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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Wings 上

그 애는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 전학을 왔다.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그때의 박지민의 모습은 뇌리에 박혀있다. 단정한 검은색 머리,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지어보이던 선한 웃음. 대개 이런 시기에 전학을 오는 애들은 소문이 무성하기 일쑤였다. 누구를 패서 강제전학을 왔다, 따돌림을 당했다더라 등등. 그러나 박지민에게서는 그런 소문들의 끄트머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 아이들을 모두 천천히 둘러보는 듯한 시선. 나와도 잠시동안 시선을 마주했었다.


"잘 부탁해."


남고는 보통 동물의 왕국이라고 한다. 그 말은 머리가 아닌 주먹으로 서열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난데없이 전학생이 뚝 떨어지면 해당 학교를 지배하던 짐승이 새로운 짐승이 제 자리를 위협할지 아닐지 보러 오곤 했다. 나는 쉬는시간에 우리 반으로 들이닥친 일진이 박지민을 향해 손을 까닥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순순히 일어나 따라나가는 박지민을 보며 나는 걔가 한입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데 괜찮을까 하고 걱정을 했었더랬다. 그러나 잠시 후 나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아니 일진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박지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박영호는 설득따위는 안 되는 꼴통 중의 꼴통이었으며, 주먹으로만 대화 가능한 새끼였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저렇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걸까. 그걸 본 나는 한동안 박지민이 생긴 것만 저렇고 속은 음침하고 더럽기 그지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박지민이 전학을 오고 한 달이 넘어가기 전에 우리 학교는, 최소한 우리 학년에서는 더 이상 주먹다짐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나잇대의 남자애들은 패기넘치는 머리 텅텅 빈 놈들인데. 개싸움 하던 시기는 언제였냐는 듯 서로 하하거리며 잘 다녔다. 박지민은 전염병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다른 아이들을 저처럼 만들어버리는 거. 나는...잘 모르겠다. 다른 애들이 다 박지민이랑 잘 놀고 있을 때도, 나만은 박지민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솔직히 지민이는 천사."
"인정."


'지민이'랜다. 낯간지럽다고 이름만 부르는 일을 소름끼쳐하는 놈들인데. 하긴 박지민은 예외가 많았다. 친구들을 꼴통이니 병신이니 부르던 놈들도 다 박지민한테는 살갑게 지민아, 하고 불러댔으니까. 그러면 박지민은 고개를 돌려 부른 이에게 눈을 사르르 접어준다. 솜사탕이 물에 풀어지듯 그렇게, 사르르.


"정국아, 이거..."


날 부르는 박지민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뒤로 하고 교실을 나갔다.




 

Wings

 





땡볕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나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고서는 타겟을 노렸다. 체육은 왜 피구를 시킨 건지 잘 모르겠다. 맨 처음에는 다른 애들도 다들 나처럼 항의했다. 쌤! 축구 할래요! 하고 열렬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했지만 출석부로 정수리를 한번씩 맞고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새끼들이라 막상 시작하니 하기 싫다고 말했던 건 언제냐는 듯 지금은 다들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다.

남녀공학에서의 피구라면 여자애들을 맞출 때 부러 힘을 빼서 맞추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는 남고이고 따라서 힘을 조절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사실 하나 있긴 했다. 모두의 천사 박지민 말이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잘 피하고, 잘 잡으며, 잘 던지는 박지민에 그는 고려할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광속으로 날아간 공을 또 가볍게 잡아챈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독보적으로 잘 했던 터라 우리 팀의 반은 그의 손에 아웃된 터였다. 물론, 내가 그만큼 박지민의 팀을 보내버렸긴 했다. 날씨가 더운 탓에 흘린 땀으로 앞머리가 다 젖어 있었다. 박지민은 잠시 타겟을 고르는 듯 하더니 바로 공을 던져 내 옆의 애를 맞춰버렸다. 공이 상대팀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가로챈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공을 던졌다. 향하는 끝은 당연히 잘 해서 빨리 죽여야 우리 팀이 승산이 있는, 박지민이었다.

