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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진] 사랑의 대가 上

새벽 두 시가 넘었지만 석진은 아직 자고 있지 않았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지 않는 태형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쯤을 더 기다렸을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침실로 향하려던 태형은 거실에 있는 석진을 발견하고서는 멈춰 섰다.




"거기서 뭐 해요?"

"........."




무감각한 태형의 물음에 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을 더 기다리던 태형은 석진에게서 여전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한숨을 쉬고서는 방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방문 소리, 서늘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집 안. 석진은 눈을 감았다. 조금 전 들어온 태형에게서는 또, 다른 페로몬 향이 났다.




 

사랑의 대가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십년이면 거대하고 웅장한 강산도 바뀐다는데, 하물며 그에 비하면 작고 여린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쉽게 바뀌겠는가. 김태형과 김석진의 사이도 그런 경우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은 식었고 정조차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첫 만남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태형이 석진을 처음 만난 때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한 해가 거의 끝나가는 연말에 태형은 친한 친구들 몇 명과 모여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있었다. 막 달리자는 취지에서 모은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분위기는 자연스레 먹고 죽자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댕그렁, 지민이 결국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 덕에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젓가락이 밑으로 떨어졌다. 

 



"지민이 죽은 거야?"

"........."

"죽었네, 죽었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죽어버린 지민에 대해 호석은 애도를 표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남자들끼리라서 그런지 술먹고 시체가 된 녀석은 이미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취한 사람이 계속 널부러져서 자던가 말던가, 길바닥에서 대자로 드러눕던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취기가 돌고 있었지만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시 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너 이새끼, 잔 빼기 없어. 눈을 부라리며 술을 빼나 안 빼나 한동안 살벌하게 웃으면서 서로를 감시하고 있던 분위기가 흐트러진 것은 낯선 남자 한 명이 술집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지민아? 지민아."

"으으..."

 



아주 자연스럽게 넉다운 된 지민에게 다가가 살살 흔든다. 같은 테이블에서 마시고 있던 사람들도 그런 남자에게 아 형 오늘도 짐짝 하나 데리고 가느라 수고하세요, 하며 농담조로 말을 던지기만 할 뿐이다. 안 그래도 내일 지민이한테 수고비 청구하려고, 하고 웃으며 받아치는 남자를 태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민아, 일어날 수 있겠어?"

"흔들지 마...속 안 좋아..."

 



지민이 하얗게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꿈과 현실을 헤메는 지민에 남자는 한숨을 쉬며 손으로 자꾸 내려오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 바람에 가려져 있던 수려한 이목구비가 온전히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태형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잘생겼다를 넘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긁적이다가 주위를 잠시 둘러보았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저들끼리 술파티를 이어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절 바라보는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태형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흥미가 사라진 듯 다시 지민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지민의 팔을 제 목에 두르더니 들쳐업고 일어났다. 의식을 저 멀리로 날려보낸 지민이 힘없이 남자에게 몸을 기댔다. 그가 일어서는 것을 본 호석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형, 안 바쁘면 한 잔 할래요? 지민이 데려다 놓고."

"미안, 할 게 있어서."

"그럼 어쩔 수 없죠. 다음에 같이 마셔요!"



 

그래, 다음에 꼭 같이 마시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그리고 지민을 업고서 술집을 나갔다.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태형이 물었다.




"형, 방금 저 사람 누구에요?"

"응? 아, 석진이 형?"

 



호석이 입에 남아있던 안주를 꿀떡 삼키고는 대답했다.




"지민이 룸메이트."

 

 



이 세상은 소수의 알파와 소수의 오메가, 그리고 다수의 베타로 이루어져 있다. 베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들은 단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한 사람들도 있대.' 라는 것을 듣기만 했을 뿐이다. 게다가 정말로 몰라도 일상생활에 불편하지 않았기에 굳이 애써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파나 오메가이거나, 혹은 주위 사람들 중에 그에 속한 사람이 있는 경우일 때였다. 태형은 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태형이 알파였기 때문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단지 베타는 향기를 맡을 수 없었고, 오직 알파와 오메가들만 맡을 수 있었다. 어찌보면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과 맞는 짝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셈이었으니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더라도, 자신이 맡는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저의 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진에게서는 희미한 장미향이 났다.


