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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진] αα(더블 알파)

단정하게 차려입은 긴 다리가 복도를 거닐었다. 첫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을 만나는 미팅장소. 문고리를 돌리려던 태형은 노크를 하지 않았단 것을 생각해내고서는 똑똑, 하고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건 미리 와 있던 몇몇 배우들. 미팅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기에 빈 자리가 남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절 보고 인사하는 배우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인 태형은 마무리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던 태형의 눈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절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로 향했다. 무료한 듯 턱을 괴고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눈. 주연을 맡은 김석진이었다. 태형이 석진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번 촬영을 함께 하게 된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앞만을 보고 있던 시선이 돌려져 태형을 향했다. 날카로운 눈.

 


"김태형 씨?"



석진이 웃었다. 방금 절 매섭게 보던 눈빛은 착각이라는 듯이. 잘생기셨네요. 석진의 말은 부드러웠으나 어딘가 깔보는 느낌에 태형이 미간을 슬풋 좁혔다.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석진은 태형에게 내뱉었다.



"오메가 같이 생겼어요."



태형이 주먹을 쥐었다. 지가 더 오메가 같으면서.






αα 

더블 알파






김석진은 탑 연기자였다. 대한민국에서 김석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흥행 보장 배우, 잘생긴 외모, 넓은 어깨, 매너 있는 스윗가이. 그게 김석진을 대표하는 수식어들이었다. 게다가 알파 연예인이라는 사실은 그에 날개를 더 달아주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그 개체 수는 5%밖에 달하지 않는다. 또한 태생부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알파들은 대중들에게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연예계 쪽보다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사업이나 정치수완 쪽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석진은 연예계를 선택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해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태형은 떠오르는 신인 배우였다.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카메라 마사지를 얼마 받지 못했는데도 화면을 뚫고 튀어나오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장면과 감정에 따라 휙휙 바뀌는 표정연기를 보고 입소문이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걔 연기 좀 잘하는 것 같지 않냐. 누구? 그...뭐더라, 아! 김태형! 김태형 말이야. 첫 출연한 드라마 시청률이 23%을 넘겨 성공적으로 데뷔한 태형은 후에 있던 잡지 인터뷰에서 자신이 알파라고 밝힘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알파 연예인.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실시간 검색어 1위에까지 오른 태형을 감독들이 눈여겨보지 않을 리 없었다. 연기가 되는 대세 신인 배우, 태형에게 다음 드라마 컨텍이 들어왔다.


평소 좋아하던 감독에게 제의를 받은 태형이 수락하지 않을 리 없었다. 대본 한 장을 읽고 바로 수락한 태형은 출연진에 석진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는 무척이나 놀라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김석진이랑 촬영이라니. 모든 대중들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배우에게. 그러나 들뜬 태형에게 매니저가 충고했다. 김석진은 은근히 지랄맞으니 조심하라- 고.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네가 믿고 있는 김석진의 이미지는 다 포장이라고. 대놓고 깽판치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말로 신경을 살살 긁고, 결국에는 상대가 버티지 못하고 나가게 만드는 개썅놈이라고. 태형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첫 만남에서 단번에 깨달았다.



'오메가 같이 생겼어요.'



눈빛과 목소리에서부터 깔려 있는 알파 기저. 오만한 기류를 태형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라왔으니까. 그걸 들은 순간 석진에 대한 태형의 생각은 존경하는 대선배님에서 개씹새끼로 바뀌고 말았다. 오메가라니. 상대의 성향이 알파임을 아는데도 멋대로 바꿔서 말하는 건 모욕이었다. 지는? 얼굴형도 둥글하고 입술도 통통한 게 굳이 누가 더 오메가인지를 따지자면 -둘다 알파라 정말 자존심 싸움에 불과했지만- 석진이 더 가깝지 않나 싶었다. 욱 하는 마음에 태형은 그자리에서 선배님이 더 오메가 같으신데요, 하고 말하려다 간신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금도.



"컷!"



컷 사인이 떨어지자 석진의 멱살을 붙들고 있던 태형이 손을 놓았다.



