럽게 웃으며 손님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잡아 유녀의 방에 들어서면 하룻밤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국이 펼쳐졌다. 지상의 질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치외법권의 유곽촌, 요시와라는 그런 곳이었다. 지민은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저잣거리를 보다가 내려앉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지루하신가 봅니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얗고 고운 피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 타오르는 홍염을 농축해서 사람의 입술에 바른다면 저 색이 날까. 눈이 부시도록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녀는 요시와라의 오이란이었다. 유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색이 짙은 단 한 명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 오이란은 요시와라를 비추는 달이기도 했다. 지민은 말없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제 앞에서 술을 따라주고 있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오이란은 아름다웠다. 지민은 그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요시와라의 지배자인 청왕과의 거래를 위해 발을 들여놓은 지민은 이 곳이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분내가 나고 여인들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거리보다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피비린내가 나는 전쟁터가 더 어울렸다.
"지루하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아. 불편해."
"전쟁에만 익숙해지셔서 그렇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휴식을 취하시는 것도 좋죠."
"그런가."
지민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서는 오이란이 따라준 술잔을 비웠다. 향기로운 술이 목 안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겠어. 청왕께는 호의에 감사하다고 전해주게."
가려는 말에 오이란이 따라나오려는 행동을 저지한 지민은 그보다 더 빠르게 미닫이문을 열어젖혔다. 붉은색 천들이 물고기처럼 천장을 헤엄치는 복도를 지나가는 지민을 알아본 견습 기녀들과 시종들이 목을 숙였다. 그들에게는 눈을 주지도 않은 지민은 연이어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더 걸어서야 청왕의 궁을 빠져나온 지민은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조금보다는 느리게, 그렇지만 멈추지는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지나가는 가게마다 붉은 등이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손님을 부르러 나온 여자들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얼굴을 보자 웃음이 새어나오기는커녕 뭐가 턱 얹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아, 역시 여긴 나랑 맞지 않아. 지민이 미간을 슬풋 좁혔다. 요시와라의 끝자락이자 지상으로 향하는 경계선과 점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저 멀리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자 지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을 한껏 풀어헤친 여자가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화려한 옷이 아닌 칙칙한 옷,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짐 보따리로 보아 지민은 그녀가 요시와라를 도망치려는 유녀인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운도 없게 일찍 발각되어 모 아니면 도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겠지. 얼굴에 서린 필사적인 감정. 지민은 도망치는 유녀의 편도, 유녀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편도 아니었다. 이대로 제가 있는 다리를 건너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유녀는 자유가 된다. 그러나 재수가 없어 그전에 잡히면 평생, 전보다 더 비참하게 묶여 요시와라에 갇혀 살겠지. 지민은 자신이 그녀를 잡으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자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사의 표정을 읽어냈다. 그 때였다. 달려오는 여자의 바로 앞에 칼이 콱 하고 날아와 땅바닥에 박혔다. 지민은 날아온 칼 쪽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지붕에 올라있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달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기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검청색 옷자락과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잎들이 그의 몸을 휘감고 떨어져 내렸다. 요시와라의 치안을 담당하며 유녀들이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는 자경단, 그 안에서 유일한 남자 단원이자 대장인 전정국. 일명 '달의 파수꾼'. 정국은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민은 차차 가까워지는 정국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땅에 박혀있는 칼을 잡아 뺀 정국은 체념한 유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유녀를 인도받은 사람들이 멀어져가는 장면을 보던 지민은 정국이 제 쪽으로 몸을 돌리자 시선을 옮겼다. 구름이 걷히면서 안에 숨어있던 달이 몸을 드러냈다. 달빛을 받아 수려한 얼굴이 드러나자 지민은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정국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을 열었다.
"좋지 않은 장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
"그럼,"
말을 마치고 순식간에 사라진 정국의 옷자락이 망막에 잔상을 남겼다. 지민은 제 앞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아챘다. 쥐었던 주먹을 펴 손바닥에 자리한 벚꽃잎을 보다 정국이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지민은 중얼거렸다.
"달..."
저 애가 바로 요시와라의 달이구나.
요시와라의 저잣거리는 늘 평화로웠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선율들과 따스한 불빛 속에 있으면 바깥 세계의 근심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비록 이러한 평화는 영원히 요시와라를 벗어날 수 없는 걸 아는 유녀들이 살아가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거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내와 유녀의 웃음 사이를 지나가면서 지민은 정국을 눈으로 쫓았다. 정국은 저 멀리 떨어진 앞에서 지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자로 잰 듯 정갈했다.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청왕과 거래를 제안하고 돌아오던 길에 보았던 남자를 보고 한눈에 사로잡혔다. 희미한 달빛과 떨어지는 벚꽃 사이에 피어있던 그 아이. 회상하던 지민은 방금까지만 해도 있던 정국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로 간 거지.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찰나에 사라져 버렸다. 살짝 당황하던 지민은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절 따라오고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슨 용건이시죠?"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한 얼굴로 묻는다. 지민은 정국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번에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앳된 티가 약간 묻어나왔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어깨를 으쓱인 지민이 입을 열었다.
"길을 잃었어."
"...예?"
"생각보다 길이 복잡하더군. 나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겠어?"
누가 봐도 둘러대는 말에 정국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지민은 태연스레 행동했다. 이런 거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서 말이야, 보아하니 여기를 잘 아는 듯싶어 나를 안내해주었으면 하는데. 한동안 말 없던 정국은 몸을 돌리며 대답했다. ...따라오세요.
걸어가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말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모두 일방적인 지민의 질문들이었다. 내 기척을 알아채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혹시 바쁜 일이 있던 건 아니겠지? 나 때문에 일이 틀어지는 거면 미안하게 되었는걸. 그나저나 원래 이렇게 말이 없나? 아니면 나와 말 하기가 싫은 건가? 여러 질문에도 정국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눈을 돌려 지민의 눈을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유곽촌의 끝물에 다다르자 지민이 오, 하는 소리를 냈다.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게 되었네. 싱긋 웃어보이는 지민의 얼굴을 보던 정국이 이제껏 닫혀있던 입술을 떼었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무슨 뜻이지?"
"저번에 짧게 뵈었던 분이 아니십니까."
"다 알고 있었나? 그러면 왜 모른 척 했지?"
"장단에 맞춰드린 것뿐입니다."