당연히 한 번에 맞출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다른 조무래기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보지도 않고 걔만 주구장창 노렸다. 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저만을 노리는 공격을 계속해서 피하는 것은 어려웠을 터이다. 결국, 수비에게서 공을 이어받아 피하려는 등을 노린 내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예상보다 잘 맞지 않아서 조금 짜증이 나 있던 나였지만 뻑, 소리가 날 정도로 큰 소리와 동시에 일그러지는 박지민의 얼굴을 보고 실수했다는 생각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정말로 어디 뼈가 나간 듯한 큰 소리에 게임을 하고 있던 애들도 놀라며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헐, 괜찮아? 완전 뻑 소리 났는데?"
"괜찮아. 조금 얼얼하긴 하지만, 머리도 아니고."


박지민은 구름같이 빠르게 몰려든 애들 사이에 둘러싸여버려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우물쭈물한 자세로 애들 사이로 보이는 얼굴을 보며 갈등했다. 박지민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껄끄러웠던 것 뿐이었다. 모두가 좋아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박지민이 나에게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이물질이 섞여든 느낌이라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 놀랐어? 나 정말 괜찮아."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날 바라보며 먼저 괜찮다고, 놀란 나를 안심시키는 말에 나도 겨우


"...미안."


이라고 입을 뗄 수 있었다. 그러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박지민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어보였다.

중단되었던 게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박지민이 아웃된 상대팀은 이빨 빠진 호랑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에는 내가 속한 팀이 이겼다.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게임이었지만 승리라는 이름에 기뻐하는 단순한 애들. 기쁨의 환호성은 체육의 지갑 대개봉으로 한층 더 짙어지게 되었다. 아이스크림 쏜다! 체육의 우렁찬 외침. 뭐를 고를까 생각하며 매점으로 향하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홀로 본관으로 들어가는 박지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등을 매만지는 손. 아파하는, 얼굴.


"나 잠깐 화장실."


대답도 듣지 않고 통보한 후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박지민의 뒤를 따라갔다.


본관 1층에는 보건실이 있다. 예전에 계시던 예쁜 여선생님은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그만두고, 새로 부임해 온 보건쌤이 빈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름은 김석진. 그 시기는 얼추 박지민이 전학 온 시기랑 비슷했던 걸로 기억한다. 남고라면 당연지사로 새로운 선생의 성별에 지대한 관심이 쏠린다. 안타깝게도 새로 온 보건은 남자였다. 그래도 예상외로 환대받았는데, 그건 남자가 봐도 부러운 잘생긴 외모와 꾀병도 쿨하게 허락해주는, 그러한 불량한 선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들어간 곳은 보건실이 맞을 것이다. 나는 아까 공에 맞고 진심으로 아파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해자로서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집을 털러 가는 도둑처럼 조용히 다리를 옮겨 보건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열까, 말까. 안에는 달그락거리는 약통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앞에 있는 것도 이상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도 이상하다. 심각하게 갈등하던 나는 양심이 찔렸지만 그냥 돌아서려고 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내 귀를 잡아끌지만 않았으면.


- 아, 쫌만 살살...
- 어휴, 어쩌다 이랬어? 완전 꺾였는데.
- 피구하다가 공에 맞아서...
- 얼마게 세게 던졌으면 이게 꺾여? 으, 엄청 아프겠는데.
- 진짜 아파...


미약하게 앓는 신음소리가 채 닫히지 않은 문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나는 미간을 슬풋 좁혔다. 이상했다. 보통 등에 공 좀 세게 맞았다고 양호실까지 올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발 물러나서 세게 맞아서 멍이 들었다고 치자. 그런데 대화 속에 있던 '꺾이다'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 곧 그 시기 아니야?
- 아! 살살 하라니까.
- 꺾인 거 자리잡느라 이번에는 더 아플 수도 있겠다.
- ...차라리 죽을래..