"석진씨 방금 대사 괜찮았는데?"

"괜찮았어요? 승한이라면 화났을 때 주체하지 못하고 지금 드는 생각들을 다 쏟아낼 것 같아서 해본 건데."



감독이 칭찬하는 말을 던지자 석진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지만 감독의 마음에 든 듯 했다. 카메라를 돌려 장면을 확인하고 있던 감독이 만족했는지 다음 씬으로 넘어가자는 말을 꺼냈지만 태형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석진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작중에서 둘도 없는 친한 친구로 나오다 갈등이 빚어져 틀어지는 부분이었다. 재현, 그러니까 태형은 방금 전 석진이 애드립으로 한 대사가 작중 인물인 재현이 아니라 실제 김태형을 향해 한 말이란걸 알아들었다. 상대를 내려다보면서, 멱살이 붙잡히고 있는 건 저인데 마치 상대가 반대로 잡히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처럼.



'이러니까 너가 나한테 안 되는 거야, 병신아.'



하고.



"태형씨 방금 내가 한 대사 태형씨가 아니라 재현이한테 한 말인거 알죠?"



석진이 눈을 휘며 내뱉었다. 아 저 씨발 새끼가 진짜.



* *



"성질 죽이고 살라는 내 말이 헛되지 않아 보여 뿌듯하구나."



지민이 만족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새벽 3시가 넘어가 영업 종료 시간을 한참 넘긴 술집에서는 주인장인 지민과 손님인 태형만이 앉아 있었다. 아까 촬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토해내며 김석진을 씹는 태형에 감탄사와 동조를 해주던 지민은 끝까지 듣고서는 태형에게 경의를 표했다. 옛날 같았으면 선배고 뭐고 선빵 후 말이었을 텐데, 내가 친구 하나는 잘 키웠어. 헛소리를 하는 지민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태형은 젓가락으로 파전을 분해해놓기 시작했다. 그런 태형을 바라보던 지민이 잠시 딴 곳을 보며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듣던 것과는 다르네. 스윗젠틀남으로 유명한 김석진 아니었어? 그정도의 인격파탄자인줄은 몰랐네. 고단수이기도 하고."

"고단수지. 차라리 대놓고 더러운 짓을 했으면 같이 치사하고 더럽게 맞받아쳤을 텐데."

"너도 그럼 그렇게 말로 면박 줘. 아 맞다 너는 그런거 못하는구나."

"지민아 이 그릇이 튼튼한지 네 머리가 튼튼한지 시험해보고 싶은데 해봐도 돼?"



진지한 표정으로 그릇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태형이 흠,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김석진이 왜 날 싫어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뭐 실수를 했거나 한다면 이해하겠는데, 만난 적도 없었다니까? 어디 인터뷰에서도 잘못 말한 적도 없고. 심지어 김석진이라는 이름 언급조차 안 했어. 그런데 미팅장에서 만나자마자 나보고 오메가 같이 생겼다고 했다니까, 깔보는 눈빛으로. 태형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쏟아냈다.



"대체 왜 날 싫어하는 거지?"

"너가 너무 잘생겨서 지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구나."



태형이 손을 들어 지민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하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손을 뒤로 도로 탁자에 안착시키고 처음으로 석진이 절 싫어하는 이유를 찾아보려 골똘히 생각하던 태형은 지민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아, 혹시 그거 아니야? 알파 부심.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지민이 말을 덧붙였다. 김석진 집안이 대대로 알파 집안이라며. 그랬어? 넌 그것도 모르냐...? 암튼, 그 사람 집안이 알파 집안이라서 그러는 거 아닐까. 왜, 알파들은 그런거 있대매. 족보 없는 알파들과 족보 있는 알파들은 다르다고 취급하는 거.



"너는 알파 집안이 아니었잖아. 너만 유일하게 알파로 발현된 거고."

"흠."

"그런데 저번에 니가 알파인거 밝혀서 연예계서 존재하는 알파 단 둘로 김석진이랑 언급되잖아."