당돌한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이쯤이면 충분히 맞춰드렸겠죠, 하고 돌아서려는 정국을 붙잡은 지민은 불쑥 말을 던졌다. 다 알고 있으니 빙빙 돌아갈 필요도 없겠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 어느 가게에 가면 너를 볼 수 있나? 자경단일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요시와라의 사람, 그러니 손님이 시중을 들기를 원한다면 들어야 할 터였다. 지민은 그 점을 짚었다. 하지만 정국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저는 시중을 드는 몸이 아닙니다. 제 팔을 잡고 있는 지민의 손을 떼어낸 정국은 엷게 웃어보였다.
"당연히 제가 청을 수락할 거라 생각하셨군요."
"........."
"무례하십니다."
정국의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싸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 안에는 아름다운 유녀들이 많으니 부디 즐거운 밤을 보내시다 가시길. 지민은 찬 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정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국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지민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실수했다.
실수를 저질렀지만 지민은 한 번의 실수로 포기할 사내는 아니었다. 며칠 후 지민은 요시와라에 다시 내려왔고 정국을 찾았다. 그러나 쉽게 눈에 잡히지 않았다. 저번에도 찾는 데에 몇 시간이 걸리긴 했지. 어떻게 할까. 지민은 대충 남아있는 시간을 가늠했다. 투자하려면야 얼마든지 투자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다가는 일이 좀 꼬이게 된다. 그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지민이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자경단은 요시와라의 치안을 지키니, 소란을 피우면 나타나지 않을까? 물론 정국이 올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나 밑져봐야 본전이었다. 지민은 옆에 앉아있던 유녀를 불렀다. 지민의 말을 전해들은 유녀들과 가게 주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지민이 꺼내보인 금전의 액수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전체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곧이어 유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란이 일어나는 가게를 바라보았다. 지민은 안쪽에서 정국이 언제쯤 나타날까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실제로 가끔 있는 일이라고 했다. 손님이 큰 난동을 부리면서 가게의 물건들을 부수는 일들 말이다. 지민의 생각은 틀리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구석에서 덜덜 떠는 유녀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향해 걸어간 정국은 활짝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지민을 발견했다.
"예상대로네."
설마 하는 표정이 순간 정국의 얼굴 위를 스쳐지나갔다. 훅 뒤돌았을 땐 벌벌 떨고 있던 유녀들은 어느 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지민은 한숨을 쉬는 정국에게 다가갔다. 찾기가 너무 어렵지 뭐야, 그래서 직접 불러내기로 했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정국이 도로 떠 지민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설마, 소동을 벌인 이유가 절 불러내기 위한 거, 그 뿐? 지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지 마세요."
"심심풀이로 부른 거 아니야. 말할 게 있어서."
가려는 기색이 보이자 지민이 말로 정국을 잡아세웠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 저번에 나의 행동에 사과하고 싶어서 부른 거였어. 의외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지민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순하게만 생각했어,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사과에 정국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기 있던 유녀들도 널 부르기 위해 괴롭히지 않았다, 그녀들의 시간도 다 샀어. 불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도움을 청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잠깐만 시간을 내주지 않겠어?"
"........."
"소동을 해결하는 데 걸리는 보통의 시간만큼만."
"그다지 길지는 않을 텐데요."
실력을 자신하는 말에 지민이 웃었다. 손짓을 따라 결국 자리에 앉은 정국을 앞에 둔 지민은 술잔을 따랐다. 쪼로로록,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채워진 잔을 정국에게 밀어주자 고개를 젓는다. 근무중이라. 짧게 떨어지는 대답에 수긍한 지민은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제 앞에 앉은 정국의 눈동자가 깜박였다. 요시와라의 사람답지 않게 투명하고 맑았다. 평소에 술은 아예 안 하나? 아니면 못 하는 편? 별로 즐겨하진 않습니다. 쓴 맛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의외의 대답에 지민이 눈썹을 올렸다. 그대의 입맛은 아직 어린가 보아. 지민은 큰 생각없이 말한 것이었으나 정국의 자존심을 건든 듯싶었다. 정국의 눈썹이 크게 꿈틀한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어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 한 번 마셔보지 그래?"
"근무중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을 터입니다."
"한 잔 가지고 취할까?"
지민은 웃음을 지은 채 정국을 재촉했다. 절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기 그지없었지만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졌다. 결국 자존심을 택한 정국이 술을 단번에 비워내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가보겠습니다. 한껏 불퉁한 말투였다. 지민은 참지 못하고 큭큭 웃다가 정국이 가게를 빠져나가자 서둘러 따라나갔다. 잠깐! 불러봐도 정국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옆을 따라잡은 지민은 정국과 함께 걸어가면서 얼굴을 살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이쪽으로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정색하고 있다. 화난 거냐? 물어봐도 답을 않는다.
"아직 어리구나, 마치 심통난 아이처럼 구니."
"정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정국이 버럭 화를 냈다. 지민이 동그랗게 눈을 뜨자 그제야 언성을 높인 걸 알고 한 단계 낮춰서 말을 이었다. 왜 아까부터 자꾸 신경을 건드리십니까? 지민이 자연스레 대답했다. 신경을 건드리다니,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정국이 눈알을 부라리자 지민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네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뿐인데, 반응이 이리도 차니 가슴이 찢어질 듯 해. 봄바람에 실려온 달콤한 말을 건네도 정국은 시큰둥했다. 하룻밤을 보낼 상대가 필요하신 거라면 얼마든지 다른 자들이 있다고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불할 능력이 있으시다면 오이란을 안는 것도 무리는 아니실 터입니다. 지민은 전에 보았던 오이란을 떠올렸다. 분명히 이야기를 나눴고 가까이에서 보았는데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흰 피부와 붉은 입술만이 어렴풋이 기억난달까. 그에 비해 첫날 보았던 정국은 세세히 기억났다.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이 어느 방향이었는지, 그때 입술은 얼마만큼의 호선을 그리고 있었는지, 전부 다. 딱히 기억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아닌데도 그랬다.
지민은 앞서가는 정국을 다시 냉큼 따라갔다. 따돌리려 발걸음을 빨리 해도 지민은 그런 정국을 놓치지 않고 잘만 따라갔다. 요리조리 움직이는 지민에 정국이 못 참겠는지 몸을 확 돌리려 했을 때, 높은 비명소리와 함께 옆 가게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꺄악!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유녀를 강제로 끌고 가고 있었다. 문제는 남자가 칼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칼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피? 지민이 눈을 찡그렸다. 뒤이어 나온 가게 주인의 어깨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는 걸로 보아 상황을 알아챘지만.
"비켜...! 이 년은 내가 데려갈거야...!!"