한없이 우울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런 목소리를 듣고서 깜짝 놀랐다. 항상 밝은 목소리를 내던 박지민이었다. 안에서는 약을 바르는 듯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멈췄다. 나오려는 소리에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복도를 후닥닥 달려가는 소리를 그는 들었을까. 그게 나라는 것도 알아챘을까. 계단을 뛰어올라 교실문을 열고 들어온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아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심장이 무진장 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박지민이 반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친구랑 이야기를 하면서 곁눈질로 박지민을 살폈다. 그는 교실을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한 낌새. 다행스럽게도 시선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꺾였다', '그 시기'. 대체 뭘까. 의문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아."


화들짝 놀라며 커터칼을 떨어뜨렸다. 두꺼운 종이를 자르다가 힘 조절을 잘못해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베였는데, 잠시 따끔거리나 싶더니 곧 손가락을 타고 피가 주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처부위는 그리 길게 베인게 아니었으나 엄지손가락 절반을 물들일 정도로 배어나오는 피에 옆에 있던 애들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와 미친, 야 괜찮아? 피 봐! 응급처치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았다 뺐으나 실망스럽게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밴드 붙이고 와야겠다."
"같이 가 줘?"
"뭘 같이 가. 혼자 갔다올게."


피식 웃으며 교실을 나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보다 손이 얼얼해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멍청한 전정국. 칠칠맞아. 자책하면서 계단을 내려가 보건실 문을 열려던 나는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문을 열려던 상태 그대로 굳었다. 흐윽, 아... 윽. 그걸 들은 순간 머리에 스쳐지나간 것은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였다. 남고 특정상 쉬는 시간에 야동을 돌려보는 것은 아주 평범한 일이었으며, 그중 또라이 새끼들은 가끔 자위를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보건실 안에는 뇌가 없는 미친 새끼 하나가 보건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아무의 눈도 타지 않고 -지금은 수업중이었으니까- 그 짓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씨발... 어쩌지.

남의 껄끄러운 시간을 훔쳐보고 싶은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그러나 손가락에서 배어나오는 피가 갈등하게 했다. 어떡하지. 소독하고 밴드는 붙여야 할 것 같은데. 한참을 갈등하던 나는 결국 될 대로 대라 하며 문을 벌컥 열었다. 나한테 들킨 놈이 아랫도리를 보여 민망해지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약만 바르고 나갈 거니까. 그러나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박지민이 몸을 잔뜩 꺾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발버둥을 쳤는지 박지민이 있는 침대는 엉망이 된 터였다. 침대 시트를 긁어내리는 팔에는 불거진 힘줄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까드득, 섬뜩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공중을 뚫고 생생하게 들려왔다.


"아으으윽...."


식은땀이 옆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딱 봐도 그는 고통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하루종일 박지민이 안 보이긴 했었다. 아팠던 거야? 나는 너무 놀라서 내가 여기에 온 이유조차 잊고 그한테 달려갔다. 야, 박지민! 어깨를 흔들어봐도 답이 없었다. 박지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누가 제 앞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아파...."
"야, 정신차려봐. 죽는 거 아니지?"
"차라리 죽여줘...너무 아파..."


박지민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정말로 생명이 다 꺼져가는 목소리라 너무 무서웠다. 박지민은 힘없이 머리를 내 어깨 위로 처박았다. 땀에 다 젖은 축축한 머리카락. 죽여... 그냥 죽여줘... 괜찮으니까... 횡설수설한 목소리. 눈 앞의 사람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죽어가고 있는데 119를 불렀어야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패닉 상태로 떨리는 손으로 박지민의 등을 토닥여줬을 뿐이었다. ....뭐야, 뭔가 이상한데...? 만져지는 등이 판판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잠시동안 얌전하던 박지민이 좀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진정시키려고 손을 뻗었지만 오히려 내 손목이 단번에 잡혔다. 으스러뜨릴 듯 강한 힘. 작은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면서 고통을 참아냈다. 아수라장이었다. 미친사람처럼 눈이 뒤집혀서 날뛰는 박지민, 그에게 손목이 아프게 잡혀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을 참아내는 나.