"아."

"김석진은 그게 빡쳐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서. 막말로 족보 없는 놈이랑 동급으로 취급된 거니깐."



태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럴듯 했다. 알파는 특정상 자존심이 강하고, 베타나 오메가들과는 자신들이 뛰어나다고 자만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건 순수한 알파일수록 더 했다. 알파도 계급이 있다고, 베타 사이에서 알파로 발현한 자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어쩐지 허무함이 몰려온 태형은 석진이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애도 아니고, 난 너를 알파로 인정할 수 없어 빼애애액! 하는 것과 다를게 뭔가. 괜히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게 쓸모없던 시간낭비 같아,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나가려는 태형을 보고 지민이 허겁지겁 붙잡았다. 야! 잠깐만!!



"가기 전에 싸인좀."



연예인 김태형이 자주 들리는 집으로 홍보해야지. 태형은 지민이 내민 에이포 용지를 보며 어이없어 했다.





저번에 지민과 나눈 대화를 통해 심신의 평안을 되찾은 태형은 이제 제법 석진의 비꼼에도 여유로운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여유로워졌다일 뿐일까. 석진이 전처럼 신경을 살살 건드려도 화나기보다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왜 유딩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고. 어째 전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태형을 보고 석진의 얼굴이 더 구려졌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작중 재현이 아닌 태형을 노린 애드립을 몇번 더 쳐서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정작 반응을 기대한 태형에게서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자 석진은 점점 지랄같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친한 친구에서 거의 적으로 돌아선 둘을 보고 한쪽에서는 연성각이라며 커플로 엮으니 환장할 만했다. 결국 일이 터졌다. 태형이 아침 대신으로 먹는 음료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음식이 들어간 거였다.


처음에는 조금 속이 안좋길래 촬영을 잠깐 쉬기로 했다. 그늘에 앉아 있는 태형을 보고 석진은 아직 프로가 아니라며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진이 또 트집을 잡는구나 해서 넘긴 태형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컥컥이며 몸을 심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남들 다 힘든데 자기만 힘든 척 한다고 뭐라뭐라 하는 석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숨이 안 쉬어져. 이거 예전에 그거 먹다가 겪었던 건데, 설마... 스쳐가는 생각에 석진을 향해 고개를 돌린 태형은 그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촬영이 중단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태형이 눈을 떴을 때는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오후였다. 생각했던 대로 아몬드로 인한 알러지 반응이었다. 기도가 부어올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것. 재빠른 처방으로 거의 괜찮아졌지만 머리끝까지 싸하게 식어 있는 상태였다. 태형은 빈 통을 들고 가 석진의 앞에 내팽겨쳤다. 땡그르르. 거친 행동에도 석진은 눈만 찡그렸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선배님이 넣으셨죠?"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태형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여 석진을 바라봤다. 선배님이, 아몬드, 넣으셨잖아요. 태형은 한 절 한 절 또박또박 끊어서 말했다. 그러자 빈 통을 보던 석진이 눈을 들어 태형을 마주했다. 입을 열어 나온 말은 이거였다. ...증거 없잖아. 증거? 태형이 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금 뭐라고 들은 거지? 태형의 눈이 무섭게 치켜올려졌다. 지금 제가 그 말 들으려 선배님 방에, 혼자서, 온 것 같아요?



"저 죽을 뻔 했어요, 선배님. 죽을 뻔 했다고요."

"..........."

"미안하다고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 해?"



태형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확 뿜어졌다. 살기가 느껴지는 기운에 석진이 버티기 위해 반사적으로 페로몬을 풀었으나 분노한 태형의 페로몬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태형이 가진 힘은 그랬다, 순수한 알파 가문들의 자제보다도 월등히 뛰어난 페로몬이었다. 태형이 순수한 알파 가문들에게 무시를 당하더라도 유치하다며 웃고 넘길 수 있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었다. 태형이 페로몬을 더 풀자 석진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놈의 알파 부심이 뭐라고, 씨발..."

"너,....."

