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hort

[뷔진] 그녀석이 돌아왔다 上

* 전 장르 리메이크 버전입니다


 



세상이 춤을 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비틀거리는 것이었지만.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있는 힘껏 찌푸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알코올 냄새가 푹푹 올라오고 머리도 띵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과음을 한 것 같았다. 염병, 나이 먹으니까 몸도 예전처럼 술이 잘 안받어. 20대 초반에는 완전 퍼마셔도 다음날 멀쩡했는데 지금은 소주 두 병밖에 안 마셨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이다. 괜시리 서러워져서 코를 훌쩍였다. 어디서 기인한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뜬금없는 서러움이었다.



"거지같은 내 인생."



나는 온 세상의 우울함이란 우울함은 다 들러붙은 듯이 중얼거리며 엘레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맥없이 층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띵 하고 정겨운 소리가 들리자 나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엘레베이터에서 내렸다. 이 외로운 세상에서 내가 갈 곳은 내 집이지, 아무려염. 나는 다시 한번 찡해져오는 코를 매만졌다. 그러다 멈칫했다. 집 앞에, 커다란 검은 물체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저거 뭐야. 너무 무서워서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묻지마 범죄인가? 술에 취한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수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시커먼 형제가 입을 열었다.


"지금 오냐구... 푸엣취이!"


​우렁한 재채기 소리와 함께 앞머리가 들썩인다. 그 바람에 꺼졌던 센서가 다시 켜지며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코를 한 번 슥 훔치고서는 나를 향해 씩 웃어보이는 잘생긴 남자. 그게 필름이 끊기기 전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녀석이 돌아왔다





정신이 들자마자 머리가 깨질 정도로 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만일 머리를 탈부착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떼어내고 싶을 정도로 심한 두통이었다. 어제 뭘 했을까를 떠올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필름이 아주 깨끗하게 끊겨진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또 오만가지 진상을 부렸겠지. 진상진, 이라는 별명을 상기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개다, 개. ...이 다짐도 몇 번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술을 먹은 다음날에는 항상 두통에 시달렸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했다. 해장할 게 남아 있으려나. 냉장고를 언제 열어봤나, 기억을 더듬으며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본 거실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야 저건.​

낯선 남자가 소파 위에 구겨져서 자고 있었다. 심히 긴 다리가 잔뜩 구겨져 있어 보기만 해도 내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저거 누구냐고. 혹시나 해서 옆에 있던 도자기를 들고 자고 있는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여차하면 쳐서 기절시킬 생각이었으나, 남자의 얼굴을 보니 그건 너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존 미남. 이목구비가 모두 뚜렷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한마디로, 존잘.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어제 이 사람을 낚아서 들어왔나? 였다. 하지만 허리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다음에는 혹시 내가 술에 취해서 옆집에 들어왔나? 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여기는 내 집이 맞으니 그것도 아니고. 멘붕 파티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즈음, 잠에 취해있던 남자가 부스스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도자기를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눈이 부시는지 미간을 슬풋 좁혔다. 존나 잘생겼다. 아니 김석진 미친놈아, 정신차려.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날 보고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히 웃었다.

"석진이당.​"

"...누구...세요?"




분명히 바보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나를 알고 있다는 듯 친숙하게 이름을 말해오는데 나는 정말로 저 남자가 기억속에 없었다. 그러자 남자가 뒷목을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왜 모른척 해?




"저기...저는 정말 모르는데요."

"나 정말 기억 안 나?"

"네...누구세요...?"



모른 척이 아니라 정말 몰랐다. 나는 다시한번 멍청하게 되물었다. 어쩐지 삐진 듯한 남자가 입을 비죽이며 말을 내뱉자, 나는 알코올도 날려버리는 엄청난 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나 김태형."