유녀의 목에 긴 칼을 대고 있는 남자는 마구 지껄이고 있었다. 겁을 먹어 새파랗다 못해 창백해진 유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사람이 다가올라치면 침을 튀기며 칼을 사방으로 휘젓는 남자를 빨리 제압해야만 했다. 지민은 정국을 흘끗 쳐다보았다. 또 시작이라는 표정이 가득했다. 정국이 상황을 정리하려 앞으로 나오려 할 때였다. 억 하는 비명 소리가 짧게 나며 가게 주인이 쓰러졌다. 가게 안에서는 사내 두 명이 더 나오고 있었다. 모두 칼을 지니고 있었다. 일이 귀찮게 됐다. 정국은 달려든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난투극에 사방이 아수라장이다. 챙챙거리며 남자들을 받아치고 있는 정국을 잠시 바라보던 지민은 자신도 싸움에 합류했다. 가게에 걸려있던 장대를 빼 여자를 인질로 삼고 있던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쓰러눕힌 지민은 떨어진 검을 주워 정국에게 달려들던 남자의 칼을 막아냈다. 쨍- 하고 귀가 얼얼하게 울리는 금속음을 받아낸 지민이 정국을 향해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정국은 지민의 도움을 받은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몇 합 후에 간단하게 상대를 제압하고, 달려온 다른 단원들에게 세 사람의 처리를 지시하는 정국을 보던 지민은 절 향하는 시선에 기대하는 눈빛을 지었다. 진짜 저 사람을 어떻게 하지, 하는 표정이 마냥 귀여워 흐뭇하게 웃고 있던 지민은 당황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얼굴이...."
"응?"
"옆에...피가...."
손을 들어 오른쪽 볼쪽을 흝자 손에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베인 지도 몰랐는데. 이까짓 상처, 대수롭지 않았으나 어쩔 줄 모르는 정국의 표정을 보고 지민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 따끔함에 지민이 신음을 내뱉어도 정국은 아랑곳 않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상처를 소독하는 손길은 서툴러서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지민이 실실 웃고 있자 정국이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지민은 제 상처를 소독해주는 정국의 손등 위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너와 단 둘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 방 안에 정국의 체향이 가득 배어 있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눈앞에 있는 아이의 흔적이 가득해서, 기분이 좋았다. 정국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다치신 거죠? 그럴 리가 없었지만 지민의 반응을 보아하면 충분히 의심 가는 상황이었다. 지민은 정국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지민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글쎄... 손은 느물느물 정국의 무릎 위를 따라 올라가며,
"일부러 다친 거였다면 볼 따위가 아니라 허리를 스치게 했겠지."
했다. 무슨 말인지를 단박에 알아들은 정국에게서 열이 훅 피어올랐다. 뒤로 퍽 밀치는 손길에 지민은 아야야 하고 죽는 소리를 냈다. 벌떡 일어난 정국은 있는 대로 시끄럽게 약을 치우고 있었다. 지민은 밀려난대로 손을 짚고서는 정국을 올려다보았다. 치우던 정국이 조용함에 궁금해졌는지 절 힐끗 돌아보자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양 주먹을 쥐고 몸에 딱 붙인 채 입을 앙 다문 정국이 방을 나가려 했으나 지민이 문 앞을 가로막는 게 더 빨랐다. 아픈 사람을 방치해두고 나갈 거냐? 놀리는 말투에 성질을 낸 정국은 창가에 발을 디뎠다. 어어! 지민이 잡으려 했으나 정국의 옷깃은 손을 유유히 빠져나가 아래로 사라졌다. 안정적으로 뛰어내린 정국이 빠져나가는 그림자를 지켜보며 지민은 턱을 괴었다. 아, 저 아이. 참으로 귀엽다.
두 번을 마주치자 세 번, 네 번 그 이상을 마주치게 되었다. 물론 우연이라기보다는 우연처럼 보이게 만든 지민의 노력이었지만. 정국에게서 반응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일부러 여인들이 좋아할 만한 장신구를 건네 정색하는 정국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상대하기도 귀찮다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정국의 뒤를 따라가고. 그러나 지민은 예전과 달라진 정국을 알 수 있었다. 휭하니 절 내버려두고 가면서도 수월히 따라오게끔 편하게 가는 게 그러했고, 처음과 달리 자신에게 걸음을 맞추는 부분이 그러했고, 제가 물어보면 답을 해주는 부분이 그러했다. 지민은 다리 중간에서 걸음을 멈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정국도 따라 걸음을 멈췄다. 지민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강의 수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끔 이곳이 답답하게 느껴지진 않아?"
"그럴 때가 있긴 하죠."
"바깥은 더 넓고, 자유로운데. 요시와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니."
"........."
대답은 없었다. 강에서 물고기가 튀어올라 퐁 하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려놓으며 지나갔다. 조금 뒤에서야 답이 들려왔다. 저는 여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지민은 고개를 돌려 정국을 바라보았다. 떠나고 싶지 않다의 뜻이 아니었다. 만일 떠나면 지금껏 도망치던 유녀들을 잡았던 네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냐? 아니면 그녀들처럼 너도 도망치다가 잡힐까봐 두려워하는 거냐. 그것도 아니라면, 이곳을 떠나 어떻게 살아갈 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만일 그렇다면 내가 도와 주겠다. 무사히 도망치게 할 자신이 있어. 세 가지 질문들에 모두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더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방금처럼 위험한 말은 꺼내지 마세요. 청왕의 귀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정국은 말을 자르고 몸을 돌렸다. 하루종일 유한 모습을 보이던 정국이 선을 그은 순간이었다. 그걸 보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서, 지민은 정국을 와락 끌어안았다. 정국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중얼거렸다. 내가 네 마음을 또 상하게 했니, 미안하다, 나에게서 등을 돌리지 마라,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아...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는 몰랐지만 지민은 무턱대고 사과부터 내뱉었다. 정국이 다시는 저를 만나주지 않을까 두려웠다. 생각하니 껴안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미움받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별로... 그 자체는 익숙하다. 하지만 네게라면, 두려워."
힘을 주고 있던 지민의 손에 정국이 손이 올려졌다. 다독여주듯 감싸는 손에 들어갔던 힘도 자연스레 풀려졌다. 지민은 미소 짓는 정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웃어주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따스함이 주변의 서늘한 공기를 물러가게 하는 착각. ...웃는 걸 처음 본다. 지민이 중얼거렸다. 정국은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당길 뿐이었다. 미소에 홀린 사람마냥 정국의 입술에 가까워져가던 지민은 정신을 차리고 닿기 직전에 몸을 뒤로 물렸다. 또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얼버무리려 어깨를 으쓱이던 지민은 그러나 다음 순간 제 입술에 먼저 닿아오는 정국의 행동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닿은 입술에 현실감이 없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다 스르륵, 하고 눈이 감기는 걸 보고서야 지민은 정국의 입술을 열었다.
