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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진] 사랑의 대가 下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은 있다.


서로 같이 살게 된 지 5년이 지났다. 사귄 지는 7년이 지났다. 이제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너무 익숙해져서 연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석진은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를 꺼냈다. 그리고 익숙하게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채소를 써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러다 일정하게 들리던 소리가 잠시 멈춘 이유는 채소를 썰던 석진이 제 손가락을 베었기 때문이었다. 아, 피 나네. 석진이 중지를 입에 물었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퍼졌다. 대수롭지 않게 대일밴드를 찾아 붙이고서는 다시 식사준비를 했다. 요리가 완성되자 석진은 방에 들어가서 아직도 잠에 빠져있는 태형을 깨웠다. 김태형, 일어나. 밥먹어. 그리고 미련없이 등을 돌려 주방으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다 먼저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석진이 식사를 하기 시작한 잠시 후에 태형이 비척비척 걸어나와 의자에 앉았다. 젓가락을 놀리는 석진의 손놀림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조금 전에 칼에 베인 탓이다. 태형의 눈동자가 대일밴드를 붙인 석진의 손가락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쩌다 손을 베었냐, 괜찮냐는 상투적인 말조차.


연애 초반에는 이러지 않았다. 다른 연인들과 똑같았다. 서로 걱정해주고, 사소한 것에 웃음짓고, 싸우고 또 화해하고.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랬다. 사랑했기에 크게 싸우고 며칠간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냉전상태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서로에게서 풍기는 부드러운 향기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입을 맞추고, 키스하고, 같이 자고. 그런 관계가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1년 전부터였다. 태형은 각인된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태형은 일반적인 각성 과정을 거쳤기에 사랑하는 상대에서 자유로웠다. 태형은 원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었으며, 다른 사람을 매력적으로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석진은 태형에게 각인된 상태였다. 석진은 다른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배어있는 향이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끔 붙들어두었다. 그래서 석진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다. 여전히 석진에게는 태형의 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똑같이 태형에게 웃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게 태형의 마음을 끌지 않게 되었다. 항상 풍기는 은은한 장미향조차도 태형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어느 날, 태형은 집에 늦게 들어왔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랑의 대가



 

 


태형은 술을 잘 하지 않았다. 사실 술을 싫어한다는 편이 더 맞았다. 쓰기만 하고 맛도 없는 그런. 하지만 선호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주량은 약하지 않았다. 그게 태형을 더 고역스럽게 만들었다. 보통 술은 맛이 아니라 분위기로 먹는다고 하는데 자신에게는 둘 다 해당되지 않는다. 술을 멀리하던 태형이 제 의지로 술을 가까이하게 된 시기는 석진과의 사이에서 점점 권태를 느낄 무렵이었다.


달라지기 시작한 태형을 석진은 눈치 챘다. 석진은 처음에 태형을 달랬다. 그 다음에는 화를 냈다. 대체 왜 이러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며 물어오는 큰 소리에 태형도 맞서 소리 질렀다. 화를 내는 방법도 먹히지 않자 석진은 애원했다. 제발, 이라고. 태형은 비굴해지는 석진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지겨웠다. 달래고 화를 내고 애원해도 먹히지 않자 석진은 모든 걸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형의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저 원점으로 돌아가 태형이 돌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태형은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석진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




"오빠."




절 부르는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태형을 향해 손을 뻗어 눈을 가리기 시작하는 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오빠, 표정이 별로네. 재미없어? 태형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 태형의 손을 제지한 여자가 몸을 바싹 당겨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나한테 얘기해 봐. 여자는 손끝으로 태형의 허벅지를 슬쩍 슬며 답을 유도했다. 태형의 긴 속눈썹이 한 번 가라앉았다. 여자의 향수가 독했다. 최소한 석진의 체향은 지겨울지언정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태형의 생각을 모르는 여자는 샐샐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재미있게 해줄까?"

"어떻게."

"다 아는 그거."