잊고 살았던 기억속의 그녀석이 돌아왔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형이라 함은, 기억이 틀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아직 한참 어렸을 때 옆집에 살던 동갑내기 친구였다. 요새 허울만 좋은 이웃사촌이라는 말 말고 정말 친한 친구. 김태형과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모두 같은 학교를 나왔으며, 고등학교는 비록 달랐지만 매번 같이 하교를 하곤 했다. 허구한날 툭하면 붙어다녔던 우리들은 그 일대에서 꽤나 유명했었다. 잘생긴 애들이 끼리끼리 붙어다닌다고 말이다. 24시간 중 김태형과 떨어져있던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만큼 우리들은 어린 시절을 진득하게 공유해온 사이었다.

그토록 우리가 같이 붙어다녔던 이유는 ​서로의 취미가 비슷했었기도 했지만, 김태형이 날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슨 스토커 수준이었다. 내가 어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고, 내가 아는 아이들은 그녀석도 모두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야자를 하느라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었을 때도, 가끔 김태형이 야자 쉬는시간에 찾아와서 날 불러내곤 했다. 피씨방을 가자며 꼬드기는 말에, 내 학교까지 찾아와서 불러준 마음이 기특해서 몇 번 땡땡이를 친 적이 있기도 했다. 아, 절대 야자보다 피씨방이 가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김태형은 단순히 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으며, 절대 뒤통수 때리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는 몇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믿었던 김태형에게 뒤통수를 단단히 맞고 말았다. 존나 세게 말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김태형은 아무런 말도 없이 외국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친했던 나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식겠다, 빨리 먹어."

그런데 지금 이렇게 눈앞에 있네? 왜 이렇게 이가 갈릴까?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고 노려보자, 녀석이 다시한번 재촉했다. 독약 같은거 안 넣었다니까? 먹어봐, 좀. 그래야지 숙취도 풀리고 그러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야 웃기지 마. 너 요리 개못하잖아. 지금 이것도 비주얼만 괜찮고 겁나 짤지, 달지 어떻게 알아? 너무하네. 내가 언제까지고 요리 고자인줄 알아? 맛있다니까. 먹어보고 말해.

저 새끼는 뻔뻔한 건 여전하다. 결국 지는 건 내 쪽이지. 마지못해 계란국을 한 수저 퍼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 외로 계란국은 정상적이었다. 아니, 맛있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김태형이...맞는 건가...?




"맛있지?"

"..그래."


이 새끼는 하면 잘 하는 새끼였군. 십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랬으면서 예전에는 실험정신으로 내게 그딴 음식들을 먹였다 이거지. 약 십년전에 맞은 뒤통수가 찌릿하니 아파오는 것 같은 기분은 그거고, 맛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못해 솔직하게 말하자 김태형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순간 쪽팔리게 콜록거렸다. 씨발 왜 저렇게 잘생김이 진화됐냐, 짜증도 못 내게. 괜찮냐며 물을 건네오는 김태형의 손을 거부하고 계란국을 계속 퍼넣었다. 내가 말없이 먹는 데에만 집중하자 불퉁하게 보고 있던 김태형이 턱을 괴곤 문득 물어왔다. 석진아.


"그런데 어제 왜 그렇게 울었어? 물어봐도 안 알려주던데."

"......."

"지금도 안 알려줄 거야?"

"어."



내가 저 녀석 앞에서 질질 짰나 보다. 질질 짠 기억은 안 나지만 이유가 뭐인지는 알 것 같아 굳게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가 묵언수행을 하고 있자 김태형은 입을 나불나불댔다. 잘 먹는 건 여전하네. 이 형님 솜씨가 죽이지? 크, 이 김태형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맞다, 너 혼자 살지. 집 완전 엉망이던데. 어제 너 데리고 들어와서 집안 꼴 보는데 치우느라 죽는 줄. 그리고 아까 냉장고 열어보니까 유통기한 지난 것들이 넘쳐나던데, 솔직히 말해봐. 엄한 말투에 나는 슬그머니 눈동자만을 들어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마지막으로 열어본 게 언제야?"

좀 많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라 질문을 씹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근데 너 내 집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아주머니가."

엄마 왜 알려줬어. 귀한 아들 집인데.