또 어디로 사라지셨냐는, 한탄섞인 말들을 훔쳐들으며 지민은 요시와라를 향해 신나게 달렸다. 더, 더 빨리. 그 아이와 한시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좀 더 빨리. 마음만 조급해 말의 옆구리를 한 번 더 힘껏 걷어찼다. 전쟁터에서야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던 요동치던 감정들을 정국의 옆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뛰고, 몸속을 돌아다니는 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남았구나를 체감하고 싶어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지상의 밝음이 닿지 않는 어둡고 타락한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아이의 영혼은 누구보다 투명하고 순수하게 빛났다. 볼 때마다 매번 넋을 잃고 홀렸다. 그랬다, 자신은 정국을 사랑하고 있었다.
푸르륵 거리는 말을 나무에 묶어놓은 지민은 연못가에 앉아있는 정국을 향해 다가갔다. 사박사박. 풀들이 지민의 발에 밟히며 소리를 냈다. 지민이 다가온 것을 안 정국이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았다. 조금 늦으셨네요. 지민은 사과를 건네고서는 정국의 옆에 따라 앉았다. 여기에 왔을 땐 달이 저쪽에 있었는데, 벌써 제 머리 위에 와 있지 않습니까. 어쩌실 겁니까? 타박을 받아도 지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 피어나 가실 줄을 몰랐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까마귀 한 마리가 날개를 퍼득이며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 *
긴 복도를 걸어 청왕이 있는 방으로 걸어간 정국은 문을 열었다. 들어갔을 때 청왕은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정국은 바로 무릎을 끓고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청왕의 시선이 정국을 향했다가 창으로 향했다. 부르고서도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있던 그는 반쪽이 된 달에 시선을 고정하고서는 입을 열었다.
"유녀의 생활이 궁금해지기라도 한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한 사내와 계속 만나고 있지 않느냐."
정국은 입을 다물었다. 안일했다. 요시와라의 지배자인 청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그저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제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정국은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청왕은 수긍하지 않고 달에서 시선을 떼었다. 네가 만나는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 알고 있느냐? 청왕은 창백한 긴 손가락으로 턱을 괴며 느른하게 말을 내뱉었다. 위험한 사내다. 요시와라를 삼킬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주 위험한 사내이지, 이 청왕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위험 분자라는 거다.
"요시와라를 무너뜨릴 마음을 가진 사내가 요시와라를 지키는 네 곁에 있는 건 몹시 보기 불편하구나."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없애라."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선뜻 평소처럼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절 가만히 바라보던 그 얼굴, 부드럽게 지어주던 그 미소를 떠올리면 절대 칼을 휘두르지 못할 걸 알았다. 대답없는 정국을 보던 청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자를 사랑이라도 한다는 말이냐. 정국은 이 말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리 위에서 지민과 입을 맞췄었다. 구름 사이에 가려져 있던 달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를 기다리면서도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걱정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다치기라도 한 걸까. 만나면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깨닫고 보면 어느 새 웃고 있기도 헀다. 이런 게, 사랑이 맞는 걸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주먹을 말아쥐는 정국을 지켜보던 청왕이 다시금 입을 떼었다. 뭐, 좋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심해라. 청왕이 싸늘한 어조로 정국의 약점을 상기시켰다.
"너의 달이 내 손 안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
"이만하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지 알겠지. 물러가라."
지민은 큰 벚꽃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정국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일이 생겼나. 지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빨리 오면 좋겠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저 아이가 좋아질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한때의 변덕이라고 치부했으나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제 감정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게 분했다. 마음은 그깟 단어보다 훨씬 큰데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치환될 수 있다니. 정국을 떠올리며 지민은 가볍게 웃었다. 저처럼 정국도 사랑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좋아해주면 좋을 텐데. 정국의 마음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제게 호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입을 맞추었으니, 그만큼의 마음은 있다고 봐도 되겠지? 지민이 피식였다. 그 때였다. 저 앞에서 정국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은 기대고 있던 몸을 뗐다. 반가운 마음으로 한껏 웃음 짓고 있던 입가는 어두운 정국의 얼굴을 보자 천천히 사라졌다.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덩달아 심각해진 표정으로 지민은 정국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국아."
멈춰선 정국을 보고 지민은 재차 불렀다. 국아. 지민은 정국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했으나 다음 순간 예리한 칼을 꺼내 달려드는 정국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 있었던 허공을 벤 단도는 곧 방향을 틀어 세차게 달려들었다. 지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국이 왜 갑자기 자신을 해치려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이름을 불러도 정국은 알아듣지 못하는 듯 재빠르게 지민을 노리기만 했다. 쐐액, 볼을 스치고 지나간 칼날을 피해 뒤로 훌쩍 물러간 지민이 매서운 눈으로 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절 노리고 날아오는 칼날을 똑바로 바라보아 피하고선 정국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나무로 밀어붙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작게 진동하자 벚꽃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지민에게 제압당하고 나서도 정국은 벗어나려 힘을 쓰고 있었다. 지민은 정국의 몸을 앞으로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주치는 두 눈동자, 가쁜 숨을 내뱉으며 절 노려보고 있는 정국의 시선. 가슴이 아팠다.
"왜... 날 죽이려고 한 거니."
".........."
나무로 밀어붙인 정국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싫으냐? 지민은 슬피 웃었다. 정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민은 세게 붙잡고 있던 정국의 손목에서 힘을 뺐다. 내가 싫다면... 그 칼로 나를 찔러라. 말을 하고선 자신이 직접 정국의 손을 움직여 심장을 겨누게 만들었다. 이대로 찌르면 된다. 그러나 정국은 팔을 앞으로 내질러 지민을 찌르지 않았다. 막상 기회가 오니 용기가 없느냐? 내가 도와주마. 지민은 정국의 손목을 잡은 그대로 천천히, 제 가슴을 향해 끌어당겼다. 점점 가까워져 정말로 지민의 가슴을 찌를 만큼 가까워지자 정국의 입에서 다급하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 그만....!"