뚜둑.

분명, 그렇게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손목을 붙잡고 있던 박지민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정신이 나가있던 눈동자도 제대로 돌아오며 나를 마주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는 나를 보며 '아'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것은 지극히 잠시뿐이었다. 박지민은 전기가 끊어진 로봇처럼 바닥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


붙잡으려던 손은 공중에 멈췄다. 빠르게 붉게 물들어가는 박지민의 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교복을 벗겨냈다. 그리고 확인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붉은 피 사이를 뚫고 나온 손바닥 절반만 한 날개 한 쌍.

눈보다 새하얀 날개였다.


 

* *


- 선생님 저 천사 본 적 있어요!
- 어머, 정말이니 정국아?
- 네! 이따시만하게 크구, 새하얀 날개가 달려있었어요!
절 보고 웃어줬어요 정말 이뻤어요!


- 걘 참 순수한 거 같애 천사도 믿고. 안 그러냐 전정국?
- 순수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세상에 천사가 어디 있냐?


* *




정신을 잃은 박지민의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까 발견했던 처음 모습과는 달리 얼굴은 평온해졌고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지만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박지민은 눈을 떴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날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못 볼 꼴을 보여서 미안."


일어나자마자 말한 게 그거였다. 많이 놀랐지. 박지민의 손이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고 난 후에야 나는 내가 겁먹었다는 걸 알아챘다. 혹여나 영영 눈을 뜨지 않을까 무서웠던 거다. 눈을 꼭 감았다 뜨니, 박지민은 손을 뒤로 돌려 제 등 부근을 짚어보고 있었다. 미간이 슬풋 좁혀지는 걸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등에 그거, 뭐야?"


박지민은 행동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나는 숨을 고르고선 말을 내뱉었다. 봤어. 등에 달려있던... 작은 날개. 내 말에도 박지민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더 말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박지민이 원하던 말 대신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너, 괴물이야?"


말을 하고 아차, 했다. 하지만 박지민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 하는 소리를 냈다. 다쳤어? 묻는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리자 베인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이리로 내려온 본 목적을 상기해냈다. 떠올리자 손가락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멍하게 상처를 바라보고 있자 박지민이 그랬다.


"다친 손 줘 볼래?"


눈을 깜박이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박지민은 내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가더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쩌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간 손가락을 혀로 굴리는 박지민. 말캉한 혀가 상처를 닦아내자 따끔거리는가 싶더니 아픈 감각이 사라진다. 잠시동안 굴리던 박지민이 입을 떼었을 땐, 길게 베인 상처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내 두 눈은 더 이상 크게 뜰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떠져 있었을 것이다. 박지민은 또, 웃으며 그랬다.


"뇌물."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천사는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살 줄 알았다. 하다못해 교회를 다니던가. 머리 위에는 동그란 도넛 같은 걸 둥둥 띄우고 다니고, 옷은 무릎 밑까지 오는 순백의 치렁치렁한 옷이든지, 뭐 그런. 나는 책장을 넘기며 박지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리에 동그란 도넛을 달고 다니지도 않고, 옷도 평범한 교복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조용함과는 거리가 먼 시끄럽디 시끄러운 남고에 다니고. 그날 보건실에서 박지민의 비밀을 엿본 이후에도 우리 사이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그저 같은 반 학우일 뿐. 책장을 한 장 넘겼을 때였다. 갑자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박지민이 교실 안으로 훌쩍 들어왔다. 점심시간이라 텅 비어있어야 할 교실에서 날 발견한 박지민은 잠시 주춤하더니 한 번 웃고서는 티비 뒤로 숨어들었다. 팔을 뻗어 커튼을 끌어 완벽하게 가리더니, 고개를 빼꼼 내밀어 두리번거리다가 검지를 입술 위에 대고 나한테 '쉿'이라고 했다. 쉿 이라니.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김형우였다. 조금 전의 박지민처럼 김형우도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한 교실에서 나를 발견하자 '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혹시 지민이 못 봤어?"