"​귀국한지 얼마 안 되어서 살 집을 못 찾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너네 집에 가있으라고, 주소랑 비밀번호도 알려주셨는데 와보니까 집에 없는 것 같더라고.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서 있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기다렸지."

"그래 잘 했다."

"근데 너무 안 와서 기다리다가 얼어죽을 뻔 했어."




김태형이 투덜거렸다. 새벽 2시가 넘도록 안 들어올줄은 몰랐지. 4시간이나 기다렸다고.

​양심이 찔렸다. 내 집인데 도대체 왜 양심이 찔려야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녀석의 말을 들으면서 계란국을 다 비우고 있다보니 요동치던 속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가 김태형을 나에게 말도 없이 왜 보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해장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도 들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김태형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야, 집 구할 동안 여기서 머무르겠다고?"

"역시 석진이. 척하면 척이네."

"누구 맘대로?"




예전에 말도 없이 뒤통수를 치고 가버렸으면서, 필요하니까 폭풍우같이 들이닥쳐서 찾는게 배알이 꼴렸다. 내가 순순히 허락해줄 쏘냐. 잔뜩 눈을 매섭게 뜨고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먼저 말을 해온다.


"같이 있는 동안은 집 청소 내가 할게."

"그것만으로?"

"식사도 내가 담당해줌."


방금 전 깨끗이 비운 국을 생각해보니 그다지 나쁜 제안은 아닌 듯 싶었다. 예전에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걸 즐겨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마저 귀찮아저 밖에서 대충 사먹거나 시켜먹기 일쑤였다. 내가 알던 과거의 요리 존못 김태형이라면 식사를 담당하겠다는 건 전혀 메리트가 되지 않았겠지만, 이젠 어느정도 할 줄 아는 것 같으니 혹 했다. 플러스로 조금 눈호강도 하겠고?


잠시 간을 재보던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형이 피시시 웃으며 빈 그릇을 들고 씽크대 안에 내려놓았다. 물을 틀어놓고 그릇을 닦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슬그머니 걔의 옆으로 걸어갔다. 기척을 느낀 김태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왜? 물어오는 눈높이가 나랑 비슷하다. 김태형이 훌쩍 떠나기 전까지는 내가 얘를 한참 내려다보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너 정말 많이 변했다?"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고."



김태형은 아무런 생각 없이 뱉은 말일지 모르겠으나 듣는 나로서는 '나는 그동안 키도 키고 존나 멋있어졌는데 너는 발전한 것 없이 그대로네?'하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못했다. 괜히 짜증나서 등짝을 때리자 악 소리를 내며 퍼드득거린다. 덩치는 커졌어도 엄살 부리는 건 여전하다. 상쾌한 비명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김태형을 그대로 부엌에 내버려두고 거실로 와서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역시 술 마신 다음날은 이렇게 누워있는 게 최고다.

​드러누워 티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설거지를 끝낸 김태형이 내 옆에 와서 풀썩 주저앉았다. 깅석진. 왱.


"너는 요새 뭐하고 살아?"

"나? 프리랜서."

"백수란 말을 거창하게 하네."


듣자하니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야 임마, 프리랜서가 얼마나 위대한 직업인 줄 알아? 직장인처럼 상사에게 시달릴 일 없고, 출근도 할 필요 없고, 칼퇴근을 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단 말씀이야.

"그래도 일거리가 없으면 백수."


탁 잘라말하는 김태형에 반박할 힘이 없어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주욱 붙잡아 흔들며 그런다. 석진아 너 주댕이 정말 오리 주댕이 같다. 씨발새끼. 김태형의 손을 탁 쳐내고서는 톡 쏘아붙였다.



"야 ​그러는 넌 뭔데? 거창한 사업이나 하나 하시나?"

"나? 포토그래퍼."

"헛참. 그것도 백수 아냐?"

"노. 너와는 달라. 그리고 백수여도 괜찮아. 왜냐고? 그동안 돈 많이 벌었거든."



일년동안 일 안들어와도 살 수 있으니까.

