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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진] 그녀석이 돌아왔다 下

외국에서 오래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거긴 인사로 뽀뽀도 하는 곳이라니까. 김태형은 그런 짓을 하고도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나를 대했으므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일에 나만 의미를 부여하면 바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행동은 그러지 못했다. 김태형을 볼 때마다 괜히 의식이 되고 손등을 핥던 게 자꾸 떠올라서, 바보같이 피했다. 다행히 김태형은 나의 이상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먹을 게 떨어졌으니 같이 장보러 나갈래? 하고 묻던 말에는 급히 마감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곤 피했다. 김태형이 집을 나가자마자 노트북을 덮고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떡하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십 년도 전에 포기한 마음이었다. 발로 짓밟아서 다시는 피어오르지 않을 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조그마한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잠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김태형을 다시 봤던 첫 날에도 어차피 포기했던 마음이라 이제는 저녀석에게 심장이 뛰지 않을거라고 자신했었는데. 쿵, 쿵, 쿵, 일정하게 뛰는 심박수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김석진, 너 어떡할래.​ 김태형은 아무렇지 않을 텐데 나만 유난떨고, 피하고. 다시 생겨나기 시작한 마음에 녀석에게 또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처받을 나보다, 김태형이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챌까봐 두려웠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들키면 김태형이 싸늘한 눈으로 날 경멸하듯 쳐다볼 것 같아서. 


"뭔데요."



갑자기 불러내고.

윤기가​ 망고주스를 휘휘 저으며 물어왔다. 윤기는 내가 게이라는 것을 밝히고 나서도 날 피하지 않은 단 한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커밍아웃을 한 적은 몇 번 있었으나, 앞에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래도 나를 이해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헤어지자마자 곧바로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윤기는 '그래요?' 하고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왠지 그럴 거 같았어요.'

라고 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연락이 잘 되고 있었다. 나의 성적 취향을 유일하게 이해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윤기에게 몇 번정도 연애상담을 구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소꿉친구가 있었는데, 한때 그 친구를 너무 좋아했었다. 연애감정까지 느꼈지만, 고백하면 친구로도 남지 못하게 될 것 같아 힘들게 포기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 친구와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포기했던 마음이 다시 생기려고 하고 있다고.


"착각인거 아는데, 그런데도... 자꾸 기대하게 된다?"

"........."

"답 없지, 나." 

기운없는 목소리로 가볍게 웃어보였다. 윤기는 잠시 복잡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다가, 내게 질문했다.

 

"착각할 만한 짓을 한다면서요. 그럼 그게 형이 좋아서 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모르겠어."

"몰라?"

"옛날부터 우리 사이가 남다르긴 했거든. 서로를 유달리 챙기고, 그래가지고."


지금 하는 일도 예전 기억에 비추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하니 윤기의 미간이 좀 더 찌푸려졌다.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윤기는 윤기대로 생각을 정리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시킨 음료수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그냥 돌아가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당사자인 나도 김태형의 의중을 몰라서 헷갈리는데, 제 3자인 윤기가 알까 싶었다. 비록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시간을 내준 윤기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참이었다. 한 가지 질문이 불쑥 머리를 스쳤다.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주스를 들이키던 윤기에게 물었다.


"윤기야, 그런데 말이야."

"네?"

"그.. 음료수를 손에 흘렸었는데 말이지. 휴지 갖다달라고 했는데도, 손등에 묻은 걸 핥아먹는 건, 뭐야?"


내 말을 들은 윤기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형, 그런건 연인사이도 안 해요."





그녀석이 돌아왔다


 

그럼 우리는 대체 뭐지? 마지막으로 들은 말 때문에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윤기가 툭 던져놓은 돌이 파문이 되어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김태형의 행동을 다시금 곰씹자 집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뜻이냐고? 그러게, 무슨 뜻일까. 머리를 제멋대로 헝클어뜨리며 자작을 했다. 혼자서 술병을 여럿 비워내자 어느덧 주변도 어둑어둑해졌다. 무슨 뜻일까 정말... 나는 약간 취한 상태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 술 마셨어? 후. 한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려왔다.

​김태형은 답 없는 나를 부축하며 침실로 데리고 갔다. 김태형의 판판한 어깨에 기대어 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는 왜 이토록 나한테 친절한거야. 김태형이 침대위에 날 앉혔다. 괜찮아?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올리며 물어오는 말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 마실래?"

대답없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김태형은 내가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시금 한숨을 쉬고선 물 가져올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려는 김태형을 바라보다가 난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멋대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왜 자꾸 착각하게 해?"