나는 살짝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니, 못 봤는데. 그러자 김형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체 어딜 간거지 하고 중얼거리다 교실을 떠났다. 발걸음이 멀어지고 찾는 목소리도 멀어지자 커튼이 걷히고 숨어있던 박지민이 밖으로 나와 내게 말했다.



"고마워."

"왜 숨었어? 싸우지도 않아 보였는데."

"끝나고 피씨방에 가자고 해서."

 


그게 숨은 이유랑 무슨 상관인지 이해가 안 돼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커튼을 정리하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린 박지민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덧붙였다. 형우가 가자는 피씨방에는 담배 냄새가 좀 심해서. 오래 맡으면 좀 아파. 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역시 천사가 맞는 걸까, 저런 거면. 나는 내게 가까워지는 박지민에게 물었다. 그거 혹시 네 등에 있는 그거랑 관련된 부분이야? 박지민은 웃었다. 그냥 웃었지만 나는 답을 또 읽어냈다. 아, 그렇구나.



"오늘 끝나고 바빠?"

"아니."

"그럼 나랑 놀러 갈래?"



맥락없이 훅 들어오는 제안에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 앞의 의자를 빼 앉은 박지민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덧붙였다. 비밀, 아무에게도 안 말해준거 고맙기도 해서 그래. 청량한 목소리에 나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박지민과 나란히 하교를 하고 있다. 아까 김형우는 정말 들었던 대로 박지민에게 피씨방에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박지민은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말했다. 선약으로 나를 짚어보인 후 김형우를 포함한 반 애들의 모든 시선이 쏠렸을 때의 기분은 좀 당황스러웠다. 김형우는 얼빠진 표정이었는데,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전혀 친분이 없던 두 사람이 갑자기 둘만 어디 간다고 하면. 딸랑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어딘지를 확인하니 강아지 카페였다.



"강아지 좋아해?"

"어? 어....응."

"다행이다. 혹시 알러지는?"

"없어."



그럼 들어가자, 하며 먼저 들어갔는데 나는 여기서 그가 좀 엉뚱하다는 걸 느꼈다. 남고생 둘이서 갈 데로 강아지 카페라니. 그러나 그 생각은 들어가자마자 내게 달라붙는 강아지들 때문에 싹 씻겨내려가고 말았다. 복실복실한 털들을 달고 헥헥거리는 모습은 사실 많이 귀여웠다. 작은 애들을 번갈아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어디선가 큰 골든 리트리버 한 마리가 내게 돌진해오는 바람에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긴 꼬리를 붕붕 흔들며 막 혀로 여기저기 핥는데 뭐랄까, 덩치가 덩치인지라 버겁긴 했다. 야야, 잠깐만, 진정해봐,! 따위의 말들을 내밀어도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달려들었다. 진땀을 흘리며 애를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국이 네가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 해피야, 오빠 놀란다. 조금 진정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강아지였기에 저런 타이르는 말 따위는 안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말이 내뱉어진 직후 강아지는 내게서 떨어졌다. 박지민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 애교를 부리고, 그는 개를 두어 번 쓰다듬고. 뒤로 주저앉은 내게 뻗어진 작은 손을 보던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은 나보다 훨씬 작았는데, 의외로 단단해서 조금 놀랐다.



"가끔 여기에 와. 순수하고, 착해, 애들이. 장난이 조금 심하지만."

"...그래 보여."

"맨날 나 혼자 왔는데."



