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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불협화음 下

그 일이 있은 후로 지민은 정국을 피해다녔다. 도저히 정국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만일 마주하면 자신에게 어떤 시선을 내비출지 두려웠다. 그 날, 충격받은 얼굴로 눈물을 조용히 흘리던 정국이 잊혀지지 않았다. 몹쓸 짓. 자책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정국을 보러 가던 지민이 일주일 정도를 대놓고 피해다니자 옆에 있던 놈들도 무슨 일이냐며 물어오기까지 했다. 미치겠다.



"들어와."



똑똑,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지민은 애써 엉망인 머릿속을 정리하고서 말을 뱉었다. 병욱일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든 지민은 그대로 굳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정국이었다. 지민은 정국이 제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입술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절 바라보는 시선이 무겁다. 한참동안을 침묵하던 정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형."



조용히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지민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원망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정국은 대답없는 지민의 머리에 대고 물었다. 왜 그랬어요? 지민은 더더욱 대답할 수 없어 손끝만을 쳐다보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국에게 상처를 남길 것만 같아 침묵했다.



"저 좋아해서 그랬어요?"



말 없는 지민에 정국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지민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었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실수한 거예요? 탁, 하고 내려놓는 소리에 지민은 악물었던 이에 힘을 풀었다. 형. 정국의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말해요."

"...뭐?"



그 말에 지민은 숙였던 고개를 도로 들었다. 정국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발개져 있었다. 지민이 되물을 새도 없이 정국은 달려들었다. 달려들어, 지민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했다.






불협화음






정국은 한껏 흐트러진 상태로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지민은 정국의 목덜미를 한껏 빨아들였다가 놓았다. 흐으.. 바르작거리는 손이 허공을 두어 번 흝다가 지민의 등 위로 안착했다. 입은 정국의 목덜미를 탐하고, 손은 정국의 옷 안으로 넣어 피부를 살살 쓸며 지민은 행위를 이어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띄엄띄엄 이어졌다. 그것들은 모두 두서가 없었다. 정국이 저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한 그 순간부터 지민은 제대로 된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푹신한 침대 대신, 카페트가 깔려 있는 바닥에 누워 있는 정국은 지민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며 간간히 신음만을 내뱉었다. 지민이 손을 움직여 정국의 옷을 풀어내자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잘 짜여져 있는 몸을 본 지민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질스러운 상상 속에서 제 밑에 깔려 울던 정국은 이런 몸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손끝으로 잘 갖춰져 있는 복근을 쓰다듬자 정국은 몸을 살짝 비틀었다. 형... 흘러나오는 비음에 흥분하면서도 지민은 생각했다. 암묵적으로 정국이 몸 파는 일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매장에 나오는 자들은 대부분 그런 쪽이었으니까. 손님을 받으면 이런 몸을 가꿀 시간이 없었을 텐데. 이건 꼭 무수히 많은 몸싸움을 통해 자연적으로 다져진 근육 같다. 마치...자신처럼 조직 생활을 한 자들 말이다. 지민의 생각은 깊게 이어지지 못했는데, 제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해온 정국 때문이었다.


지민이 정국의 뒤에 손가락을 넣었을 때, 정국은 눈에 띄게 긴장하며 지민의 팔을 잡았다. 윤활제 대신 쏟아낸 액을 묻히고 뒤를 넓혀가는 지민의 손가락은 부드러운 동시에 집요했다. 뜨거운 내벽은 처음에 손가락을 밀어내다가 힘을 풀며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정국은 지민의 손가락이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눈을 파르르 떨었다. 마침내 지민이 정국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을 때, 정국은 다가올 고통을 가늠하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지민은 그런 정국에게 짧게 입맞추고서는 허리를 밀어넣었다.



"....!"



정국은 목을 한껏 비틀며 비명을 참아냈다. 지민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정국의 손을 펴서 깍지를 꼈다. 정국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려 마음먹었던 지민은 그러나, 인내심이 짧았다. 지민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하자 발개진 눈을 하고서 참아내던 정국은 견디지 못하고 울었다. 하지만 울면서도 정국은 아프다거나, 멈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윽, 형....."

