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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전전전생(前前前世)

 

 

그는 49번을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중 28번은 남자로 21번은 여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58번을 동물로 태어났으며, 그중 30번은 포유류, 11번은 조류, 17번은 해양 생물로 태어났다. 나무나 꽃으로 태어난 적도 있다.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렇다. 그를 따라서 나 또한 총 48번을 사람으로 태어나길 선택했고, 58번을 동물로 태어나길 선택했으며, 식물로 태어나기를 선택했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 내게 붙여졌지만, 현재 나의 이름은 전정국이다.


수십 번을 태어난 덕에 모든 생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기억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생물로 태어났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처음 그를 만났던 생에서 소년이었던 나는 그때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나에게 보여주던 미소와 짙은 갈색 눈동자,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로 만든 것만 같았던 금발. 그도 새로 태어날 때마다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수십 가지의 이름이 있지만 지금의 이름은,




"김태형!"



김태형이고.


방문을 열고 나온 지민이 형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냉장고 문을 열어 무언가를 찾고 있던 태형이 형이 뒤돌아본다. 성큼성큼 걸어가 태형이 형을 붙잡고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자 투덜거리면서 몇 마디를 받아치더니 이내 졌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지민이 형이 나온 방 안으로 들어간 태형이 형은 부산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십 번을 따라서 태어난 나의 이야기에 빠지면 안 될 존재가 하나. 그 존재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 곁에 존재했다. 몇십 번의 생을 반복했던 내가 문득 기억을 돌이켜보면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바로 나의 수호신이다. 수호신은 본래 이름이 없지만 나에게 불리기 위해 몇 번이고 이름을 만들었다.


혀를 가볍게 차며 태형의 형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지민이 형이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수호신은 지금,



박지민이라고 불린다.






전전전생

前前前世






사람은 미련하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아마 제일로 미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존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수십 번이나 그를 따라서 태어났으니까. 물론 태형이 형은 그가 겪었던 수십 번의 생애동안 나를 사랑해 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래도 나는 다음 생애에다 기회를 걸었다. 다음 생에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희망을 걸면서.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려나?


나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핸드폰을 하는 두 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태형이 형의 손이 분주했다. 누구랑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하트까지 날렸다. 슬쩍 엿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그걸 보자 절로 입이 열리고 말이 튀어나갔다.




"뭐예요 그 하트? 누구야?"



 

내 목소리에 태형이 형이 대답했다. 으응, 별 거 아냐. 저번에 뒷풀이에서 만났던 애.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는데 꺼지기 전에 나는 메신저 창에 떠 있는 이름을 봤다. 여자 이름이었다. 순간 혹시 연애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우리끼리 정한 약속을 떠올리고 접었다. 소속사에서 연애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팀이 더 잘 되기 위해 우리가 자체적으로 정해놓은 연애 금지 기간이 있었다. 태형이 형은 멋대로 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정해진 선 안에서 이리저리 튀어다니기 때문에 수습이 쉬웠다. 어깨가 약간 무거워진다 싶더니 지민이 형이 내게 고개를 기대고는 태형이 형에게 말을 툭 던졌다.


"하트?"

"별 거 아니라니까."

"별 거 아니라면서 너 지금 완전 웃고 있어."




지민이형은 태형이 형의 입가에 피어난 웃음을 지적했다. 그러자 당황하면서 긴 손가락으로 입매를 훔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 좀 사람이 웃을 수도 있지!! ... 하고 사라진 태형이 형을 보면서 지민이 형은 "뭐야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극딜당한 기분이야."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사라진 태형이 형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지민이형이 내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 절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척에서 깜박거리는 검은 눈동자. 지민이형이 의심스러운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태형이 연애하는 것 같지."

"몰라요."

"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완전 티나는데... 국이는 연애하면 안 된다 알았지?"

"왜요?"

"왜요는 무슨 왜요야, 형 말 한번이라도 순순히 안 듣지."




짐짓 화난 표정을 짓더니 장난스럽게 내 허리를 꼬집는다. 나는 악 하고 소리를 내며 적당히 몸을 비틀어줬다. 비명소리에 꼬집던 손이 허리를 간지럽히기 시작하자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학, 그만해요, 진짜! 나는 지민이 형의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해 소파 위로 몸을 기울이며 킬킬 웃었다. 항복한 내 위로 풀썩 엎어진 형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가슴팍을 들썩이며 분홍색으로 물든 형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지민이 형이 왜 맥락없이 간지럼을 태웠는지 알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한 짓일 테다. 나의 수호신이니까, 지민이 형은 억지로라도 내게 웃음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형이 하나 모르는 게 있다. 지민이형은 내가 형이 나의 수호신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줄 안다. 바보.