새침한 눈매가 여유롭게 휘어졌다. 태형은 제 팔에 부드러운 가슴을 비비는 여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잠시동안 멍해졌다. 오빠 무표정일 때도 잘생겼는데 웃으니까 진짜 잘생겼다. 그 말을 들은 태형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 태형아, 너 웃는 거 정말 예뻐.


 


석진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사라졌다. 턱을 괴고 그런 말을 하면서 웃던 석진의 얼굴도. 태형이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맥락없이 술을 들이킨 탓인지 점점 여자의 얼굴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주량이 약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세지도 않았던 탓이다. 오빠. 절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를 잠시 동안 바라보던 태형은 곧이어 손을 뻗어 여자를 끌어당겼다.




태형의 손이 도어락을 눌렀다. 그러나 취한 탓인지 자꾸 미끄러져 오류를 냈다. 태형의 입술 사이로 욕설이 섞인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짓을 두어 번 더 반복하고 나서야 간신히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한 태형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소파에 앉아 절 기다리고 있을 석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집 안 가득 들어찬 장미향이 맡아졌다. 이제는 익숙해져 거의 못 느끼고 살다시피 했었는데도 맡아질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햤다. 게다가, 어딘가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붙여진다면 더더욱. 태형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석진의 방 앞으로 도달했을 때에서야 태형은 침대 위에서 몸을 바르작거리는 석진을 볼 수 있었다. 히트사이클이었다.




"태, ㅎ,아...."




열과 페로몬에 제정신이 아닌 석진의 눈동자가 태형을 집어냈다. 태형은 잇사이로 흘러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집어 삼켰다. 히트사이클인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태형의 페로몬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자의가 아니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새어나오는 알파 페로몬에 석진의 몸이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태형,아, 태,형,아. 석진의 입은 태형의 이름밖에 부를 줄 모르는 듯 그렇게 불러댔다. 지겹다. 지겨워. 태형은 벽을 짚고서 최대한 버텼다. 눈 앞이 점멸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태,으....."

"씨발...진짜...."




태형이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오메가의 페로몬에 벌써 반응하고 있었다. 눈물이 맺힌 얼굴로 태형을 애타게 부르는 석진에 결국 태형은 으르렁거리며 석진의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올라타 억누르는 태형에 석진이 숨이 넘어갈 듯 벌벌댔다. 그러다가 좀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하고 유혹적인 향으로 태형의 정신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독한 장미향. 이제 더는 자제할 수가 없었다. 태형은 석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세게 피부를 빨아들였다. 그러자 바로 탄성섞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옷을 벗겨내고 다리를 벌려낸 뒤에 손을 가져가자 잔뜩 젖은 게 느껴졌다. 태형이 오기 전부터 젖기 시작한 뒤는 태형이 도착하고 페로몬을 뿜어내자 완전히 풀려 거의 물을 쏟아내고 있는 지경이었다. 여유가 없어진 태형이 바지 버클을 풀고 성기를 들이밀자 기다렸다는 듯 집어삼켰다. 아으으... 석진은 앓는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팍을 들썩였다. 들어서자마자 바로 거친 허릿짓을 시작하자 석진의 손이 태형을 잡으려 버둥댔다. 그러나 태형은 제 등을 내주는 대신에 손목을 잡아 시트로 밀어붙였다. 잡지 말라는 제스쳐였다.


제 밑에서 숨을 뱉는 석진을 보며 태형은 허리를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선 붉은 몸이, 내뱉는 야한 숨소리에 숨이 턱턱 막혔다. 허리를 거칠게 쳐올릴 때마다 석진의 달뜬 숨이 터져나왔다. 하으으윽, 시트를 그러쥔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태형의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려 턱을 타고 석진의 배 위로 떨어졌다. 하윽,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고개를 비트는 석진을 보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형,"

"아,ㅅ,"

"난 이제 형의 향이 지겨워요."