나가려던 김태형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김태형은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들어 김태형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네 행동이, 나더러 착각하게끔 만들어."


 

질러버렸다. 폭탄 아닌 폭탄을 내뱉고 난 눈을 꾹 감았다. 차마 녀석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 질문을 이해하긴 했을까. 알아들었으면 무슨 대답을 할까, 어떤 대답을.....

 



"왜 착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적을 뚫고 들려온 대답에 눈을 살며시 떴다. 김태형은 여전히 나를 주시한 채 말하고 있었다. 피식, 그가 살짝 웃은 것도 같았다. 물을 가지고 돌아온 김태형이 물을 마시는 내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빈 잔을 들고 나간 김태형이 자라며 방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두운 밤이 온전히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참동안이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착각이라고 생각하냐는 말이, 무슨 의도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 날 이후로, 김태형과 나 사이에는 조금 어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 쪽이였다. 김태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했다. 나는 저번처럼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가가지는 않는 애매한 행동을 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노트북을 하고 있을 때면, 김태형은 불쑥 뒤에 나타나서 뭐하냐며 묻곤 했다. 지극히 평범한 행동인데, 귀에 닿는 숨결이 어쩐지 야릇해서 난 그때마다 숨을 멈춰야 했다.

나는 식사를 하는 김태형을 훔쳐보았다. 젓가락짓을 하던 김태형이 날 흘끗 쳐다보았다. 나는 바로 시선을 밥그릇으로 내렸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콩닥거렸다. 때때로 난 입이 근질거렸다. 당장이라도 김태형의 멱살을 붙들고 왜 착각이라고 생각하냐는 말이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다면 너는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냐고, 그렇게 소리쳐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못할 걸 잘 안다. 어린 시절에도 수없이 생각하며 포기하던 그때처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 *


 

1월에 내리는 비는 유달리 차다. 눈이 되지 못한 물방울들이 대신 내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음물을 맞는 듯 시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는 그렇다. 아침 늦게부터 이어진 비에 하늘은 계속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나는 김태형이 만들어 준 파전을 먹으며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속에서는 주인공이 우산 없이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왠지 주인공이 나 같았다. 가지 마. 주인공이 흐느꼈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부우우웅. 탁자에 놓아둔 핸드폰이 한 번 진동했다. 문자인줄 알았던 진동음은 몇번이나 울렸다. 옆에 나란히 앉아 보던 김태형은 소음이 거슬렸는지 입을 열었다.



"전화 안 받아?"

"음."

못 이긴 척 핸드폰을 집어들었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수신거절하지도 않았다. 버튼을 눌러 진동을 끄고 전화가 끊길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비록 발신인의 이름은 뜨지 않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한 때 연락처에 저장되었던 사람이었지만 한 달 전에 내 손으로 지워버린 사람이었다. 얼마 전부터 몇 번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받지 않았다. 김태형이 물을 마시며 물었다.



"아는 사람?"

"이제는 아니야."

나는 핸드폰을 엎어놓으며 대답했다. 내 말을 들은 김태형은 묘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지 않고 영화에 집중했다. 별 것 없는 내용인데도 관심있는 척 열심히 봤다. 말을 피하려는 내 의도를 알아챈 건지, 김태형도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몇 시간동안 영화에 집중한건지 몰랐다. 티비에서 나오는 빛으로만 의존하며 보느라 안그래도 안구건조증이 있는 눈이 몇 배는 더 뻑뻑해져서 그만 쉬기로 했다. 나는 서서히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영화를 뒤로 하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밖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어두웠던 밖은 더 어두워져 있었다. 잔잔한 로맨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몹시 피곤했다. 김태형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대사와 함께 섞여나왔다.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필요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석진아, 자?"


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아니..... 대답하기조차 귀찮아서 간신히 입을 움직였다. 피곤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캉하고 따뜻한 게 입술에 닿아왔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김태형이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입술을 열고 체온이 높은 혀가 입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정신이 없어서 멍청하게 키스를 받고 있던 나는 녀석의 가슴을 팍 밀어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가빴다.



"......"

"석진아,"

김태형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손을 뻗었으나 곧 거두었다. 아마도 내가 울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자세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서러움과 놀라움과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감정이었다. 머리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왜? 왜? 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김태형이 뭐라 말하기 전에 집을 뛰쳐나왔다.