태형이 그 날 석진을 처음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주의 깊게 보았던 이유는, 석진에게서 향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맡았을 때 향이 그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무관심한 듯 하면서도 부드럽고, 어딘가 고귀함이 느껴지는 향. 하지만 그 향은 아주 희미했다. 단지 향기를 가지고 그가 알파나 오메가이거나를 판단하기에는 일렀다. 만일 석진이 정말로 알파나 오메가였더라면 향기는 좀 더 짙게, 상대를 유혹할 수 있을 만큼 흘러나왔을 테니까. 태형은 약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석진이 향수를 뿌리고 나왔다고 판단했다. 태형은 석진이 베타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후에 들은 지민의 말에 따르면 석진은 베타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기를 맡았던 날부터 태형의 코끝에는 장미향이 붙어다녔다.

 


* *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자신의 형질을 발현하는 '각성'의 시기를 거친다. 보통 각성은 유소년기 중반부터 청소년기 초반 사이에 이루어졌다. 증세는 보통 2-3일 전부터 온몸에 힘이 없고 나른하다가, 당일이 되면 심한 몸살에 걸린 것과 비슷하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 날은 꼬박 침대에 누운 채 있어야 했다. 몸이 체질에 알맞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열이 올랐다. 몸에 올랐던 가벼운 열이 내리면 각성은 끝났다. 일어나면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제 고유의 향이 짙게 풍겨왔다.

 

하지만 저것은 모두 일반적인 각성의 과정일 때의 경우다. 각성의 과정을 남들과 다르게 매우 심하게 겪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극소수이지만 각성을 하다가 죽는 사람들도 또한, 존재했다. 실제로 태형은 그걸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눈앞에 떠다니는 형상. 축 늘어진 손, 굳게 감긴 두 눈. 떨리는 손을 뻗어 만졌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열에 시달리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바로 제 형이었다. 태형의 가족은 모두 베타였기에 알파나 오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부모는 단지 감기라고 판단하고, 약을 먹이고 형을 재웠다. 일이 일어났던 것은 바로 그 날 밤이었다. 뭔가가 우당탕 떨어지고 깨지는 소리에 잠을 자던 태형이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잠들어있던 형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져 있었고, 주위에는 시계가 떨어져 산산조각난 유리조각이 펼쳐져 있었다. 태형이 벌떡 일어나 형에게 다가가 흔들며 물었다. 

 



'혀엉, 왜 그래?'

 



하지만 태형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몸을 바로 세운 형의 두 눈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형이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엄마! 아빠!!


태형이 얼굴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바들, 떨리는 형의 손이 무언가 붙잡을 것을 찾고 있었다. 뭐야, 형 왜 이래, 무서워. 온몸이 두려움과 공포로 떨리기 시작했다.  태형의 비명을 듣고 잠을 자고 있던 부모가 재빨리 방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태형아, 무슨 일이야? 여자가 울먹거리는 태형을 붙잡고 다그쳤다. 태형은 손을 뻗어 형을 가리켰고, 여자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더니 충격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여보, 여보!! 태운이가!!'

'태운아, 왜이래. 정신차려봐!!'

 


아버지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년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감긴 눈에서는 여전히 빨간 피가 흘러내렸고, 이제는 쿨럭거릴 때마다 입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태형아, 닦을 것 좀 가져와! 당신은 빨리 응급차 부르고!!'




아버지의 큰 목소리에 태형이 재빨리 몸을 돌려 닦을 만한 수건을 찾아왔다. 태형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니는 전화를 붙들고 울면서 주소를 말하고 있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태운의 입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태형이 아버지에게 수건을 건넸다. 아버지가 빼앗듯이 건네받아 흘러나오는 피를 닦았다. 태형은 떨리는 팔을 붙잡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형, 형... 자그마한 목소리는 불쌍스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전화를 끝낸 어머니가 그들에게 다가와 울면서 태운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가, 조금만 더 힘내렴. 조금만 더. 그 순간, 태운의 목이 힘없이 옆으로 꺾였다.