지민의 손이 동작을 멈추자 정국은 단도를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땅으로 콱 박히는 단도를 바라본 지민은 고개를 들었다. 바라본 정국의 눈동자는 온통 물로 일렁이고 있었다. 매섭게 노려보던 시선은 거짓이라는 듯, 보면 한없이 가슴이 아려오는 눈동자를 하고. 지민은 절 끌어당기는 손길을 따라 정국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팔이 얽히고, 체온이 얽히고, 감정이 얽히고... 마침내, 감정이 읽혔다. 정국의 혀를 정신없이 탐하며 지민은 손을 움직여 허리를 쓰다듬었다. 움찔대는 몸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이내 정국의 몸이 내려가 지민의 아래에 자리했다. 반쯤 가려진 달에서 내리는 달빛과 눈처럼 떨어지는 아름다운 꽃잎들 밑에서 지민은 정국을 안았다.
방으로 들어와서 한 번 더 서로를 탐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지민은 한껏 흐트러진 머리칼을 하고 가지런히 숨을 내뱉는 정국을 바라보았다.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나신에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붉은 자욱들이 꽃마냥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지민은 손을 뻗어 달라붙어있는 정국의 머리칼을 떼어주었다. 지민의 손길에 살며시 눈을 감고 있던 정국은 흘러나오는 말에 눈을 떴다. 그래서, 나를 해치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니. 정국은 지민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청왕의 명령이셨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서.."
"너를?"
"아니요, 제가 살아가는 이유를 만들어 준 사람을요."
정국이 다시 지민을 제대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지민이 물어도 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정국이 먼저 몸을 일으키곤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전(前) 대의 오이란입니다. 이곳으로 끌려와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해있던 절 구해준 사람이었고, 제게 있어서 살아갈 의미였어요. 제가 자경단이 된 이유도 오이란을 지키기 위해, 오이란이 있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지민은 어떠한 추임새도 덧붙이지 않고 정국의 말을 들어주었다.
오이란은 늘 요시와라를 벗어나고 싶어 했어요. 그러나 청왕이 오이란을 무사히 보내줄 리 없었죠. 제게 있어서 신과도 같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이란의 탈출을 도왔어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지만... 아니었어요. 청왕은 다 알고 있었죠. 성공했다는 생각을 했을 때 청왕이 나타났죠. 청왕은 그녀가 언제부턴가 요시와라를 떠나리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어요. 이미 다음 대 오이란도 추려냈기에 필요가 없어졌죠. 하지만 저는...저는 아니에요. 저는 오이란이 없으면 살아갈 의미를 잃어요. 청왕도 그걸 알고 있었죠. 그리고 나는 이 요시와라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어요.
"오이란을 살려보내는 대가로 그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했어요. 그녀가 살아있는 한 저는 절대 청왕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니까요."
"나를 죽이지 못했는데 괜찮은 거야? 오이란이 죽을지도 몰라."
"글쎄요. 못 죽이지 않을까요. 그녀를 죽이면, 저를 그의 맘대로 부릴 수도 없을 테니까요."
정국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냐고 물어봤을 때 그러지 못한다고 답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에요. 지민은 처연하게 웃는 정국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오이란이 청왕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떠날 생각이 있다는 말이겠지? 정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누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겠어요? 황제면 몰라도. 자조적인 말에 정국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지민의 손이 멈췄다. 정국은 푸르스름한 하늘이 보이는 창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일 황제가 온다고 해요."
"...그래?"
"네. 그래서 아마 내일은 못 만나겠습니다."
정국은 손을 뻗어 이불 끝에 널려있는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옷을 꿰어입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민은 드러난 정국의 목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게 편 검지가 피부에 닿자 정국이 살짝 움츠렸다. 목 부근에서부터 날갯죽지까지 일직선으로 쓸어내린 지민은 정국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만일... 지민은 첫마디를 내뱉고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만일, 오이란이 청왕의 손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지면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있니. 정국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지민은 그렇게 물었다. 정국에게서 부드러운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끌어안은 지민의 손 위에 제 손을 곱게 포개놓은 정국은 시선을 돌려 지민과 눈을 마주하며 답했다.
"이미 지금도 마음만은 당신과 함께 날아갔는걸요."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온기. 일어나는 움직임에 지민은 짧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느 새 옷을 단정하게 입은 정국은 지민을 보며 웃어보였다. 제게 있어서 오이란..., 어쩌면 그 이상이 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지민은 정국의 마음을 읽었다. 따스한 눈동자, 말투, 그 모든 것을. 말을 마친 정국은 곧 방에서 사라져 저뿐만이 남지 않게 되었지만 남기고 간 말을 음미하며 지민은 행복하게 웃었다.
* *
지민은 청왕과 마주보고 앉아있는 상태였다. 단아하게 치장한 유녀들이 다 데워진 차를 들어 앞에 내놓고 뒷걸음질 쳤다. 반쯤 마시는 동안에도 차에는 한 모금도 입을 대지 않은 지민을 본 청왕이 입을 열었다. 차가 맛이 좋은데, 식기 전에 마시면 그 풍미가 더하지요. 지민은 그저 가볍게 웃을 뿐 여전히 손을 올리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고 시도를 한 자의 대접을 어떻게 곱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독을 넣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게 무슨 소리신지?"
"전날 나를 해치려던 자가 있었다. 그대의 명을 받은 거라 하더군."
"아무래도 충성심에 멋대로 해석해서 행동한 모양이군요. 감히 사과드립니다."
웃으며 받아치는 청왕의 말에 지민이 피식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상대를 바로 벼려낼 듯 예리했다. 청왕과 제안했던 거래도 실질적으로 깨어지게 된 지금 지민은 전처럼 청왕에게 맞춰줄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무너뜨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 때부터 누누이 들어왔지 않았던가. 요시와라의 힘과 이 작은 나라를 지배하는 청왕. 선황들은 요시와라를 없애고 싶어 했지만 청왕의 힘이 두려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과 부정부패들을 눈감아 줄 수밖에 없다고, 청왕이 자멸하지 않는 한, 하고 말이다. 그러나 지민의 생각은 달랐다. 아까 전의 대화들로 확실하게 마음을 굳혔다. 청왕을 죽여야만 한다고. 그리고 요시와라를 이 세상에서 없어버려야만 한다고.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들의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군.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르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군요. 폐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야."
어쩌면 우리는 같은 편이 되었을 지도 모를 텐데. 조소가 담긴 청왕의 말을 흘려들은 지민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달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지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가시는 길까지 안내해줄 아이입니다. 청왕이 설명해주었지만, 그가 누군지 지민이 모를 수가 없었다. 숙였던 고개가 들리고, 지민의 얼굴을 본 정국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황제의 공식적인 방문이라 청왕의 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예를 갖추고 서 있었다. 허리를 숙인 사람들을 끝없이 지나치는 동안 지민과 정국 사이에서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복도를 걸어가며 지민을 안내하고 있던 정국은 모퉁이를 돌아 사람이 없어지자 마침내 입을 떼었다.