나는 테이블에 볼을 대고 강아지를 쓰다듬는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네 친구들이랑은 왜 안 왔어?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지켜본 바 박지민은 항상 그랬다. 모든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듯 싶다가도 모든 아이들을 어떤 선 이상으로는 들여보내지 않았다. 모두와 친한 동시에 안 친하다, 라는 모순적인 문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생각만 했으면 좋은데 입은 제멋대로 말을 던져버렸다.



"그럼 나는 왜 데리고 왔어? 다른 애들이랑은 거리 두면서, 네 친구들도 안 데려왔다며."



한번 봇물이 터지자 말은 겉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겉으로는 애들이랑 잘 어울려 다니는데, 내가 볼 땐 약간 붕 떠 있어. 분명히 친절한데 어쩔 땐 위화감도 들어. 넌 말야 마치... 언제든지 떠나야 할 사람처럼 행동해. 거기까지 말하고서는 입을 닫았다. 박지민의 눈동자가 날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 살며시 지어지는 웃음.



"그냥 변덕이라고 쳐 주면 안 돼?"

".........."

"응?"



박지민의 미소에는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이라도 있나 보다. 그걸 본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으니까.


변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아지 카페를 다녀온 다음 날, 박지민은 학교에서 나를 아는 척 한걸로도 모자라 제 무리 사이로 나를 끼워넣었다. 거의 한 학기동안 같은 무리가 아니었기에 데면데면한 애들을 한순간에 친하게 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나는 박지민이 내 손을 잡고 애들 사이로 같이 들어왔을 때 약간 체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갑자기 얘는 왜? 라고 묻는 듯한 얼굴들. 그러나 껄끄러운 기분은 나만 가지고 있었나 보다.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나를 제외한 다른 애들은 모두 그런 데면데면함은 없고 처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듯이 행동했다. 장난을 거는 우락부락한 팔 하나에 목이 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나는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깃털마냥 하얗고 부드럽게 웃는데 속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단 건 확실했다.



 


 

"가끔 지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를 때 있지 않냐."

"어, 맞아."



열심히 축구를 뛴 후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툭 하고 말이 공중으로 던져졌다. 날아오는 말을 붙잡은 다른 애들도 공감했다. 뭐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아무리 뚫어지게 봐도 안 읽혀. 오히려 내 생각이 읽히는 느낌이면 몰라도. 그리고 그것도 궁금해. 지민이 가끔 학교 안 나오잖아. 그게 땡땡이를 치는 건 아닌듯 싶고. 야 지민이가 너랑 같냐? 핀잔도 들렸다. 아파서 못 나오는 거라고 하는데 지병이라고 있는 건가? 예를 들면 천식같은 거.



"넌 뭐 들은 거 없어 전정국?"



내게 어떤 답을 기대하는 눈동자들. 나는 물을 마신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라면 뭐라도 들은 게 있나 싶었는데. 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되물었다. 들려온 건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너랑 지민이랑 꽤 친하잖아.



"어?"

"아니야? 지민이가 갑자기 너 데려와서, 많이 친한가 싶었지. 그동안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지민이랑 말도 잘 안 했잖아."

"........."

"너도 모른다면 정말 수수께끼네."



내가 박지민이랑 친한가? 순식간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당황해서 말을 못하고 있던 사이에 정작 질문을 한 애들은 호기심을 거두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질문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언제까지 계속 쉬고 있을거냐며 빨리 재개하자는 목소리에 간신히 생각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구를 하는 내내 아까 그늘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 머리에 자리잡고 있어서 결국은 엉뚱한 곳으로 공을 날려버리는 실수를 해 버렸다. 미안하다고 외치고 스탠드쪽으로 넘어 계단 위에까지 가버린 공을 주우러 올라가는데 거기에서 만난 사람은 의외였다. 보건이 축구공을 들고 서 있었다. 여기까지 굴러왔던데 요즘 애들은 힘도 좋다니깐. 보건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래쪽을 향해 공을 찼다. 쌤 고마워요! 빨리 와 전정국! 그 소리에 몸을 돌려 다시 내려가려고 했는데 보건의 목소리가 날 붙들었다.