밖은 몹시 어두웠고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집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퍼붓는 빗속을 뚫고 나는 정처없이 달렸다. 달릴 때마다 흙탕물이 온통 옷에 튀었다. 마른 옷이 빠른 속도로 젖어갔다. 울면서 달리던 나는 점점 발걸음을 멈추다가, 우뚝 서서 엉엉 울었다. 빗물과 섞인 내 눈물이 형편없이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아팠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왜 키스했냐고 물었어야 하는데. 그 순간마저도 김태형의 입에서

'미안, 실수였어.'

라는 대답이 들려올까봐 묻지 못한 내가 너무나도 바보같았다. 똥멍청한 김석진.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와서 사람이 나다니지 않는 게, 그래서 초라한 내 모습을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김석진?"

머리를 따갑게 때리던 비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계속 울었다. 예전의 날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강한 힘이 억지로 내 손을 떼어냈다. 고개 좀 들어봐요, 석진이 형. 나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싫어. 김남준은 굳이 턱을 들어올려 질질 짜는 내 얼굴을 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형 울어요?"

"보지 마...."

"왜 울어. 누가 울렸어."

웃겼다. 그런 말을 내뱉을 자격이 없을 사람이, 나더러 누가 울렸냐고 묻는다.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통보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든 사람이 지금와서 내가 상처받았나 걱정했다. 내가 우는 것 가지고 그런 표정을 보일 사람이었으면, 왜 그때 헤어지자고 했는데?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빨개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김남준은 빗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내 머리카락을 떼어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이제와서 왜.



"이제와서 왜 이러는데."

"......"

"너, 여긴 왜 왔어."



방금 전 울어서 목소리가 잠겼지만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다. 왜 왔냐는 질문에, 만일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말한다면 나는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김남준은 거절당한 손을 내려 주먹을 꾹 쥐더니,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들려온 말은 나를 폭발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형, 미안해요. 그 때는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고 나는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악에 받힌 듯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댔다. 안그래도 혼란스러운 머리에 김남준까지 만나서 몇 배로 복잡해진 감정이 들끓어올랐다.



"미안해? 그래, 미안하겠지! 그런데 미안하면 다야?!"

"석진이 형,"

"난 니가 그때 그렇게 통보하고 나서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했어. 우리 연애는 순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헤어지자고 했을까."

"난,"

"내가 너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나. 3년간의 시간이 그토록 허망하게 끝날 수 있나."

"......."

"나는 꽤 진지했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터지고 말았다. 너는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아냐, 난 아니라고...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없이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 왜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힘든 걸까.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왔다. 우산 밖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타닥거리며 날 놀렸다. 김남준이 미웠다. 이렇게 찾아와서까지 미련을 끊지 못할 거면 왜 나를 버렸어. 김태형도 미웠다. 너는 왜 예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날 힘들게 해... 김남준이 멈칫거리며 입을 열려 할 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신이었군?"

비에 온통 젖어서 차가워진 내 몸을 따스히 덮어주는 옷깃. 주저앉아있던 나를 일으켜 제 품에 안는 몸짓. 그리고 내 어깨를 강하게 감싸오는 손.



"그때 석진이가 울었던 이유가."

"....그쪽은,"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다시 그런 기회를 얻지는 못할 거에요."


 

고개를 돌려 김태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김남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강한 눈빛이었다. 우산을 쓰고왔음에도 반쯤은 젖어버린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신고 온 신발은 슬리퍼였다. 한겨울에, 비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슬리퍼라니. 나는 다시 고개를 올렸다. 김남준은 입술을 꾹 깨물며 김태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내가 옆에 있으니까."

어깨를 더욱 강하게 잡아오는 힘이 느껴졌다.

김태형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빗 속을 뚫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내내 김태형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화를 낼 사람인 나보다도 더 화난 모습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김태형은 우산을 내팽겨치고 나한테 화를 냈다.



"미쳤어? 우산도 없이 뛰쳐나가다니, 감기걸리려고 작정했어?!"

화를 내기에는 조금 이상한 방향이었다. 하지만 김태형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네가 왜 화를 내, 화를 낼 사람은 나 때문인데. 방금 전 김남준에게 했던 말도 웅웅 재생되는 것 같아서 나는 버럭 소리쳤다. 젖어서 협박조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크게 소리쳤다. 그러는 너는!!

"그러는 너는! 왜, 왜 나한테 키스했는데!!"

"좋으니까!!"


 

쿵. 벼락이 친 듯 강렬한 대답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우는 것도 멈춘 채,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형이 벽을 치며 울분을 토해냈다.

"​김석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다, 왜!!"