일순간 석진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태형의 얼굴은 비틀려 있었다. 맞부딪혀 오는 뜨겁고 거친 아래와는 달리 얼굴은 한없이 차갑다. 예전에는 형이 체향이 좋다고 했죠, 내가. 이제는 아니에요. 태형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짐승같이 맞붙어 두 번을 더 하고 나서야 간신히 사그라든 히트사이클이었다. 태형은 취기가 다 깬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샤워기를 틀었다. 물에 씻겨내려가며 엉켜있던 페로몬도 사라지고 있었다. 다 씻고 가운을 걸친 태형이 욕실 문을 열자 아직 사라지지 않은 페로몬 향이 코로 들어왔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슬풋 좁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석진을 바라보았다. 흰 나신에는 자신이 물어뜯은 흔적들로 온통 울긋불긋했다.




"...태형아."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말을 내뱉었다. 태형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제게 묻는 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내 향이...지겨워?"




석진은 제발 아니라고 말하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태형은 침묵했다. 내보이는 눈빛에서 태형의 뜻을 읽어낸 석진이 허탈한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 그렇구나. 이제는 지겹구나... 석진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똑,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늦은 저녁에서야 집으로 돌아온 태형은 현관 앞에 쌓여있는 짐들을 보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못 보던 게 놓여있었다. 대체 뭐지 해서 고개를 드니 저 쪽에서 석진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석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태형의 질문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석진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 짐. 무슨 짐? 태형이 다시 물었다. 석진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태형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쪽에서는 태형의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나가려고. 목소리를 따라 걸어온 태형은 방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옷을 집어드는 석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겉옷을 걸친 석진이 뒤돌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나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올 필요 없어."

"네?"

"내 향 지겨워서 늦게 들어왔잖아, 너."

 



태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석진이 희미하게 웃었다. 더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였다. 태형은 움직이는 석진의 입술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조금 갑작스럽겠지만 뭐, 상관없잖아. 잘 있어, 그동안.... 석진이 말을 흐렸다. 적당한 말을 찾는 듯싶었다. 그러다 마침내 생각났는지 다물렸던 입술을 뗐다. 그래,




"그동안... 수고했어."

 



태형은 짐을 드는 석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제 옆을 지나쳐 현관으로 향하는 올곧은 발걸음. 태형은 그 모습을 보고 있기만 했다. 띠리릭, 하고 도어락이 열리며 석진이 집을 나섰다. 곧이어 문이 닫혔다. 이제 석진의 모습은 집 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태형이 다시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진이 쓰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단지 희미하게 남은 장미향만이 조금 전까지 그가 존재했던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



살다보면 신경쓸 것들이 많다. 오랫동안 사귀던 연인의 갑작스러운 이별통보에만 신경을 쓰고 살고 있을 순 없다. 그리고 사실 석진과 헤어진 중요도는 그리 높지는 않았다. 석진이면 몰라도 태형은 이미 한참 전부터 마음이 떠나있었기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태형은 석진을 떠나보낸 다음 날부터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막 길을 건너려던 태형이 발을 멈췄다. 저 쪽에서 익숙한 인영을 본 탓이었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김석진이었다. 석진이 그렇게 떠난 후 태형은 그동안 우연으로라도 석진을 마주한 적 없었다. 그간 알고 지냈던 세월이 무색하게. 서로의 취향을 속속들이 아는 만큼 서로가 만날 수 있을 법한 장소에 있더라도.


그런데 저건 누구지.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석진에게 다가선 남자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절 부른 사람을 확인한 석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저렇게 웃었던가, 형이. 태형은 가만히 생각했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자 저렇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 새로 생긴 연인이려나.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보며 떠오른 건 그거였다. 그렇게 나 없이 못 살 것처럼 굴더니, 결국은 새 사람을 사랑하게 됐네. 태형이 비릿하게 웃었다. 절 떠난 석진이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줄 알았다. 어쩐지 속이 엉망으로 뒤틀렸다.


그 날 저녁 태형은 저에게 추근덕대던 오메가를 잡아 평소보다 더 거칠게 몸을 섞었다. 태형이 페로몬을 더 풀자 정신을 놓고서는 적극적으로 매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가득 퍼지는 달큰한 냄새. 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민아."