 



'태운아....?'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소년을 살살 흔들었다. 툭, 이번에는 팔이 힘없이 흔들렸다. 여자가 남자의 품에서 소년을 빼앗더니 얼굴을 어루만지며 계속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얼음장 같아.'




그 말에 남자가 손을 뻗어 조그마한 손을 잡더니 화들짝 놀라 손을 놓았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태형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형의 팔을 건드렸다. 무척이나 차가웠다.

 

부른 응급차는 결국 쓸모가 없게 되었다. 응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형을 품에 안고 오열했다. 후에 형의 죽음이 '각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모는 미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못한 자신들을 저주했다. 그리고 일단 형에게서 각성이라는 것이 나타났으니, 둘째인 태형에게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태형이 가벼운 감기라도 걸리면 무조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다행스럽게도, 태형은 '일반적인' 각성 과정을 거쳤다.

 

 

* *



"야! 김태형!!"


 


절 신나게 부르는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지민이 절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일어나서 대충 눈꼽만 떼었다는 게 티가 났다. 태형이 피식 웃으며 지민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너도 이 층이였냐? 왜 말 안 했어."

"나는 너 기숙사 신청했다는 것도 몰랐거든?"




지민과 투닥거리며 태형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옆에서는 하품을 한 번 쩍 한 지민이 투덜거렸다. 다음주가 개강이라니 정말 안 믿겨져. 방학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띵, 하고 엘레베이터 음이 경쾌하게 울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지민의 등을 찰싹 내려쳤다.




"악!"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이 자비없는 룸메 같으니."

 


 

지민이 뒤로 돌아 절 친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석진이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석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지민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지민도 할 말이 있는지 투덜댔다. 내가 몇 분이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이정도면 많이 기다려준 거지. 지민의 말에 석진이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도로 입을 닫고서는 찌릿 지민을 노려보았다. 석진은 무언가를 손에 들고 흔들고 있었다.

 


 

"그래, 날 버려두면서 지갑도 버려두고 나가셨겠다?"

"어? 아! 내 지갑!"

 



지민은 제 눈앞에서 흔들리는 지갑을 보곤 빛의 속도로 낚아챘다. 졸지에 손이 허망하게 비어버린 석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눈치를 슬슬 보던 지민이 석진의 팔을 잡으며 눈을 휘었다. 아 형, 내가 사랑하는 거 알죠? 뭐라는 거야. 태형은 지민과 아옹다옹하는 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미한 장미향이 또다시 코끝에 떠도는 기분이 들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태형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나중에 봐! 우린 장보러 가야 해서!"

 



크게 소리치곤 석진과 함께 사라진다. 태형은 천천히 걸으면서 손등을 들어 제 코에 가져다 대었다. 새삼스럽게 제 향을 맡으려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역시, 아닌가. 태형은 손등을 원래대로 내렸다. 제 향은 조금은 무거운 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맡았던 향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했다. 그런데 왜 계속 희미하다 못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향이 신경쓰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며, 태형은 뒷문을 나섰다.

 




태형은 벽에 기댄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내일 집에서 올라온다고 연락을 받았던 터라 옆자리 침대는 비어 있었다. 태형이 빈 침대를 흘끗 바라보다가, 핸드폰 액정에 표시된 시간을 확인했다. 1:41분. 잘까? 원래 늦게 자는 터라 잠은 별로 오지 않았지만 할 일도 딱히 없는 터라 벽에 기댄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폭, 하고 침대 반쯤 파묻힌 태형은 누운 상태에서 다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1:42분. 어쩔까. 태형은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발신인을 확인했다. 지민이었다.

 

분명 아까 술 마시러 나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지금까지 마시고 있는 건가. 태형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덟시쯤에 나갔으니 계속 먹고 있었다면 정상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박지민의 술버릇은 좀 고역인 편이었다. 완전히 맛이 가면 조용히 잠을 자지만, 정신이 끊기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상대에게 사랑고백을 한다. 내가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이? 친구야 정말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하며. 내용은 좋았지만 한시간 동안 이어지는 말을 들어주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액정을 노려보던 태형이 전화를 받았다. 정말 술먹고 취해서 전화한 거면, 바로 끊는 수밖에. 

 



"여보세요?"