고해성사를 하듯 토해내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니가,날,좋아한다고? 김태형은 계속 소리쳤다.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끄집어내서 나더러 봐달라고 들이밀고 있었다.

"내가 왜 그때 말도 없이, 간 줄 알아?"

우리 사이에서 금기였던 그 사건을, 지금 이 순간, 녀석은 입에 올리고 있었다. 김태형은 이를 악물었다. 나는 헐떡이는 숨을 참고서 쏟아지는 김태형의 말들을 들었다.


"너한테 갑자기 고백할까봐, 도망친거야."

"........"

"내 사랑은 잘못된거다, 나는 이걸 죽여버려야만 한다. 그렇게 수없이 되새겼는데도 안 되더라. 그럴수가 없었어, 없었다고."

"........"

"왜 돌아왔냐고?!"

"........."

"너랑 사랑하기 위해서."


 

김태형은 쉼없이 몰아치던 말을 마지막으로 내뱉곤, 숨을 몰아쉬었다. 들썩이는 가슴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너랑 사랑하기 위해서. 방금 내뱉은 말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나는...나는.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김태형에게 달려들어 키스했다.



빗물에 젖어서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벗겨내기 위해 손을 바르작거렸으나 잘 벗겨지지 않았다. 딱 달라붙은 옷 덕에 서로의 몸이 한층 더 가까워졌지만 맨살을 원했다. 나를 단단하게 안아줄 그의 뜨거운 온기를 원했다. 생각만큼 잘 벗겨지지 않아 앓는 소리를 내는 나를 보고 김태형은 잠깐만, 하고서 떨어지더니 한번에 옷을 벗어냈다. 김태형은 며칠간 굶주린 짐승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런 김태형에게 나 또한 정신없이 응했다. 비에 젖어 추위에 달달 떨렸던 몸은 마주한 온기로 인해 점차 떨리지 않게 되었다. 여린 입속을 난폭하게 침입한 김태형은 혀를 거칠게 물고 빨기를 반복하다가 숨이 막힌 내가 바르작거리자 부드럽게 옭아맸다. 황홀했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일인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가 맛보았다던 금단의 과실조차 이보다 더 달콤하진 않았을 것이었다. 김태형이 입술을 뗄라치면 내가 달라붙었다. 잠깐이라도 떨어지기 싫었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을 보상받을 수는 없더라도, 앞으로 있을 시간까지 낭비하기는 싫었다.

허리를 쓸고 지나가는 김태형의 손가락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몸을 뒤틀었다. 크지만 세심한 손은 내가 어디를 느낄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예민한 곳을 핥는 혀에 나는 신음을 흘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다리를 벌리고 여린 허벅지에 잇자국을 내는 행위마저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자꾸만 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신음을 참았다. 그러자 다리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김태형이 위로 올라오더니 내가 신음을 참지 못하도록 손가락을 이 사이에 끼워넣었다. 



"아,"




엉덩이골에서 주춤대던 손가락이 쑥 하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내벽을 수축시켰으나 이내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한개였던 손가락은 두개, 세개로 늘어나며 내벽을 놀리듯이 쿡쿡 찔러왔다. 서툰 손짓에 나는 그가 이 행위가 처음임을 알아챘다. 괜찮을까, 나는 처음이 아닌데 괜찮은 걸까. 잡념과 걱정이 머릿속에서 퐁퐁 피어났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손가락이 쑥 빠져나간 순간 사라지고 말했다.



"집중해, 김석진."

흥분해서 평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와 빗물처럼 질척이는 목소리가 와닥닥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집중하기로 했다. 김태형은 빗물과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허리가 조금 들리는 느낌이 났다. 엉덩이골에 열기를 띈 무언가가 천천히 비벼지는 느낌도 났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다. 곧이어 몇 번 경험했었던 아픔이 느껴지고,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내 안에 들어온 김태형은 내가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건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곧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악, 절로 나오는 비명을 꾹꾹 눌러담으며 나는 김태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서툴기만 한 몸짓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정신도 어딘가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태형아, 김, 태형, 아, 태ㅎ, 아으... 이름들이 잇사이로 힘없이 빠져나갔다. 나는 김태형의 이름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마냥 쉼 없이 불러댔다. 김태형은 섹스에 미친 사람처럼 나를 정신없이 탐했다. 욕정에 멀어 번들거리는 눈조차도 미치도록 섹시해서 그의 입술을 찾았다.

"키스, 해, 줘..."