"왜?"




얼굴을 못 본 지 꽤 됐다며 지민과 술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몇 잔을 주고받던 태형이 툭 하고 입을 열었다. 나 저번에 석진이 형 봤어. 문득 흘러나온 말에 지민의 손이 멈췄다. 지민은 태형이 석진과 헤어졌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태형은 주홍색 조명 아래에서 흔들리는 알코올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석진이 형,




"다른 사람이랑 있더라."

"......."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매력적이지 않다더니."




태형이 피식 웃었다. 사귀나 봐. 지민이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입술은 열리지 못하고 다물렸다.



지나간 사람에게 소유욕을 발휘하는 건 쓸모없고 구질구질한 일인데. 게다가 제가 먼저 버렸던 사람이면 더더욱. 태형은 그런 생각을 줄곧 달고 살았지만 머리 한 켠에는 그 때 우연히 보았던 석진의 웃던 모습이 계속해서 떠돌아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석진과 헤어진 태형은 그다지 행복해지지 못했다. 애인을 몇 번 사귀어도 봤지만 다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졌다. 3년이 더 지나서야 태형은 석진을 마주했다. 주차해둔 차 쪽으로 걸어오던 태형이 차에 거의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쏙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한 인영에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진아야!"




다급하게 뛰어온 남자가 아이를 붙든다. 죄송합니다, 제가.. 라고 사과를 건네던 목소리는 태형의 얼굴을 확인하자 끊겼다. 석진은 당황하고 있었다. 태형은 석진이 붙들고 있는 아이와 석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태형아.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아빠, 저 아조씨는 누구에요? 아는 사이에요? 굳은 석진을 이상하게 여긴 아이가 쫑알쫑알 내뱉었을 때서야 태형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빠라고? 태형의 눈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그새 애도 낳았어요?"




태형이 빈정거렸다. 각인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느니 뭐니 그러더니만, 그것도 아닌가 보네요. 차갑게 뱉어지는 말에 석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태형은 말 못하는 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절 올려다보는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말 잘 들으렴. 태형은 굽혔던 허리를 피고서는 석진에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형 생각 몇 번 했는데 정말 괜한 생각이었네요. 이렇게나 잘 살고 있었는데. 애까지 낳아가면서.




"결혼했을 때 청첩장이나 주지 그랬어요. 축의금 정도는 낼 수 있었는데. "

"태형,"

"애나 잘 키워요."




석진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했으나 태형은 주저없이 차 안으로 몸을 밀어넣어 그 곳을 떠났다.



* *



- 형은 내 어디가 좋아요?

- 그냥 다 좋아.

- 그런 거 말구, 하나만 꼽으면.



태형이 석진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물었다. 그러자 석진이 음...하며 잠시 고민하던 석진이 답을 내뱉었다. 음, 그럼...



- 김태형.


결국은 태형 자체가 다 좋다는 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태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릿속은 방금 꾼 꿈으로 가득했다. 둘이 아직 연인이었을 때, 그리고 권태기가 오지 않았을 때의 시절. 속에 무언가가 콱 막힌 듯 답답했다. 가슴을 손으로 치던 태형은 그래도 나아지지 않자 물을 마시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잔을 연달아 마시고 방으로 돌아온 태형은 협탁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핸드폰을 향해 돌아가는 도중 두어 번이 더 울리다 태형이 받아들기 직전에 끊겼다. 확인하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게다가, 연달아서 다섯 번이 와 있었다. 누구지.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떠올려도 이 시간에 급하게 전화할 사람이 없다. 아무튼 다섯 번이나 연달아 전화했을 정도면 한 번쯤은 더 울릴 거였다. 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손에 올려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낯선 번호에게서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울리는 전화에 태형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김태형.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민이었다.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다. 혹시 지금 바쁘냐. 태형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니. 괜찮은데. 답하자마자 지민이 내뱉었다. 안 바쁘면 잠깐 나와, 이야기 할 게 있어.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태형이 이야기한 곳으로 나갔을 때 지민은 이미 술을 한 병 비운 상태였다. 무슨 일인데 불렀어? 태형의 물음에 지민은 말없이 들고 있던 소주잔을 비웠다. 지민의 머리칼은 제 손으로 몇 번 헤집어 놓았던 듯,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계속 기다려도 지민이 말을 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태형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안 말할거면 간다. 그러자 그 때 지민이 툭 하고 내뱉었다.