"저를 속이셨습니다."
말 속에는 배신감이 어려 있었다. 지민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정국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언질을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아랫입술을 깨무는 정국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지민이 말을 받았다. 내가 황제이면 무엇이 달라지지?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이 거짓이 되기라도 하나. 지민은 정국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절 바라보게 만들었다. 응? 국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너를 사랑하는 내 마음도,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도, 모두. 정국이 눈을 들었다. 눈을 본 지민은 말문이 막혔다. 아뇨,
"알았더라면... 마음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
손을 벗어나 사라지는 정국을, 지민을 잡을 수 없었다. 절 보던 눈동자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해서.
그 날 이후 지민은 정국을 만나지 못했다. 눈빛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려 바로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간을 더 요시와라에 머물렀지만 어느 곳에서도 정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한 마리의 자유로운 새처럼 앉곤 했던 지붕 위에서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벚꽃나무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돌아가셔야 합니다. 걱정스러운 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민은 대답을 않았다. 신분을 말하지 않은 게 그토록 잘못이었던 걸까. 계속해서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고 그렇게 흘려보내다 보니 된 거라. 처음에는 정국이 거리를 둬도 곧 돌아올 줄 알았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정국은 정말로 절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폐하. 재촉하는 말에 지민이 언성을 높이려고 했을 때였다.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지민은 담장 위에 서 있는 정국을 볼 수 있었다. 달을 등지고 선 정국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정국에 놀라며 친위대를 부르려던 가신을 되려 물러가게 만든 지민은 정국을 바라보았다. 단 둘만이 남아있게 되자 정국이 땅으로 뛰어내렸다. 국아. 지민이 애처롭게 불렀지만 정국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제야 정국의 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아챈 지민이 무척 놀라며 손을 뻗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왜 이렇게 다쳤어?"
"..........."
"청왕이 네게 무리한 일을 시킨 거로군. 이,"
"아니요, 제가 원해서 한 겁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지민이 입을 다물었다. 정국은 지민이 둘러준 옷자락이 흘러내리게 놔두며 입을 열었다. 제 삶이란 이런 겁니다. 감정을 없애고 피를 손에 묻히는, 자비 없는 사람이요.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을 만나는 동안 착각했습니다, 그동안 허황된 꿈을 꾸고 있었던 거죠. 이제야...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절 노려보는 정국의 눈동자에는 날카로움만이 가득했다. 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국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정국은 칼을 빼내 지민이 둘러준 옷을 찢어냈다.
".......!"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얼음장마냥 차갑게 떨어지는 목소리, 반으로 나뉜 천. 틀어진 관계처럼 천 조각은 땅을 애처로이 뒹굴었다.
달콤했던 꿈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텐데. 그저,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지민은 쥐고 있던 손을 폈다. 하나하나 뜯은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지민은 손을 뒤집어 연못 위로 떨궜다. 수면 위에 뿌려진 꽃잎들을 보던 지민은 제게 묻는 목소리를 들었다. 폐하, 칠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명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출전할 수 있습니다.
요시와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 지민은 말을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리라 자신했다. 정국을 보기 위해서만 요시와라를 드나든 건 아니었다. 그곳을 드나들 때마다 정보를 얻어왔으며, 사전 조사를 했다. 어느 곳을 쳐야 효율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지 아닌지도. 그러나 지금은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이 상태에서 요시와라를 치면 정국이 자신에게 칼을 겨누지 않을까? 그러진 않다고 하더라도 전투에 휘말려 싸늘한 주검이 되진 않을까. 둘 중 어느 선택지를 상상하든 고통스러웠다.
"됐다."
"하오나..."
"예의 건은 어찌 되었지?"
더 물으려는 신하의 말을 가로막은 지민은 다른 걸 물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쳐 나온 자들은 한정되어 있으니, 많은 시일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보고하라. 예, 폐하. 짤막하게 명을 내린 지민은 걸음을 옮겨 궁으로 들어섰다. 깊은 밤이 되어 인기척이 없어지고, 타오르던 불길도 작아졌을 때 지민은 말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정국이 손을 뻗어 늘어진 버들가지를 잡아냈다. 파들리는 가지를 응시하던 정국은 문득 느껴지는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무언가를 읽어내고 싶은 듯 한참동안 바라본다. 그러다 대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떼고 사라졌다. 정국이 한참동안 지켜보던 수풀 너머에는 지민이 있었다. 정국을 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던 지민은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항상 만나던 장소에 다다른 지민은 바위 틈 사이에 들고 온 편지를 끼워넣었다.
정국이 편지를 읽었는지 아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끼워놓았던 편지가 사라진 걸로 보아 가져갔긴 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폐하. 고요함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민이 말에 올라타려던 동작을 멈췄다. 정국이 절 보고 있었다.
"왜 계속 찾아오시는 겁니까. 제 대답은 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는,"
"폐하께서 요시와라를 치려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자경단입니다, 이곳을 지키는 자이지요. 들어오신다면 칼을 겨눌 수밖에 없습니다."
"........."
"한 번. 앞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더 오신다면 주저않고 검을 뽑겠습니다."
눈빛은 완고했다. 지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국이 단도를 들어 지민이 타고 있던 말의 주변을 향해 던지자 놀란 말이 히히힝 하고 울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황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라 색은 바랬어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황족이라는 높은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삶은 황량하고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여러 황자들 간의 황위다툼이 빈번했으며, 각기 지지하는 황자들을 위한 궁중 암투도 잦았다. 차라리 계승권의 가망이 없는 약한 황자로 태어나 무시를 당하더라도 마음은 편한 삶을 사는 게 좋았을 걸. 어중간하게 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목숨을 위협당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황궁에 있으면 나도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구나, 라는 걸. 벗어나야겠다고만 생각했다. 황궁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에 참가하는 일 뿐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아이러니.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죽을 만큼 심한 고통을 느끼니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커졌다.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죽여나가니 어느 새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자연스레 따르는 자들도 많아졌다. 이제 황위는 자신과 다른 황자 하나, 이렇게 둘로 좁혀져 있었다. 황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따르는 자들에게 신뢰를 주어야 할 터. 그러나 지민은 그러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모든 게 거짓이었기에 할 수 없었다.