"응,"

"지민이 형....."



정국은 제 손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지민의 손가락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꽉 말아쥐었다. 지민은 예쁘게 울면서 절 부르는 정국이 마치 환영 같다고 생각했다.





선두에서 움직이는 검은 차 뒤로 똑같은 검은 차들이 내달렸다. 여러 대의 차가 향하는 목적지는 경매장이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내린 지민의 뒤로 비슷한 옷을 입은 부하들이 따라 내렸다. 지민은 부하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 쓸모없는 말 없이도 알아들은 무리들은 경매장 안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지민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대강 정리될 때까지 담배나 피며 기다릴 생각이었다. 지민은 그 때 윤기가 지시한 사항을 잊지 않았다. 위협적인 장소는 아니지만 상대 조직의 밑 자금을 만들어주기에 중요도는 높다. 그게 바로 지민이 지금 현장에 나온 이유였다. 삼켜버린다면 아마도 상대는 당분간 귀찮은 짓은 벌이지 않게 될 것이다. 몸을 사리면서 다른 방안을 살펴보거나 아니면 역발상으로 우리쪽을 치러 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후자는 이미 예상해뒀기에 만일 정말 치러 온다면 얻기는 커녕 더 잃기만 할 것이다. 단조롭게 생각하고 있던 지민은 경매장 안으로 사라졌던 무리들 중 하나가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님!"



남자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텅 비어있습니다...!"



지민은 차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부하의 말이 맞았다. 경매장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전에 보았던 사치스러운 공간들은 이제 쓰지 않는 것처럼 휑하니 변해 있다.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발을 멈춘 지민은 물고 있던 담배를 툭 떨어뜨리곤 발로 짓이겼다. 지민의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사방을 세세히 훑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저쪽에서 미리 알고 철수한 걸까, 싶다가도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남는다.


또, 배신자인가.


일의 진행은 보스를 제외하면 몇몇에게만 알려줬다. 지민은 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하고 이 중에 나를 등쳐먹은 새끼들이 있을까...



"어떻게 할까요?"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다 움직임을 멈췄다.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헛짓한 거지 뭐. 지민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저쪽도 머리가 장식은 아닌 모양이야.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입을 열었다. 돌아간다. 그러나 평온한 목소리와는 달리 눈은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정국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잠이 묻은 목소리가 가슴을 헤집는 지민의 손에 반응하여 흘러나왔다. 형...? 눈을 겨우 뜬 정국은 지민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읏, 왔어요...? 지민은 정국의 티셔츠를 말아올려 가슴을 머금었다. 아아, 정국은 밀어내지 못하고 지민의 머리칼만을 휘어잡았다.



"오늘, 은, 옷도, 깨끗, 하, 고...."



중간중간 신음에 먹혀갔지만 정국은 제대로 된 문장을 내뱉었다. 항상 지민이 정국에게 오늘 좀 늦게 돌아올 거야, 하고 나가는 날이면 피비린내를 달고 오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깨끗했다. 비릿한 냄새 하나 흘러나오지 않았다. 정국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새 없이 다리를 벌리는 지민에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다잡기가 무섭게, 익숙한 살덩이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정,국아."



반강제로 잠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쾌락이 달라붙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헤매는 정국에게 지민은 허리를 쳐올렸다. 다리가 갈 곳을 잃고 헤매자 팔로 붙들어 고정시키며 지민은 정국을 탐했다. 만일 정말로, 새어나간 게 맞다면 어디서부터 흘러나간 건지 도저히 감히 잡히지 않았다. 지민은 의심가는 두 명에게 비밀스럽게 올가미를 던졌다. 두 명 모두,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 제 부하들 중 누구도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도 불안이 떨쳐지지 않았다. 정보가 새어나갔던 길로 만일 상대 조직이 들어온다면, 그래서 여기를 무너뜨리고, 정국을 다치게 한다면. 지민은 이를 악물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 다짐했다. 다시는 다치지 않게 하리라 결심했다.