"아, 아가는 가지 말고."

"네?"

"정국이 잠깐 빌려가니까 너희들끼리 놀고 있어! 창문은 깨지 말고!"



어쩔 새도 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평상복 위에 걸친 하얀 가운을 팔랑팔랑 휘날리면서 걷는 보건의 뒤를 얌전히 따라가는 수밖에. 뜨거운 열기가 배어있던 바깥에서 시원한 학교 내부로 들어오니 서늘함마저 느껴졌다. 뭐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걸까. 보건은 덩치와는 달리 힘이 그다지 세지 않아서 옮길 게 있으면 애들을 부르곤 했다. 임무를 끝낸 후 보상으로 줬다며 편의점에서 맛있는 걸 사들고 오던 애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보건실로 들어온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뭘 옮겨야 돼요? 빨리 끝낼 심산으로 그렇게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건 앉으라는 말이었다. 앉으라고요? 저한테 시킬 일 있어서 부르신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그럼 대체 뭐지. 찜찜한 마음으로 나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커피잔을 들고 온 보건은 내게 얼음물을 내밀면서 입을 열었다.



"어때? 학교 생활은 할만 해?"

"이런 걸 왜 물어봐요? 보건쌤이 담임도 아니시면서."

"그치 너무 뜬금없지? 그냥 말하는 게 더 빠를까 봐."



제가 생각해도 뜬금없었는지 보건은 피식 웃고서는 입을 열었다. 지민이 말이야. 박지민의 이름이 나오자 순간적으로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박였다. 왜 가끔씩 학교에 안 나오는지 궁금하지? 확 튀어나오는 본론에 미간을 찡그렸다. 제가 그걸 왜 궁금해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들었어. 들었다고? 그 자리에 보건은 옆에 있지도 않았는데. 더더욱 얼굴을 찌푸리자 그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농담. 진짜 들었다는 건 아니고 직감. 어쨌든 궁금한 건 맞잖아, 왜 가끔씩 안 나오는 지.


 

"성장 주기가 있어. 날개가 자라는 시기. 보통 5주에 한번씩 찾아오는데,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동반해."

".........."

"그래서 그 날은 학교를 안 와."



순간적으로 저번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박지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식은땀을 흘리며 손등에는 핏줄이 툭 불거지고, 까드득 하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는 소리도 들렸고. 이걸 왜 알려주시는 거예요? 묻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조금 떨렸다.



"친하잖아."

"네?"

"지민이랑 친하잖아, 너."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작 다른 사람들이 자꾸 친하다고 하니까 정말 친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둥둥 떠다니는 얼음조각이 녹아 사라지는 걸 바라보며 보건의 말을 들었다. 어디서 떠벌릴 애는 아니어 보여서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뭐, 너라면 왠지 알아야 할 거 같아서. 자꾸자꾸 새롭고 혼란스러운 정보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아, 머리 아파. 나는 종이컵에서 시선을 떼고 보건을 향해 눈을 올렸다. - 선생님, 박지민 집 주소 알아요?


 

나는 초인종을 몇 분째 바라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1013호. 아까 알려준 집 주소를 들고 박지민의 집을 찾아왔지만 쉽사리 초인종을 향해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냥 자그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엄청 위험한 일마냥. 주저하고만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아? 고개를 돌리자 검은 비닐봉지를 든 박지민이 서 있었다. 나 찾아 온거야? 부드럽게 웃으며 묻기에 느릿하게 끄덕였다.



"공원 가자. 집... 오늘은 안 돼."



더운 날에 누가 날 잡는 건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조금 작은 박지민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살짝씩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던 시선은 내려가 등으로 향했다. 옷 속에는 저번에 보았던 작은 날개가 숨겨져 있겠지. 얼마만큼 더 자라 있을까. 저 날개가 다 자란다면... 훨훨 날아 여길 떠나게 될까.