- 언제까지고 혼자만 믿고 사실 수는 없습니다.
살기 위해 황궁을 떠난 지민을 쫓아나온 그 사람이 말했다. 물론, 지민은 그 사람조차도 믿고 있지 않았다. 혼자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지민은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날이 상한 검을 바라보던 지민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믿고 배신당하느니 아예 처음부터 믿지도 않아 배신도 당하지 않는 게 더 그럴듯하지 않느냐. 지민의 지론은 그랬다. 근거는 얼마든지 있었다. 1황자 측에 오래 붙어있다가 지민의 세력이 더 견고해지자 소속을 옮겨온 자들이라던지, 등등.
- 막말로 1황자가 황태자가 되면 네가 저 쪽에 붙을지 내 곁에 남아있을지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인데. 믿음은 의미 없어.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지민은 돌아누우며 눈을 감았다. 장면은 빠르게 넘어갔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좁디좁은 협곡, 비명이 난무하던 숲 속. 지민은 쉼 없이 칼을 휘둘렀다.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숨을 고르던 지민은 저를 향해 검을 겨누는 그를 보았다. 전하.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만이 전하의 길이십니다. 지민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그동안 함께한 시간,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가 콱 하고 칼을 내리찍자 피하려 몸을 뺀 지민은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넘어가 있었다. 지민은 제가 떨어진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절벽 아래에 푹신한 이끼가 깔린 공간이 있어서 크게 다치지 않았다. 며칠 후에 간신히 진영으로 돌아간 지민은 절 보는 가신들의 혼비백산한 얼굴을 보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추궁하자 며칠 전 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고 했다. 숲에서 간신히 살아나오다 집중 공격을 받아 시신도 찾지 못할 만큼 처참하게 죽었다고. 지민은 깨달았다. 그 사람이, 절 살리고 대신 죽었다고.
절 보던 정국의 눈빛이 그랬다. 그건,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을 내뱉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건 확실했지만, 그 이상은? 지민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꽃병이 쓰러지고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알아도 어떤 행동을 해야하는지 몰라.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지민이 성질을 냈다. 쓸데없는 일이면 물러가라.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눈을 들었다. 예의 건 일입니다.
"누구였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빨리 말하라."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뭐?"
지민이 되물었다. 십 년 전후로 요시와라에 끌려갔던 여자들을 추려냈습니다. 지금의 오이란 말고, 전 대의 오이란이 누구였는지 알아냈습니다만... 이미 죽은 지 몇 년이 흘렀습니다. 사실을 들은 지민의 눈앞에 정국이 스쳐지나갔다. 정국은 이 사실을 모른다. 오이란이 살아있는지 알고 청왕에게 묶여 있었다. 알려줘야만 했다. 다시 오시면, 그때는 검을 겨누겠습니다. 잠시 동작이 멈췄지만 그마저도 지민을 막지는 못했다.
갖가지 선율이 공중을 어지러이 떠돌아다닌다. 발에 채이는 돌에 잠시 비틀거리면서도 눈은 정국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깨가 치이면서 손으로 비집으면서 지민은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필사적으로 찾았을까.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검은 인영 하나가 보였다. 지민은 황급히 발을 움직였으나 다다랐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정국은 정말 달일지도 몰랐다, 볼 수 있는데도 닿지는 못하니. 아아... 지민은 맥없는 신음을 흘렸다. 시끌벅적했던 주변이 고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요해진 주변 사이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다시 오시면, 제가 검을 빼들겠다 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민은 다음 순간 무서운 힘으로 제게 달려드는 정국의 칼을 막아냈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검이 흔들릴 정도였다. 국아, 잠깐만! 말리려 했으나 정국은 듣지도 않고 계속해서 지민을 노리기만 했다. 대응만 하던 지민은 정국의 검이 머리께를 스치고 지나가 앞머리가 만들어진 바람에 휘날리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눈빛을 바꾼 지민은 날아드는 검을 강하게 쳐 정국이 주춤거린 틈을 타 코앞까지 빠르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국은 제압당해 지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놓친 칼이 주르르 밀려가 처마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위치했다. 정국의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울 듯 한껏 일렁이는 정국의 눈을 본 지민은 검을 집어넣고 주저앉았다. 손을 뻗자 반대쪽으로 얼굴을 홱 돌려 제 손을 피한다. 허공을 잡던 지민은 손을 거두고서는 입을 열었다.
"국아."
".........."
"할 말이 있어서 왔다."
".........."
"네가 말했던 그 오이란, ...죽었어."
정국의 고개가 천천히 돌려졌다. 지민을 보는 검은 눈은 멍한 기색이 가득했다. 말도 안 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청왕이 네게 거짓말을 한 거다. 거짓말. 정국이 툭 내뱉었다. 정국은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제가 오지 말라고 해서, 괜히 말도 안 되는 말 지어내서 온 거죠. 죽었다니, 말도 안 돼요. 부정하는 목소리에 살짝 눈을 감았다. 진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말하기가 힘들었다. 죽인 건 자신이 아닌데도 정국의 가슴을 후벼파는 건 똑같아서. 지민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날, 네가 오이란과 도망치다가 잡혔다고 한 날,
"정말 오이란이 요시와라를 떠난 걸 확인했니?"
"당연하,"
"정말로?"
정국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청왕이 죽였다. 그리고서는 너를 계속 속여온 거야, 줄곧... 말을 마친 지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국아. 조심스레 불렀던 지민은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일으켜 떨어져 있던 검을 잡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정국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국아!!! 가면 안 돼!!!!!
* *
오이란이 죽었다. 오이란을 죽였다. 정국의 머릿속에는 두 문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정국은 청왕궁으로 들어섰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방 안에 등장한 불청객에 청왕이 뒤를 돌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을 보고서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얼굴이 꽤나 무서워 보이는군. 정국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오이란을... 죽이셨습니까?"
검을 쥔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정국은 절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청왕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보았다. 아. 그 다음에 흘러나오는 말에는 잔인함마저 배어 있었다.
"이제 알았단 말이냐?"
청왕이 웃었다. 그것도 모르고 여태껏 살아있는 줄 알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나는 자비가 없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도망치다가 걸린 그 날, 그 계집을 죽였지. 청왕은 손을 꼬며 덧붙였다. 손짓 한 번에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연약하고 가치가 없었지. 정국의 이가 까드득 갈렸다. 지민의 말이 다 사실이었다. 절 속였다는 것, 청왕이 오이란을 죽였다는 것. 오이란은 요시와라를 나가 다시 한 번 바깥 세상을 보는 게 평생의 꿈이라고 했었다. 절 살려준 그녀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청왕의 개가 되었는데, 처음부터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 절 갖고 놀았던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착실히 따르는 제 모습을 비웃으며. 정국의 생각을 읽은 듯 청왕은 가볍게 조소하며 덧붙였다.