첫 번째 생을 끝마치고 지민이 형을 처음 봤다. 그때 형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리 장신의 키가 큰 남자였다. 형은 바위 위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형의 앞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가 죽었어요. 짙은 갈색 눈동자와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로 만든 듯 싶던 금발이 땅에 묻히던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형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형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옆에 있던 풀들도 같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나는 형에게 물었다.



'그는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나요?'



이번 생에서는 날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다음 생이 있으니까. 그가 무엇으로 태어나던지, 나도 그를 따라 같이 태어나서 사랑을 얻고 말 테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형에게서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는 다음에는 아름다운 새로 태어날 거란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준 형은 곧 아름다운 새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갔다. 형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난 후 나는 다음 생으로 건너갔다. 물론 형이 말해준 대로 새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후였다. 그리고 그를 찾아 온 세상을 날아다녔다. 시간을 많이 소비한 후에 나는 형의 말대로 아름다운 새로 태어난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이미 짝을 만난 후였다. 이번 생도 아니구나. 나는 날개를 접어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으며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혹한 추위가 들이닥쳤고, 그는 눈보라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죽었다.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나는 형이 있는 곳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형은 이번에도 바위 위에 앉아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게 따뜻한 천을 둘러주는 형의 손길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이번에는 무엇으로 태어나나요? 하고. 빈틈이 없도록 무릎을 꿇고 내 몸에 꼭꼭 담요를 둘러주던 형은 내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이번에는 한 그루의 벚꽃나무로 태어날 거야.'



그렇게 대답한 형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제자리에서 한 그루의 벚꽃나무로 변했다. 연분홍색 꽃잎들이 내 주위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 다음 생으로 건너가 벚꽃나무로 태어났다. 몇 년을 열심히 자라 꽃을 피울 수 있게 된 나는 그를 향해 내 꽃잎을 날려보냈다. 내 마음을 가득 담아서.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수천 개의 편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하얀 벚꽃을 한가득 피워낸 그는 나를 향해 단 한번도 꽃잎을 날려주지 않았다. 몇 년 뒤에 하얀 벚꽃을 피워내던 그는 한 사내의 톱날에 잘려나갔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산사태에 허리가 꺾였다.


또다시 나는 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형은 말없이 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꼭 껴안았다. 잠시동안 형의 품에 안겨있던 나는 또 물었다.



'그는 이번에는 무엇으로 태어나나요?'

 


수 번, 수십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면 형은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항상 들려줬다. 그는 이번에는 고래로 태어날 거야. 그는 이번에는 고양이로 태어날 거란다. 그는 이번에는 소녀로 태어날 거야. 수명을 다해서 바다 위로 둥둥 떠오른 큰 고래 하나. 흰 고양이라는 짝을 찾은 갈색 고양이. 백작과 결혼한 아름다운 여성. 그렇게, 수십 수백번이나 나는 새로 태어난 그- 태형이 형을 찾아다녔다.



'다음 생에는 꼭 될 거야.'



지민이 형은 항상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계속해서 품었다.


* *



한 사람을 수십번이 넘는 생애에 걸쳐 계속 사랑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쉬운 일이다. 그만큼 익숙해져서 힘들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생의 그인, 태형이 형은 지금까지 본 그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를 찾아 그룹에 들어왔고 태형이형을 보고 재차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태형이 형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생이기도 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연습하고.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장 멀리 지내야 하는 생이기도 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선택할 수 있지만 성별을 택할 수는 없었는데, 이번에는 태형이형과 같은 성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태형이형은 여자를 좋아했다.




"김태형 어쩐지 갈수록 잘생겨진다? 연애해?"

"저 원래 잘생겼어요."

"너는 왜 갈수록 내 말투를 닮아가냐."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태형이 형을 힐끗 쳐다보았다. 석진이 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은근히 만족스러워 하는 듯 했다. 자기 말투가 전염성이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것 같았다. 거울 안에 비치는 태형이 형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정말 전보다 잘생겨 보였다. 거울 속에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형은 입꼬리를 슥 끌어올려 왜? 하는 눈으로 웃어보였는데, 나는 가슴이 떨리는 걸 느끼며 겉으로는 일부러 아닌 척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방금 들은 말이 떠돌아다녔다.


연애해?