"너 진짜 개새끼인 거 아냐."

"뭐?"




첫 마디부터가 욕이었다. 갑작스럽게 욕을 들은 태형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하지만 그런 태형을 보는 지민의 눈동자는 더 매서웠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내 욕을 왜 하냐. 심기가 불편해진 태형이 지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앉아. 지민이 손짓했다. 그러나 태형은 우뚝 서서 지민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박지민, 시비 걸려는 거면 안 받아준다. 예전처럼 받아줄 때는 지났어. 태형의 차가운 말을 가르고 지민이 치고 들어왔다.




"왜 그때 그 전화 안 받았어."

"무슨 전화,"

"한 번이라도 받지 그랬어. 너 예민해서 잠 잘 깨잖아. 한 번만이라도 받지 그랬어."




지민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냐며 되물으려던 태형은 일주일 전 새벽에 연달아 걸려왔었던 전화를 기억하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만이라도 받지, 진짜.... 지민의 목소리에는 이제 원통함마저 섞여 있었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태형은 두근거리려는 심장을 애써 짓눌렀다. 다음으로 이어진 말은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석진이 형."

"........"

"죽었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태형은 천천히 되물었다. 지민은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이 제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앉으면서 친 수저가 바닥으로 굴러 소음을 냈다. 지민은 천천히 말을 쏟아냈다. 교통사고였대. 뒤에서 트럭이 들이받고, 앞에 승용차를 박았대. 의자에 박혀있던 철심이 허리를 뚫고 비져나왔다더라. 병원에 이송되기 전, 그 자리에서 죽었대.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누구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더라. 지민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던지 입술에서는 피가 배어나왔다. 태형은 느릿하게 열리는 지민의 입을 바라보았다.




"너였어."

"........."

"너한테 전화를 걸고 있었대, 다섯 번이나, 계속...."

"........."

"왜 안 받았어... 이 새끼야...."




지민이 울분을 터뜨렸다. 너 예전에 나한테 그랬던 적 있지. 석진이 형이 다른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아니야 멍청아, 니가 본 사람 아마도 석진이 형 친형이었을 거다... 애까지 낳아서 잘 사는 것 같다고 했지 개새끼야.... 그거, 니 딸이야.....




어떻게 도착한 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머릿속은 하얬다. 주소를 대고,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택시 기사가 거스름돈을 안 받았다고 부르는 것도 무시한 태형은 아파트로 올라갔다. 알려준 집 앞에 도달한 태형은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낯빛이 어두운 한 남자가 나왔다.




"누구세요?."

"...석..진이 형..."

"석진이 이제 여기 없어요.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 당했어요."




남자는 내뱉고서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태형이 닫히려는 문고리를 붙잡았다. 입에서는 멍하니 말이 나왔다. 진아... 태형의 말을 알아들은 남자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혹시, 김태형?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태형의 입이 다물렸다. 남자는 위아래로 태형을 흝어보더니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것도 잠시 곧이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동생아, 너 정말 대단하다. 작게 중얼거린 남자는 태형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요. 




"석진이가 쓰던 방은 여기에요."

"아......"

"낯짝은 있어서 장례식에 안 온 줄 알았더니만."