"아, ㅎ,"

"지켜, 줄게."



지민은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정국의 안에 사정하며 약속했다. 내 목숨을 걸고서 반드시... 살려줄게.



* *



단순한 피해망상이었다. 지민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최근 들어 배신자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생각이 그로 쏠린 탓이었다. 경매장이 없어진 이유는 상대가 먼저 우리들의 동태를 알고 대응했기에 그런 거였다. 지민은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도 좋지만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는 신뢰도 필요했다. 지민은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서로를 믿지 못해 개죽음을 당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보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안겼지만, 다른 일을 통해 만회하면 충분했다. 배신자가 또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경계를 해제하자 정국의 생각이 퐁 하고 떠올랐다.


최근들어 일을 처리하다가도 지민은 정국의 생각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정정한다. 최근이 아니었다. 지민은 정국을 데려온 날부터 정국의 생각을 했으며, 정국과의 감정을 확인한 날 이후로는 시도때도 없이 했다. 보고받은 서류철을 한 장 넘길 때 마다 정국의 눈을 떠올리고, 방아쇠를 당길 때는 정국의 입술을 떠올리고, 피가 고인 웅덩이에서는 정국의 웃는 얼굴이 비춰 보였다. 정국은 저를 따라 조직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조직과 섞이지 않았다. 조직이 물이라면, 정국은 기름이었다.


정국은 여전히 어두운 향을 달고 있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빛나는 웃음을 달고 살았다. 저에게 웃어주는 얼굴을 보면 지민도 따라 웃었다. 서로를 의지하며 보낸 어린 시절과 같게,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와는 달리 정국을 안으며 입맞췄다.



"형."

"응."

"배신자를 형이 처리해요?"



뚝. 흘러나온 말에 지민은 담배를 피우던 동작을 멈췄다. 이따끔씩 정국은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지민은 자기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적 있지만 그와는 동시에 정국이 물어보지 않았으면 했다. 정국의 입에서 피비린내나는 말이 나오는 순간 제 손에만 묻었던 피가 정국에게도 옮겨붙는 착각이 들어서.



"친한 사람이었던 적도 있어요?"

"........."



지민은 지난 날을 떠올렸다. 당연했다. 보통 배신자들은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말단보다는 가까이 있던 자들이었다. 지민은 그들을 모두 직접 처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민은 과거 친했었던 배신자들을 처단하면서 일말의 동정을 느끼지 못했다. 지민의 공감능력은 제 사람들에 한에서만 발휘되었다. 한 때 친했던 동료가 죽어가는 데 괴로워하는 안쓰러운 부하를 볼 때면 지민의 동정심은 발휘되어, 그들에게 배신자들을 편하게 죽일 수 있는 총을 쥐어주었다.



"죄송해요."

"아냐."

"그냥...그냥 궁금했어요."



정국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후, 닫혀져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지민은 갑작스레 열린 문에 편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들어온 사람을 보고 일어섰다. 흙투성이에다가 엉망이 된 정국이 울고 있었다. 밖에서 줄창 내리는 비로 온몸은 흠뻑 젖은 채였다. 지민은 너무 놀라 정국의 얼굴을 살폈다. 볼에는 나뭇가지에 살짝 긁힌 상처마저 있었다. 정국은 지민에게 안겨들어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일이야. 지민은 정국을 다독이면서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정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저히 안심이 안 된 지민은 정국을 억지로 떼어내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국은 더 깊게 지민의 품을 파고들었다.



"묻지 마요..."

"정국아."

"묻지 말고, 그냥 달래주면 안 돼요...?"



애원하는 목소리에 지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정국의 등을 토닥였다. 얼핏, 흙냄새와 함께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착각이 들었다.





 

"쥐새끼..."



보고하러 올라간 지민은 한 마디에 고개를 들었다. 네? 지민이 되물었지만 윤기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펜을 핑글핑글 돌릴 뿐이었다.