"자존심 때문에 사과도 못 해, 인정도 안 해, 병신같이."



새파래지기 시작하는 석진의 얼굴을 보던 태형이 차갑게 내뱉고서는 페로몬을 단번에 거뒀다. 바닥으로 스르르 주저앉은 석진을 보던 태형은 고개를 살살 흔들며 방을 나갔다. 유치하다는 생각에서 또다시 평이 바뀌었다. 치졸한 인간으로.



* *



그 일이 있은 후로 석진은 더 이상 태형을 괴롭히거나 눈치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태형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태형은 그게 좀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계속 뻔뻔하게 지냈으면 더 좋았을지 몰랐다. 페로몬 싸움에서 지니까 이제와서 눈치 보고...



"짜증나."

"뭐가 짜증나 편하다고 쌍수들지는 못할망정."

"싫어할 때는 언제고 설설 기는 게 짜증난다는 거야. 내가 피해잔데 나쁜 놈 된 것 같잖아."



촬영이 무사히 끝나 뒷풀이로 온 지민의 가게에서 회식 도중에 나온 태형은 담배를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시간은 이제 새벽 2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2차를 지나 3차까지 와 몹시 피곤했지만 아직 연차가 덜 된 태형은 차마 먼저 집으로 가보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찌나 술을 많이 마셨던지 혈관속에 흐르는 게 피가 아니라 알코올이 된 느낌이었다. 부시시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태형은 카운터에 몸을 반쯤 기댔다. 오늘 집에 무사히 가기는 글렀다. 해가 뜰때까지 빈사상태로 달리거나 아니면 지민의 가게에서 하룻밤 얻어자야 할 판이었다. 그런 태형의 생각을 귀신같이 읽은 지민이 선수를 쳤다.



"노."

"아 왜."

"여기가 여관인줄 아냐? 옆에 모텔촌 많으니까 거기나 가."

"나 연예인이야. 모텔 갔다가 스캔들 나면 어쩌려고?"

"뭔 소리야 너 여자 없잖아? 있지도 않은 걱정하지 마."



맞는 말에 태형이 입술을 부루퉁 내밀고는 반쯤 남은 담배를 지져 껐다. 윗층에서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슬슬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니 저를 쳐다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와 떨떠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석진이 보였다. 그의 앞 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감독이 태형을 그 자리에 앉혔다. 왜, 왜요? 태형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자 눈치없는 감독은 이번 드라마에 지대한 공신을 한 두 명을 위해 건배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그렇게 얼결에 술잔을 받은 태형은 석진과 마주보는 자세로 건배사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이에서 끝이 아니었다.



"자자, 러브샷 해야지! 승한이랑 재현이랑!"

"예?"

"팔 크로스 해가지고! 어허! 김배우 팔 빼기 없고, 자! 됐다!"



석진과 팔을 엮은 자세가 되어버린 태형은 순간적으로 표정관리를 못할 뻔 했으나 간신히 참아내고 어색하게 웃었다. 감독의 지휘 하에 둘이 서로 팔을 꺾어 술을 먹는 기분이란... 좆같았다. 게다가 술을 어떻게 섞었는지 맛이 아주 지랄같았다. 속이 뒤집어지는 걸 느끼며 태형은 입술 끝을 올려 가까스로 웃어보였다. 어쩐지 석진의 얼굴이 매우 불편해 보였다. 태형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자신과 러브샷을 해서인줄로만 알았다.




시버럴. 세면대 앞에서 양 팔로 버티고 있는 태형의 얼굴에서 물이 떨어져 내렸다. 찬물로 세수를 두 번을 하고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벌써 새벽 4시가 다 되어가는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쯤되면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이미 술 1ml도 더 안들어가는 상태였다. 당분간은 술의 ㅅ자도 안 보고 살고 싶다. 태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진심으로 감독이 저를 놔주기를 바라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그때도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코끝을 스치는 향에 눈을 떴다. 러트 사이클의 페로몬.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석진이 시뻘개진 눈으로 숨을 참고 있었다. 러트 사이클때의 알파는 몹시 위험했다. 오로지 본능만이 잠식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리게 되고 본능만이 깨어있는데 태형은 그 때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페로몬이 끊겼다 풀어졌다 하는 것으로 보아 시작되지 않도록 간신히 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른다. 석진의 손이 화장실 문고리를 잠그려고 했지만 계속 빗나가고 있었다. 잘칵, 잘칵, 탁. 러트때의 알파가 위험한 이유는 공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까. 태형은 가만히 석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억제제는요?"