- 태형이야? 태형아 너 지금 기숙사야?



 

멀쩡한 목소리였다. 꼬부랑대는 발음이 아니라 명확한 발음이었기에, 태형은 일단 안심했다. 취하고 전화한 건 아니었군. 어, 기숙산데 왜. 그러나 곧이어 들리는 지민의 다급한 목소리에 누워 있던 몸을 바로 했다.

 



- 야 좀 도와줘, 진짜 어떻게 해....

 



심각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왜, 뭔데 그래? 태형이 덩달아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 빨리 내 방으로 와 줘, 제발, 형! 석진이 형, 정신 차려봐요. 응?




다음 말을 듣자마자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옆 방으로 향했다. 이러다가 형 죽을지도 몰라, 어떡해....

 

 


문을 열자마자 지독한 장미 향이 코끝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낸 태형은 숨을 참고서 방 안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어쩔 줄 몰라하는 지민과 침대에서 떨어져 온몸을 비틀어가며 끙끙거리고 있는 석진의 모습. 괴로워하는 모습을 발견한 태형이 석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진한 향기가 풍겨와 미칠 것만 같았다. 끙끙거리던 석진이 손톱을 세워 침대를 바드득 긁자 너무 세게 뜯은 탓에 연약한 손톱이 부러져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석진의 손을 잡아채 바라보곤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지민은 태형이 가까이 다가오자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형 왜 이래?! 나 들어왔을 때부터 이랬어..!"

 


 

술기운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무거운 몸을 하고 기숙사에 간신히 들어오자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비척비척 걸어오니 김석진이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발악하고 있었다. 흔들어 괜찮냐고 물어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온몸이 불덩이여서 곧 증발해버릴 것 같기까지 했다. 덜컥 겁이 난 지민은 제대로 된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었다. 받은 사람이 태형이라는 것을 알자 다급하게 지껄여댔다. 기숙사야? 나 좀, 형 좀 도와줘.

 

태형이 석진의 어깨를 잡고 몸을 바로 일으켰다. 그러자 석진이 침대를 긁던 손톱을 세웠다. 순간적으로 손등을 아프게 파고드는 손톱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좀 해 봐!!"



 

지민은 옆에서 방방 뛰어댔다. 태형은 입술을 꾹 깨물고 헐떡이는 석진을 바라보았다. 본능이 태형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것은 '각성'이라고. 왜 이렇게 뒤늦게 각성이 온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늦어봐야 청소년기에 다 끝났어야 했을 터인데. 게다가 일반적인 각성이 아니었다. 태형의 눈앞에 예전의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피, 입에서 나오는 핏덩이. 차갑게 식은 손.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형, 내 말 들려요? 정신 좀 차려봐요!"


- 태운아, 왜이래. 정신차려봐!!

 



두 번 다시 그 경험은 겪고 싶지 않다. 태형이 붙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사실 이걸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각성이지만, 이것은 좀 더 다른 각성이었다. 자신이 알파로서의 각성이었다면, 김석진은. 태형이 입을 열었다.

 


 

"박지민, 조용히 하고 휴지 좀 가져와봐."

 


 

침착한 태형의 목소리에 덩달이 조금 침착해진 지민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태형이 손을 들어 석진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냈다. 움찔거리는 몸이 부자연스럽다. 지민에게서 휴지를 받아든 태형이 피로 물든 석진의 손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지민아, 너 내가 알파란 거 알고 있지.

 



"어. 예전에 알려줬잖아. 근데 ㅁ...."

 


 

갑자기 그걸 왜 말하냐고 물으려던 지민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설마.




"잠시 나가줄 수 있어?"

".........."

"물론, 동의없이는 안 할 거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지민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움씰대면서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 하고 닫히는 문에 태형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천천히 페로몬을 풀자 버둥대던 석진의 몸이 조금 잦아든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뒤로 쓰러지면서 머리를 탁자에 박으려는 석진을 가까스로 막은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발버둥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온몸은 불덩이였다. 태형이 힘없이 꺾이려는 석진의 얼굴을 강하게 붙잡았다.

 

 


"형, 난요. 예전에 이와 비슷한 일 겪었어요."