제 말을 잘 따르던 부하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간 지민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날짜가 더 지나자 이상함을 느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살펴봐봐. 지시를 내린 지민은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내리눌렀다. 함정을 피해갔던 두 명 중 하나였다. 테스트로 배신자가 아님을 알았다. '이 쪽'의 배신자가 아니었다.


이 주 뒤, 사라졌던 부하의 행방을 찾았다. 버려진 하수구에 처박혀 있었다. 시멘트로 칠해진 드럼통에서 비죽 튀어나온 손은 부패한 지 오래였다. 지민은 참담한 표정으로 손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저 손의 주인이 원래 상대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걸 보고받았다. 오랫동안 이 조직에 녹아서 쓸모있어 보이는 정보들을 넘기는 일을 했다고. 그러나, 언제부터 그만두었다고. '그쪽'의 배신자가 되었다고.



"...형님."



지민은 눈을 감았다. 안 좋은 감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지민은 담배를 꺼내어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민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담배연기는 복잡하게 흔들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최근들어 지민은 말이 없어졌다. 정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민에게 말을 건넸다. 골치아픈 일 있어요? 응? 지민은 정국을 보며 엷게 웃었다. 조금 생각할 게 많아서.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야. 밝은 목소리에도 정국은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걱정할 거 아니라고 하면서 형 얼굴은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짊어진 표정이에요. 말 해봐요. 지민에게 걸어와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정국은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지민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 넘도록 저와 함께했던 부하가 원래 상대조직이 심어둔 스파이었다는 점을 알고 나서, 자체적으로 부하들의 뒷조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연관없다고 넘긴 경매장도 재조명 되었다. 쥐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던 윤기의 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배신자를 색출해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고, 한 명씩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지민은 조사한 자들은 모두 배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단 한 명만 빼고. 지민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사실, 배신자가 있는 거 같아서 조사했어."

"...있었어요?"

"아니. 조사한 사람들 모두 아니었어."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정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두 아니었다고 하니까 배신자는 없는 거잖아요. 지민은 정국의 손을 잡아올렸다. 정국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던 지민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한 명. 조사 안 한 사람이 있어."

"...누군데요?"



지민은 정국의 손을 놓았다. 스르륵, 하고 빠져나가는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지민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어냈다.



"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민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방심한 것도 있었으나 그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정국의 몸놀림은 단순한 일반인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게다가, 손에 들고 있는 예리한 칼날이면 더더욱. 지민은 절 깔고 앉아 칼끝으로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정국을 올려다봤다.



"그거 알아요?"



정국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날 아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홀로 남겨졌어요. 며칠간은 제자리에 앉아 형이 오기만을 기다렸죠. 형이 이렇게 날 오래 두고 떠날 리 없는데. 사흘이 지난 후에서야 나는 거길 떠났어요. 그리고 형을 찾아 헤맸죠. 장장 2년 동안. 정국은 겨눈 팔을 조금도 거두지 않고 계속했다.



"나는 형이 생각한 것처럼 몸을 파는 일, 안 했어요."



조직에 들어갔죠. 그 때의 난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요. 형이 날 그렇게 남겨두고 간 덕분이죠. 정국은 피식 웃었다. 적응이 빨랐어요. 칼 쓰는 것도, 총을 다루는 것도 월등했죠. 그들이 날 놓칠 리 없었어요. 그들은 내가 뭐만 하면 칭찬해줬어요. 사람을 깨끗하게 죽이고 오자 정말 잘 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라고요. 형. 우리는 그런 거 고아원에서 받아본 적 없잖아요. 칭찬, 따스함, 꼬박꼬박 나오는 밥... 뭐 그런 거. 정국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말을 이었다.



"형. 조직은 나에게 가족이었어요."

"........."

"가족이 내게 말했어요. 더 넓은 데로 이사가자고."