손을 움직여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대기실 문을 열어 밖으로 사라졌다. 사귀는 걸까. 저번에 보았던 그 이름의 여자랑. 별로 놀라울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매번 이랬으니까. 나 말고 다른 짝을 늘, 찾았으니까. 그래도 어쩐지 씁쓸해지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정국이 왜 우울해?"




지민이형의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앉았다. 내 얼굴과 어깨 사이에 턱을 올리고서는 두 팔로는 괜히 날 껴안았다. 저 앞의 거울 안에 떠 있는 지민이 형은 걱정어린 표정이다. 아니라고 거짓말은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차선책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피부가 좀 뒤집어져서요. 그건 사실이었다. 그저께 먹은 밀가루로 뾰루지가 이마에 하나 돋아 있었기에. 지민이형은 머리칼에 감춰져 있을 내 뾰루지를 심각하게 바라보다가 그랬다.




"잘 안 보여. 금방 가라앉을 건데 너무 죽상 쓰지 말구."

"그래도. 이거 때문에 더 못생겨지잖아요."

"못생겨지기는. 그래도 예뻐."




지민이형은 그렇게 날 달랬다. 정국이는 뭘 해도 항상 잘생기고 예쁘니까 우울해하지 마. 우습게도, 내가 우울해진 이유는 정말 그딴 뾰루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이미 그때부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한동안 잊고 살았을 정도로 나는, 우리는 무척이나 바빴다. 예능 방송이니 투어니 뭐니. 당장 눈앞에 닥친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도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정말 바빴다. 약 4개월 가량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숨 돌릴 틈이 주어졌을 때 나는 태형이 형이 연애하는 장면을 봤다. 휴가가 주어진 날 태형이 형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가 싶더니 숙소를 나갔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고 온다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을 낮 시간대를 피해 밤에 한강을 간 나는 그 곳에서 태형이형을 봤다. 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다리 밑의 구석진 부분에서 한 여자와 앉아 있었다. 아침에 태형이 형이 입고 나간 옷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가 형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태형이 형이 여자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담담했지만 생각보다 담담해지지 못했던 나는 기다려서 숙소로 돌아오는 태형이형을 붙잡았다. 모퉁이를 돌아나온 팔에 붙잡혔던 태형이 형은 당황한 듯 했으나 그 팔이 나인 걸 알고서는 표정을 풀었다. 정국아? 여기서 뭐해?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형, 저 아까 한강 갔는데 거기서 형 봤어요. 형의 표정에는 변동이 없었다. 다리 밑에서, 형 혼자가 아니었는데.




"형, 연애해요?"

".........."

"정말?"




태형이 형은 말이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답을 읽을 수 있었다. 아... 나는 팔을 풀었다. 정말 연애하는구나. 답을 얻자 완전히 괜찮아졌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우리끼리 연애하지 말자고 약속한 시기도 이제 지났고, 이게 처음도 아닌데 뭘. 어차피 이번에는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태형이 형이랑 안 될 줄 알고 있었다. 이번생의 남은 시간에는 지금껏 해온 것처럼 팀의 막내로, 형의 좋은 동생으로 남자. 다음번에 태어나서 다시 찾아가면 되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형이 잘 할 테지만, 들키지 않게 신경써서 연애해요. 그렇게 말한 나는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며 발을 옮겼다. 그러나 태형이 형이 날 따라오지 않았다. 정국아.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할 말이 정말 그게 다야?"

".....?"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럼 무슨 할 말이 더 있는데요...?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서 역으로 물어봤다. 내가 말한 것중에서 이상한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음 순간 떨어지는 태형이 형의 입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 정국아. 미안한데... 나 너 안 좋아할거야. 무슨 말이지. 나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태형이 형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말을 떼었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몰라. 그래도 한 번 말해보고 싶어서."

"..........."

"정국아, 있잖아...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네가 날 따라 태어난다는 걸 알았어."

"..........."

"내가 센 것만으로도 열 번은 넘는데, 분명 그것보다는 많겠지."




눈을 올린 태형이 형과 시선이 맞닿았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모른 채 멍하니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태형이 형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날 그만큼 좋아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정국아, 나는 앞으로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너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 이상 고생하지 마."

".........."

"만일 이게 영문을 모르는 말이었으면 잊어버리고, 정말이라면... 더 이전에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몇 시간 후에야 간신히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지민이 형을 마주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베란다 문을 닫고 오던 지민이 형은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황급히 앞으로 걸어왔다. 정국아, 울어? 왜 울어 왜.... 지민이 형의 손가락이 줄줄 눈물을 쏟고 있는 내 눈가를 닦아줬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자 아예 내 얼굴을 끌어당겨 형의 어깨에 묻게 만들었다.