쾌감에 달달 떨면서 애원했다. 그러자 곧장 입술을 집어삼킨다. 키스를 하고 떨어진 입술이 내 귓가에 길게 신음했다. 태, 형아. 맥없이 흔들리며 그의 귓가에 내뱉었다. 더, 더, 더 세게....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가 이마 위로 떨어졌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만큼 가까이 닿아있는데도 더 가까이 닿고 싶어서 덜덜 떨리는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한껏 감았다. 쾌락과 고통이 반쯤 섞여버려서 내가 내는 신음이 좋아서 내는 소리인지 아파서 내는 소리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매달려서 입술과 허릿짓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계속 입술을 깨물자 김태형이 나를 들어올려 제 어깨를 코앞에 가져다댔다. 입술을 깨무는 대신 제 어깨를 깨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김태형은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나를 몰아붙였고, 나는 그가 의도한대로 반사적으로 어깨를 콱 깨물 수밖에 없었다. 세게 깨물어서 분명히 아팠을 테지만, 김태형은 아픈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코 끝이 서로 부딪히며 입술이 비벼진다. 김태형은 내 손을 잡고선 점점 빠르게 밀어붙였다. 절정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김태형이 허릿짓을 멈추고, 숨이 잦아들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김태형은 다시 입술을 찾아왔다. 가벼운 입맞춤이 날 흝고 지나갔다. 그렇게 입맞춤을 한 김태형은 나를 꼭 껴안았다. 단단한 몸 사이에 갇힌 채, 나도 등을 마주안았다.

빗물투성이의 섹스를 하고 난 우리들은 엉망이 된 바닥을 대충 닦아놓고는 그보다 더 엉망이 된 몸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몇 번이고 주저앉으려던 날 김태형이 부축했다. 나는 병 주고 약 주냐며 타박했지만 김태형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망막에 맺혀들어서, 나도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좁은 샤워실 안에 들어간 우리들은 또 유치하게 거품을 내어 서로의 몸에 묻히면서 놀았다. 워낙에 씻는 공간이 좁았던 터라, 제 딴에는 자기가 빨리 씻고 내가 편하게 씻기 위해 자리를 비켜주려는 눈치였으나 나는 김태형을 순순히 내보내기는 싫었다. 김태형이 비눗기를 다 씻어내면 내가 다시 거품을 묻히고, 또 씻어내면 묻히고. 김태형은 한동안 웃으면서 받아주다가 나중에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는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내게 다가왔다.



"너 자꾸,.."

까지 들은 나는 김태형의 입술을 물어 이어질 뒷말은 낼름 삼켜버렸다. 내 앞에서 왜 짜증을 내, 이럴 시간에 사랑이나 하자.

뜬금없는 데에서 동해버린 난 김태형을 끌어당겼고, 그런 나의 수에 말려들어간 그는 한번 더 발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기 때문에 자꾸 미끄러지려는 손을 겹쳐잡은 김태형이 내 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산 채로 잡아먹히는 기분에 나는 몸을 파드득 떨었다. 접합부에서는 계속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욕실 안이라서 그런지 소리가 더 크게 들려 미칠 것 같았다. 청각적인 자극에서 벗어나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거울 안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하얀 김이 서리긴 했지만, 섹스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민망했던지라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김태형은 내가 뭘 봤던건지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고개를 돌리는 내 턱을 붙잡아, 거울을 보게끔 돌려놓았다. 물기젖은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석진아, 네가 먼저 시작한거잖아.

 


오랜만에 가진 관계에 허리가 욱신거렸다. 천천히 눈을 뜬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아직 자고 있는 김태형이었다. 찰랑. 손을 뻗어 김태형의 머리칼을 살살 만져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면서 내려왔다. 이마, 코, 입. 말캉한 입술을 만질거리고 있을 때즈음에는 어느 새 잠에서 깬 김태형이 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미안, 깼어?"


 

나는 서둘러 손을 치우려 했지만 김태형은 피하려는 손을 잡아 피고서는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느른한 눈동자에 가슴이 달아올랐다. 입꼬리를 슬쩍 올려보이는 얼굴도. 뒷목이 끌어당겨져 김태형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아 잠깐. 나는 김태형을 떼어내고서는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키스하면 단내 나."

그러자 피식 웃는다.

"무드 없긴."

안 나. 그렇게 말한 후 내가 어찌할 새 없이 입술을 물어버린다. 안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에 나도 잠시동안 들었던 걱정은 날리고 김태형의 혀를 따라가고 있었다. 말했던 대로 그런 거 따위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했다. 아, 좋아. 나는 웃으며 생각했다.


그녀석이 돌아왔다. 마침내 내 옆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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