이사. 지민은 알았다. 경매장에 올라섰던 정국의 모습은, 애초부터 의도했었더란 걸. 누군가에게 팔릴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왜냐하면, 항상 가격을 가장 높게 부르는 사람은 우리 조직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형이 나타난 거예요. 나타나서, 나를 여기로 안내해줬죠. 정국은 사실을 서술하며 지민에게 비참함을 선물했다.



"뭘 기대했어요? 우리가 함께한 추억?"

"........."

"아니면, 사랑?"



정국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민은 울고 싶었다. 제 목줄을 끊어버릴 정국이 너무 예뻐서, 그런데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예쁜 입으로 내뱉는 모든 말들은 비수가 되어 찔러서. 지민은 정국을 바라보았다. 비참함을 한껏 억누르고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정국아,



"왜 울고 있어?"



그제야 정국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은 지민의 볼 위로 툭, 툭 떨어졌다. 아... 정국이 멍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민은 정국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칼날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장면도.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싸늘한 윤기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저 새끼 끌어내."



정국은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나갔다. 끌려나가는 정국을 보고서도 지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방으로 불려간 지민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끌려나간 정국은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지민은 정국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었다. 축축하고, 음산하고 피비린내가 나는 지하실에 묶여 있겠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고 처단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배신자의 처단을 담당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 가만히 지민을 보고 있던 윤기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지.



"죽여."



명령이 떨어졌다. 지민은 소리내어 답을 하지는 못했다.


 

뚜벅뚜벅. 지하실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 둘이 고개를 들었다. 나타난 사람을 확인하자 지민이 들어갈 수 있게끔 몸을 비켜주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가운데에 정국이 있었다. 의자에 온 몸이 꽁꽁 묶인 정국은 만신창이였다. 입가에는 말라붙은 피딱지가 자리했다. 지민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며 의자를 끌고 왔다. 지이이이익, 듣기 싫은 소리가 공기중을 울리자 정국은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지민의 얼굴을 찾은 정국은 입을 열었다.



"왔어요?"

"........"

"안 올 줄 알았는데..."



정국은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눈을 찌푸렸다. 고통을 참는 모양새였다. 지민은 그런 정국을 보고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입술을 꽉 깨물 뿐이었다. 정국은 피가 배인 목소리로 지민에게 말을 흘렸다. 형.



"그 사람, 내가 죽였어요."



지민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비가 오던 날, 갑작스레 들이닥쳐 눈물을 쏟아냈던 정국을 떠올렸다. 피비린내는, 착각이 아니었다. 원래 내 쪽 사람이었어요. 가족이었는데... 돌아서버려서, 죽일 수밖에 없었어요. 정국은 살아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는 잔잔하고 또 고요했다. 고해성사를 하듯, 정국은 제가 저지른 죄를 지민에게 늘어놓았다. 정국의 말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지민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가, 끝내 감겨졌다. 그러다가 정국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형은 나에게 참 다정하네요."

".........."

"총을 가져왔잖아요."



형이 배신자에게 가차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형은 자비를 베푸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친한 사람들도 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이 나올 때까지 하나하나 끊어놨잖아요.



"형이 총을 들고 오는 거 보고 솔직히 안심했어요."

".........."

"나한테는 자비를 베풀고 싶었구나."



정말, 형은 나를 사랑했구나.


정국은 희미하게 웃었다. 지민은 뭔가가 턱 하고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민이 조용히 총구를 만지작거리자 정국은 눈을 스르르 감고 지민이 절 쏘길 기다렸다. 그러나 지민은 총을 겨누는 대신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그걸 이행하는 데에,  나와의 잠자리도 필요했어?"

"........."

"아니면 정국아,"

".........."

"네 의지였어?"

 

 

솔직하게 말해줘. 지민은 저만을 향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마음을 굳혔다. 지민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곧, 총성이 지하실을 울렸다.