"국아 왜 이렇게 서럽게 울어..."




내 등을 쓸어내리는 지민의 형이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나보다 키가 한 뼘은 작은 지민이형에게 매달려서 눈물을 쏟아냈다.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형,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앞으로 내가 몇 번을 더 태어나도, 몇십 번을 더 옆으로 찾아가도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래요. 자기를 따라서 태어날 필요가 없대요... 형의 손에 이끌려 내 방으로 들어온 나는 형이 이불보를 덮어주고, 토닥여주는 내내 조용히 울었다. 마침내 눈물이 끊기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감기기 직전에 나를 내려다보는 지민이 형의 얼굴을 보았다. 문득,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너를 좋아하지 않고, 몇 번을 새로 시작해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나를 따라서 태어날 필요 없어, 라면...


그러면 지민이 형.



형은 왜 나를 따라서 태어났죠? 



* *



살아있을 때 이 문을 연 것은 처음이다. 매번 죽고 나서야 이 문고리에 손을 댔으니까.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내딛자 어디선가 날아온 벚꽃잎이 내 코끝을 스치곤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푸른색 초원에 자라난 수많은 벚꽃나무들을 바라보았다. 형은 그중에서 제일 거대한 나무 위에 올라가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왔다는 것을 전해듣자 놀라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몸 위로 떨어졌던 꽃잎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몸을 일으킨 형은, 이번 생의 지민이 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땅으로 착지한 지민이 형은 나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기도 했다. 정말 내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맞다는 것을 확인한 형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올 때가 아닌데..."




형은 처음 보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아직 나는 죽지 않았으니까. 아직, 전정국으로 살아있었으니까. 그러나 형은 곧 표정을 고쳤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마다 매번 지어보이던 부드러운 온화한 표정으로. 형은 맞물려있던 입술을 떼어 말했다.




"그는 다음에는 한 소녀로 태어날 거야."




묻지 않았지만 지민이 형은 그렇게 말해줬다. 내가 이곳에 올 때마다, 입을 열어 항상 처음으로 뱉었던 물음. '그는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나요?'에 대한 대답.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형은... 당신은 무엇으로 태어나나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가. 내 물음에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지민이 형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형은,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날 건가요. 말을 내뱉자 가슴이 몹시 아려오기 시작했다. 눈에 열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형은 나를 보며 엷게 웃어보였다. 아주 느릿하게 떨어지는 입술, 들려오는...




"내가 무엇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어?"




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모든 게 이해됐다. 왜 형이 내 옆에 항상 있었는지, 왜 항상 그와 비슷한 걸로 태어났던지. 내가 추위에 얼어죽은 후 여기로 왔을 때 형은 내게 담요를 둘러줬었다. 톱날에 허리가 베어 땅으로 쓰러지고 왔을 땐 형은 내 허리를 꼭 안아주었었다. 익사해서 죽은 후 이곳으로 왔을 때는 저 나무 옆에 있던 연못이 없어져 있었다. 형은 나에게 그가 무엇으로 태어나리라 말해주고서는 내 앞에서 그와 비슷하게 변해서 날아갔었죠. 그를 닮았더라면 내가 형을 혹시나 사랑할까 해서. 나에게 사랑받으려고,


나를 사랑하니까.


눈물이 터져나왔다. 목소리가 한없이 떨려나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무엇으로 태어나든,"




발을 내딛었다. 물로 일렁이는 형의 눈동자를 따라 주변에 서 있던 나무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또 발을 내딛었다.




"사람으로 태어나든, 동물로 태어나든,"

"........"

"한없이 흘러야 하는 강물로 태어나야 한다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라도,"

"........"

"이제,"




마지막 문장만을 앞두기 직전, 이제 주변은 따스한 바람으로 우리들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형을 붙잡았다. 울음기가 섞인 미소를 지으며 형에게 말했다.




"형을 따라서 태어날래요."




그리고 벚꽃잎으로 가득 찬 봄바람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눈을 떴다.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대충 훔치고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 지민이 형이 잠들어 있을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형의 방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우리들은 눈을 마주하고서 잠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서로의 얼굴이 눈물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슬프지 않다. 아니, 행복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민이 형을 불렀다. 




"형,"




지민이 형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  *


그는 49번을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중 28번은 남자로 21번은 여자로 태어났으며,

28번째 남자로 태어났을 때

 

나와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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