8시 반이 지나서야 겨우 어둑어둑해진 계절이었다. 우리들은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린애들이 놀기에는 늦은 시각인지 놀이터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난간을 잡고 위로 올라가며 박지민은 그제야 내게 물었다. 어떻게 날 찾아왔어? 그는 아마 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보건 선생에게 들었다는 내 말에 그렇구나, 하며 내게 손을 뻗었으니까. 바닥에 앉은 나는 따라앉는 박지민 좇아 시선을 내리면서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근데 보건쌤은 정체가 뭐야?"
"혼혈."
"혼혈?"
"응. 나 같지도 않고, 너 같지도 않아. 혼혈은 잘 늙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을 선호하는데 나 때문에 일부러. 덕분에 편하지만."


단정한 보건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선량하게 생겼다 했다. 물론 농땡이 치기를 좋아하는 불량 선생이라는 건 변함없지만 말이다. 반이라도 해도 천사의 피가 섞였는데 그렇게 불량해도 되나? 를 생각하던 나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아이스크림에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하나만 사려다가 두 개 샀는데, 아무래도 이럴 줄 알고 골랐나 봐. 박지민이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싶은 걸로 골라. 스크류바와 탱크보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스크류바를 골라들었다. 바스락거리며 뜯은 봉지를 옆에 대충 던져두자 팔을 뻗어 쓰레기를 가져간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아먹는 박지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열기가 식어 조금 시원한 바람만이 우리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화가 없자 아까 보건 선생에게 들었던 말이 또다시 떠올랐다. 성장 주기가 있어. 날개가 자라는 시기. 보통 5주에 한번씩 찾아오는데,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동반해. 박지민은 오늘, 그 때 내가 목격한 것처럼 몸을 마구 비틀고 고통을 토해냈을까.



"...많이 아파?"

"뭐가?"

" '그거.' "


손가락으로 등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박지민은 알아들은 듯 아, 하고 말을 흘리더니 어설프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견딜만 해. 그렇게 심하게 아픈 건 아냐. 심하게 아픈게 아니라면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는 건지 설명이 안 된다. 박지민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추궁할 용기가 없었다. 대신 바보처럼 또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툭 던졌다. 얼마만큼 자랐어? 많이 자라진 않았어. 이 정도? 박지민은 엄지와 검지를 조금 뗀 상태를 보여주었다.



"나중에는 하늘을 날 만큼 엄청 커져? 그, TV에 나오는 것처럼."

"응."

"대단하다."

"대단해?"

"응, 그리고 신기해."


정말 예쁠 것 같아. 나는 진심으로 내뱉었다. 근데 정말 하늘을 날 수 있는 거야? 호기심이 차올라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었을까.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탄성을 내뱉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적절하게 어울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저기를 언젠가 자유롭게 날아다닐 그를 상상했다. 하늘이라는 바다를 헤엄치는 천사. 멋졌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지민이 또 내가 다 먹고 던져놓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줍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누워 쳐다보니 생각대로였다. 비닐봉지에 내가 버린 막대를 주워 넣고, 다 먹은 자기 몫의 쓰레기도 차곡차곡 모아 난간에 가볍게 매달아놓았다.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올바른 일에 속해 있었다. 나는 저렇지 않은데. 가끔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기도 하고, 화가 나면 욕도 쓰는 그런 애인데. 비슷한 부분이 없는데 왜 다들 날 박지민과 친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들 나더러 내가 너랑 친하대."

"정말?"

"나는 너랑 안 친한데도,"

".........."

"전정국은 박지민이랑 친하다고."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박지민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새 코 앞까지 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한 뼘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 날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우주가 그 안에 섞여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지며 입을 여는 박지민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별보다 빛나고 솜털보다 부드러운 목소리. 그럼,


"앞으로 더 가까워지면 되겠네..."



곱게 휘어지는, 눈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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