"밖? 바깥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죽었어. 물론 유체도 요시와라에서 불태워졌지. 단 한 발짝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다."
하하하! 크게 웃어제끼는 청왕에 더 이상 참지 못한 정국은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이성을 잃은 정국이 돌진했으나 청왕은 눈 깜짝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정국의 손목을 꺾어 칼날을 저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쓰러져서 부들거리는 정국의 손등을 발로 콱 밟을 뿐이었다. 분노로 인해 일순간 침착함을 잃어버렸다 해도 청왕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정국은 청왕을 이길 수 없었다.
"어리석은 것. 판단도 못하고 감히 나에게 달려들다니."
"개...자식..."
"황제를 죽이지도 못하고, 쓸모 없어. 죽일 가치도 없다, 넌."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청왕은 정국을 지하 감옥에 가두게 시켰다. 한 번 들어가면 절대 살아서 나올 수 없다는 곳, 심지어는 죽어서도 나오지 못한다는 그 곳.
정국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주변은 온통 어두워서 얼마동안을 여기에 있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다만 작은 창살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이 밤임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잘 들어, ...오이란은 죽었어. 지민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돌아다녔다.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다 이 어리석은 것아. 청왕의 목소리.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대체 왜 살아왔던 거냐고, 그토록 청왕을 증오하면서, 왜 그의 말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냐고. 정국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이미 손등은 몇 번이고 내리쳐 상처투성이였다. 이제 모든 게 소용없었다. 여기를 나갈 수 없으니까. 정국은 체념하고 눈을 감았다.
국아.
희미한 목소리에 정국이 눈을 떴다. 국아. 지민이 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절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 단원들의 보고를 받고 말리려 달려온 저를 보며 환하게 웃던 지민의 얼굴. 어이없고 황당한 발상에 이 사람은 뭐지? 싶었었다. 사과하고 싶은데, 널 찾기가 너무 힘들어서. 우스웠지만 어쩐지 제 마음을 간질였던 문장. 벚꽃잎이 어지러이 떨어지는 사이에서 절 죽이라며 덤덤하게 말하던 얼굴. 너를 사랑하는 사실만으로는 안 되냐며 슬픈 얼굴로 묻던 얼굴, 그리고...
그래도 난 널 진실로 사랑한다고, 적혀 있던 지민의 편지.
정국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버려 눈물조차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나와 함께 요시와라를 떠나지 않겠니? 달빛을 받아 잔잔하게 빛나는 강물을 보던 지민이 그렇게 물었었다.
아, 당신이라면 나는 여기를 떠나고 싶어. 정국이 흐느꼈다. 지민이 황제임을 숨겼던 사실에 화난 게 아니었다. 사실, 그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한 자신이 미워서 그렇게 쌀쌀맞게 행동했던 것뿐이었다. 요시와라에서 태어나 피비린내 나는 일들을 하며 더럽게만 살아왔는데 그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고결하게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있지 못할 일이어서, 나는 한낱 유희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며 거짓으로 치부했다. 일부러 날카롭게 말하고 상처를 주었다. 내 말에 난도질당하는 그의 심장을 보면서... 더 매정하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정국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오면 죽이겠다고까지 했는데 지민은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절 다시 찾아왔다. 오이란이 죽었다는 걸 알면 상처받을 날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이 지옥에서 끌어내주고 싶어서, 그 기대에 희망을 걸고 찾아왔음을 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다시 본다면 꼭 끌어안고 나도 사실은 당신을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싶은데.
"정국아,"
이럴 때 환청은 또 들리지. 정국은 고개를 흔들었다. 듣기 싫었다. 최소한 마지막에 그 얼굴을 제대로 보고 왔어야 했는데. 정국은 몹시 후회했다. 그 때, 흐려졌던 시야가 조금 또렷해졌다. 제가 눈물을 훔친 게 아니었다. 지민이, 엷게 웃고 있었다. 정국아. 붙드는 손의 힘이,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데리러 왔다."
지민이 정국의 눈물을 닦아주며 눈을 접었다. 내 하늘에 달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이렇게 찾아왔어.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으로 지민을 쳐다보고, 팔을 천천히 짚어보던 정국은 그제야 현실임을 알고 지민의 품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었다. 지민이, 절 찾으러 왔다.
미워하지 않았어요, 사실은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해요... 갖가지 단어들이 뭉개졌지만 지민은 다 알아들었다. 등을 토닥여주던 지민은 정국이 좀 진정된 듯하자 조심스럽게 정국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더 빨리 오지 못해 미안하구나. 정국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항상 강해보이던 정국은 마음이 여렸다. 울음을 그친 정국의 볼을 쓰다듬어주며 지민이 입을 열었다. 내 신분이 너에게 짐이 될 줄 몰랐다. 남들이 늘 날 받아주는 거에만 익숙해, 너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어. 지민은 진심을 담아 하나하나 전달했다. 내 오만이었다. 미안하다.
"괜찮다면, 나를 따라 새 세상으로 나가지 않겠니?"
이 목숨이 다하는 한 너만을 사랑하며 지켜주겠다 약조하마.
유난히 거리가 조용했던 그날 밤, 요시와라의 벽이 흔들렸다. 붉은 전등들만이 매달리던 가게에 큰 불이 피어올랐고, 속속들이 다른 가게에서도 빠르게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와라의 전 지역에 불길이 타올랐고 땅이 진동할 만큼의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어오른 불들은 모두 청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들의 움직임이었다. 몇백년만에서야 소리를 낸, 청왕을 향한 반기의 시작이었다. 지민은 옷 위에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밑에 숨겨져 있던 황제의 화려한 금장식이 드러났다. 지민이 옷을 벗어던지자 요시와라에 숨어있던 황제의 친위대 또한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합류한 건 친위대뿐만이 아니었다. 요시와라를 지키고, 청왕의 말을 따르던 자경단들도 모두 뜻을 함께했다. 지민은 지붕 위에 올라있는 정국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 일자로 입을 다물고 있던 정국은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같이 웃어준 지민은 다음 순간 검집에서 검을 빼내어 하늘을 향해 높게 치켜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 크게 퍼지는 함성 소리. 말의 옆구리를 차 정국과 나란히 달리며 지민은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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