눈앞에 스쳐지나가는 핏빛 장면을 외면한 태형은 결심했다. 그리고 굳은 눈빛으로 석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이 결정해주면 돼요. 나를, 받아들일 지 아닐 지."

 

 


태형의 말에 석진이 힘없이 눈을 떴다. 울 것만 같은 눈동자가 태형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감겼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자 애원이었다. 석진의 말을 읽어낸 태형은 주저없이 고개를 숙여 석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각성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 때는, 강제적으로 각인시켜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우성 알파, 우성 오메가. 우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 열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혹은 열성 알파와 열성 오메가. 차이가 크면 클수록 각인이 되기에는 더 쉽다고들 했다. 하지만 대부분 각인까지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일단 일반적인 각성에는 각인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각인은 비인간적이라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알파든 오메가든 일단 한번 각인되면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강제적으로 몸에 상대의 이름을 새기는 행위였다. 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각인된 상대를 기억했다.


석진의 각성은 뒤늦게 발현된 터라, 미처 대처하지 못했던 각성이었다. 살리기 위해 태형은 석진을 안았고 결과적으로 석진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태형은 우성 알파였고, 석진은 열성 오메가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로 더 심하게 각인되었다. 그 결과로 석진은 무의식적으로 태형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전보다는 뚜렷하지만 열성이라서 그런지 남들보다는 강하지 않은 은은한 장미향이 공기중을 떠돌아다녔다. 태형은 그 향을 좋아했다. 아무도 맡을 수 없는, 나를 위한 향기.

 

나만을 위한. 


태형과 석진의 사이에는 항상 지민이 있었다. 어색한 사이를 중재해줄 수 있는, 그런 고맙고도 불편한 존재. 그러나 어느 날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지민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석진은 태형에게 말을 잘 걸고, 잘 웃게 되었다. 대학 내내 두 사람은 같이 다니다가 졸업하고서는 동거를 시작했다.

 


* *



처음에는 그저 좋았다.


태형이한테서 흘러나오는 무거우면서도 시원한 향기.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갑자기 진한 향기가 날 때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면 시선의 끝에는 항상 태형이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자신의 향은 태형이의 짙은 향에 묻혀 나지 않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태형이의 향이 더 좋았으니까. 이걸 두고 각인의 효과라고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태형을 톡톡 두드렸다.

 



"태형아."



 

그러자 거의 책상으로 고개를 쳐박으려던 태형이 흠칫 놀라며 일어나다 무릎으로 책상을 박았다. 아야야... 신음하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했다. 아... 석진이 형. 졸려? 아뇨. 태형이 잽싸게 대답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눈에는 졸음이 가득하다. 태형이 붙잡고 있는 과제를 슥 확인한 석진이 눈을 깜박였다.




"한 교수님꺼?"

"어, 네. 어떻게 알아요?"

"들었던 적 있거든. 주제는 어려운데 그 교수님 요구하는 게 몇 가지 있어서, 그것만 지키면 학점 따는 건 쉬워."

"그렇구나."

"뭐하면 도와줄까?"

"정말요?"




별 감흥 없이 주억거리던 태형의 말에서는 환호까지 붙어나왔다. 석진은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집어삼켰다. 응, 도와줄게. 많이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럼 형이 도와주면 제가 밥 살게요. 아냐, 뭐 바라고 도와주는 건 아닌데. 석진이 거절하는 말을 뱉자 태형이 빠르게 잡아챘다.



 

"아뇨, 제가 사고 싶어서 그래요."




석진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리고서는 입 꼬리를 올리며 씩 웃는다. 석진은 잠시동안 태형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사준다면 고맙지. 좋아요! 그럼 일단 밥부터 먹고 시작할까요? 점심 시간인데.




"혹시 형 점심 먹었어요?"

"아니, 아직."

"다행이다. 그럼 같이 먹어요."




시원하게 웃어보인 태형이 자리를 정돈하곤 일어났다.


재잘거리는 태형의 옆을 따르며 석진은 엷게 미소지었다. 태형의 옆에 있으니 머리가 더 맑아지는 듯 했다. 다른 사람들의 향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석진에게 있어서 태형의 체향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었다. 석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실제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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