안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석진의 눈이 잠시 커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다 태형인걸 확인하고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석진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제 이성이 차차 날아가기 시작한 건지 페로몬이 끊겼다 흘러나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에 반응해서 태형의 페로몬도 미약하게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석진의 동공이 작아졌다. 그러다 벽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다. 도드라진 목선과 흰 피부를 태형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화장실 전체가 석진의 페로몬으로 가득 찼다. 러트 사이클의 시작이었다.

 

방금 전까지 몸을 못 가누던 건 거짓말이라는 듯 똑바로 선 석진의 시선이 태형을 향했다. 상대를 찾았다는 눈빛이었다. 어딜. 피식 웃은 태형은 억누르고 있던 자신의 페로몬을 모두 풀었다. 그러자 바로 석진의 입이 벌어지고 몸이 굽혀졌다. 강력한 알파 페로몬으로 러트를 누르며 태형은 석진에게 다가갔다. 



"착하지."



앞에까지 도달한 태형이 석진의 팔을 콱 움켜쥐며 속삭였다. 말투와 달리 눈빛은 상당히 위협적이고 무서웠다. 같은 알파더라도 태형의 페로몬은 석진이 감당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여린 동물이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석진은 태형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포와 경외. 태형은 다른 손으로 석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정신 차리고, 복종해."



태형의 목소리는 달콤한 동시에 강압적이었다. 태형의 의지에 따라 흘러나온 페로몬이 석진의 페로몬을 더 흘러나가지 못하게 붙들어놓았다. 등을 두어 번 토닥여준 태형은 제 페로몬에 홀려 눈이 풀어져 있는 석진을 바라보다가 목덜미를 아프게 깨물었다. 그러자 석진의 눈이 질끈 감겨지며 대충 붙잡아놓았던 러트 페로몬이 몸 안으로 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옅은 기척을 제외하고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 걸 확인한 태형이 석진을 흔들었다. 선배. 눈 떠봐요.



"으......"

"선배. 임시로 붙들어 놓은거라 얼마 못 가요."

"흐으....."

"집 어디에요?"



석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멀어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다. 억제제는? 집에 있죠? 그러자 또 고개를 흔든다. 후. 어쩐지 골치 아픈 일에 단단히 말려든 것 같았다. 순간 아까 지민이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 옆에 모텔촌 많으니까 거기나 가. 태형은 여전히 몸을 못 가누고 숨을 미약하게 내쉬는 석진을 바라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 *


 

감독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감독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갔다 왔어?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감독이 손을 뻗어 태형을 끌어당기려고 하자 태형은 가볍게 저지하고서는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선배님이 몸을 제대로 못 가누실 정도로 취해서, 데려다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태형은 몸을 살짝 틀어 저쪽에 주저앉아있는 석진을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딱 봐도 인사불성 상태였다. 감독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데려다 준다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태형이 말을 꺼냈다. 제가 데려다 드리려고요. 반가운 말에 감독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럼 고맙지. 김배우 잘 부탁해, 김배우. 고생 많았고, 조금만 더 부탁할게.



"네."



사람좋게 웃어보인 태형은 제 자리에 놓여있던 외투와 석진의 가방을 챙기고서는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페로몬으로 간당간당하게 버티고 있는 석진의 옆구리를 붙잡아 세워 기대게 만든 태형은 천천히 가게를 나왔다. 시끄러운 회식 자리를 뒤로 하고 새벽길을 걷는 다리 끝에는 모텔촌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와줄 겸, 누가 우위인지 알려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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