태형은 저를 향해 흘러나오는 적대적인 목소리를 들었다. 동생 전화만 받아줬더라도 내가 당신을 싫어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말을 마친 남자는 태형을 놔두고 방을 나갔다.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태형이 천천히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침대, 옷장 등등 저와 같이 살 때와 비슷했다. 석진은 막 어질러 놓는 태형과는 달리 정돈을 잘 해두는 편이었다. 태형은 석진의 흔적들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나갔다. 발걸음을 옮겨 남아있는 흔적들을 따라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태형은 멍한 얼굴을 하고 책상 앞에 다다랐다. 책상 옆에는 가지런히 쌓여진 책들이 있었다. 하나하나 옆으로 치우던 태형의 손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수첩. 그리고 첫 장을 넘겨 글씨를 읽은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그건 일기장이었다.


떠나간 사람, 김석진의.


수첩을 들고 있던 태형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석진의 감정이 세세하게 담겨있을 일기장. 태형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겨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20xx x월 x일


태형이가 늦게 들어왔다. 요즘 들어 계속해서 늦게 들어온다. 오늘도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다. 나는 지금 태형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자야하는데 왜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20xx x월 x일


오늘은 다른 향기를 달고 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신에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하나 찍어왔다. 저 몸 어딘가에 키스마크가 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화를 내야 할 테지만, 나는 화를 내지 못한다. 태형이의 눈빛에서부터 알 수 있다. 태형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버틸 수 있다. 내가 태형이를 사랑하니까.



20xx x월 x일


나는 태형이가 다시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20xx x월 x일


...태형이가 지겹다고 했다. 내 페로몬이, 지겹다고 했다. 


20xx x월 x일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옆에 있고 싶었던 내 마음은 욕심이었나 보다. 내 향기가 태형이를 지겹게 만들면 나는... 안 돼.

 

20xx x월 x일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그게 바로 태형이와 헤어지기 직전에 가졌던 관계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히트사이클이었으니 가능성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형은 태형이한테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내가 말렸다. 태형이한테 임신 사실을 알린다면 그 애는 아마 질식사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차라리 낙태를 하라고 했다. 낙태라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어떻게 태형이의 아이를 죽이겠어.



20xx x월 x일


어쩌다보니 지민이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혹시나 태형이한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시켜놓았다. 지민이는 태형이한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보였지만, 제발 하지 말아줬으면. 그리고 하지 않을 거다. 지민이... 지민이가 아니었으면 태형이랑 못 만났을 수도 있는데. 한 번도 지민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 같아 고맙다고 말을 하니 지민이는 울 듯한 표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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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x월 x일

 

...오늘 태형이를 만났다. 진아를 찾으러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태형이는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 건 줄 안다. 각인하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결혼해 애도 낳았냐며 나에게 화를 냈다. 진아, 네 아이인데... 진아는 태형이가 아빠인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나한테 태형이가 누구냐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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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x월 x일


사실 나는 아직도 태형이를 사랑한다.

 


20xx x월 x일 


가끔씩, 태형이가 너무 보고 싶다. 그렇지만 용기가 없어 연락을 하지는 못한다. 혹시나 전화를 걸었다가 지겹다는 말을 들을까봐. 구질구질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태형의 손은 이제 무척이나 떨리고 있어 수첩을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할 정도였다. 눈앞이 흐려져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태형은 간신히 나오려는 눈물을 삼켜냈다. 그러나 다음 장을 넘겨 쓰여있는 문장을 확인한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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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x월 x일


너는 나를 사랑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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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진아였다. 태형의 옆 모습을 확인한 아이가 총총 들어왔다. 그때 그 아저씨죠, 아빠랑 같이 있던! 물어오는 목소리에는 작은 확신이 차 있다.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태형이 울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본 아이의 얼굴이 덩달아 울상이 되었다. 울어요? 태형은 아이를 따라 스르르 주저앉았다. 아아...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죽을 것 같았다.




"왜 울어요....?"




걱정어린 목소리로 울고 있는 태형을 걱정한다. 울지 마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위로해주려는 건지 태형의 손을 꼭 잡아주며 하는 말이었다. 위로할 때 손을 잡아주던 건, 석진이었다.

 

석진을 꼭 닮은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태형은 울었다. 은은한 장미향이, 공기중을 떠돌아다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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