나동그라진 지민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윤기는 무신경한 얼굴로 쓰러진 지민에게 걸어가 명치를 걷어찼다. 한순간 숨이 쉬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정국을 도망치게 한 대가였다. 지하실을 지키던 부하들을 죽이고, 정국이를 살려보낸 대가. 그래서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는데도 입가에는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지민은 쿨럭이며 입 안에 가득 고인 피를 토해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비틀거리는 지민의 복부로 윤기의 발이 다시 날아들었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제대로 들어온 발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국은 괜찮을까. 이 상황에서 지민은 그게 너무나도 궁금했다. 혹여 돌아가서 실패했다고 죽임을 당하진 않았을까. 직접 거기까지 데려다 줄 걸. 지민은 후회했다. 전혀 반항도 의지도 없는 지민을 보고 윤기가 폭력을 그만뒀다.



"기회를 줄까."



윤기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나랑 꽤 오랫동안 알아왔으니까, 이런 예외쯤은 줄 수 있지. 지민은 제가 쏟아낸 피로 물들어가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지민아. 깡, 하고 쇠가 떨어지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가서, 쓸어버리고 와."



혼자서.





혈혈단신으로 상대 조직을 무너뜨리고 오라니. 지민은 스스로 죽으라는 보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자신은 죽으러 왔다. 지민은 깨진 전구에서 불꽃이 튀는 꼴을 바라보았다. 땀과 피투성이가 된 지민은 마지막 남은 힘으로 제 발목을 붙드는 남자의 손을 걷어찼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장비를 손보고 있던 자들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지민은 가볍게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죽으러 왔는데, 몸은 자동적으로 움직여 상대의 목에 칼을 꽃아넣고 이마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살고 싶은 건가. 지민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탄약이 남아있지 않은 총을 주저없이 버린 지민은 컴컴한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지민이 들고 있는 것은 칼자루 하나 뿐이었다. 지민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까 전 유리에 찢어진 팔에서 떨어진 핏방울들이 남았다. 걸음을 멈춘 지민은 옆에 꺾어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반도 못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 온 길의 반도 가기 전에 죽을 지도 모른다. 출혈이 심했다. 그러나 지민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왜냐하면...


뚜벅뚜벅,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지민은 반사적으로 칼을 들었다, 내렸다.



"..........."



정국이었다.


지민은 멍하니 정국을 바라보았다. 살짝씩 흐릿해지려는 시야를 흔들어 제대로 하고서는 다시 확인했다. 정국이 맞았다. 정국은 멀쩡했다. 그 때 달고 있던 상처도 말끔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정국도 지민을 확인했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정국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자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데도 지민은 웃음이 나왔다.



"살아있었구나..."

"........."

"다행...이야."



다행이라는 말을 하면서 지민은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풀썩, 주저앉은 지민에 정국이 황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 형! 지민을 부축한 정국은 눈물을 쏟아냈다.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들에 지민은 정국의 얼굴이 무서웠던 이유는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봐 했단 걸 알았다.



"왜 그때 나 살려보냈어요."

"정국아,"

"형은 항상 바보같아. 왜, 항상 그래."



정국은 펑펑 울면서도 지민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제가 입고 있던 셔츠단을 부욱 찢었다. 상처부위를 세게 압박하는 정국의 손으로 여전히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민은 웃으며 정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항상 그랬잖아, 정국아... 나 항상 네 앞에서만 달랐어. 지민은 절 부축하는 정국을 따라 무거운 다리를 천천히 옮겼다. 그 때의 일로 손가락에 남은 흉터까지 흘러내린 피가 손끝을 타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린 시절, 정국에게 날아드는 깨진 술병을 대신 막다 생긴 흉터였다.


피를 많이 흘린 지민에게 복도는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시야가 흐릿했으며, 두통도 밀려왔다. 지민은 정국에게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온전히 정국에게 의지한 채로 다리만을 움직였다. 코 끝으로 정국의 체향이 밀려들어왔다. 어둡고, 피가 배어있지만, 따스한 향이었다. 지민은 가볍게 웃었다.


만일 눈을 뜰 수 있다면, 그래서 다시 네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정국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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