​완벽한 넉다운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말하면 말할수록 지는 것 같다. 짜증나서 김태형을 툭툭 때리자 녀석이 내 손목을 한 손 안에 잡아올렸다. 손도 짱 커졌네. 손이 큰 사람은 거기도 크다던데... 눈을 굴려 그곳을 무심코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또 진 기분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만 쉬어야겠다.

 

한동안 아무말도 없이 티비를 보고 있었다. 티비에서는 물안경을 낀 해녀가 전복들을 따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수산시장. 문어도 나오고, 오징어도... 갑자기 오징어가 먹고싶어져서 침을 꿀꺽 삼켰을 때였다. 아까부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김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안 물어봐?"

"뭘?"

"그때 왜 말도 없이 떠났냐고."




수족관 벽에 달라붙어있는 문어에게서 시선을 떼고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걔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굵어진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내렸다. 톡, 톡, 톡. 긴 손가락이 리모콘에서 일정하게 까닥거렸다. 김태형은 내가 물어보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럴 테지. 사실, 그토록 친했던 사이었는데 왜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났는지 궁금했다. 배신당한 느낌에 하룻밤을 꼴딱 지새우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갔는지, 넌. 그 때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설마,하며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올까봐.

지금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처받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뭐, 사정이 있었겠거니...했지."

"......"

"그땐 충격받았었지만, 지금은 괜찮아."




어른인 척 이어말하자 리모컨을 톡톡 치고 있던 김태형의 움직임이 멈췄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힐끔 눈치를 살폈다. 꾹 다물린 입과 약간 치켜올라간 눈썹을 보니, 화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쟤가 화날 일이 뭐가 있어. 내가 화내면 화냈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것도 모두 김태형인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답답한 분위기가 지속되자 숨이 막혔다. 김태형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내가 입을 열어야겠다.


"그런데 왜 돌아왔는데?"



던진 질문에 김태형은 티비에 꽂혀있던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유난히 깊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미처 생각치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


"너 보고싶어서."




김태형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집을 구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하는 꼬라지를 보면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일년동안 일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던 말이 썩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남은 조그만 일이라도 얻어보려고 아등바등 하고 있는데, 탱자탱자 놀고 있는게 얄미워서 뭐라고 했더니만 들려온 말은

'필요하면 내 꺼 쓸래?'

였다.

인정한다. 솔직히 그 말 듣고 솔깃했던건 사실이었다. 저번에 언뜻 보여준 통장에는 입이 떡 벌어질만큼 어마어마한 액수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난 멀쩡하게 일을 할 수 있는데 남의 돈이나 뜯어먹는 꼴은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살았던 집에 김태형이 들어오자 생활은 조금 달라졌다. 가령, 밥 먹을 때 같이 먹을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나, 쇼핑을 할 때 두 사람을 기준으로 산다는 거나. 약속한대로 김태형은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저것도 아직 신기하다. 아침잠이 많아 매번 학교에 지각하던 게 김태형의 일상이었으니까. 비척거리며 일어난 나와 같이 밥을 먹어주는 김태형을 보며 나는 마치 신혼생활 마냥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끔 김태형은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때가 있었는데, 그럴때면 나는 왠지 승리자가 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식사는 자기가 담당한다고 했으면서 세상 모르고 자는 김태형이 웃겼지만, 가끔씩은 내가 음식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준비를 마친 후 그를 깨우러 옆 방으로 들어갔는데 자는 모습조차 잘생겨서 넋을 놓고 바라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세상 모르고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깨우기가 미안했던지라 그냥 혼자서 쓸쓸히 아침을 먹고 있으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오 분 전후로 일어나곤 했다. 늦잠 자서 미안하다며 웃음을 지어보이고, 나는 그런 김태형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어주고.

우리는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 김태형이 내게 말도 없이 떠났던 사건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둘다 백수처럼 소파위에 늘어져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예전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나는 이랬고, 넌 이랬는데. 그자식은 저랬고, 그땐 그랬고... 그러다가 그시절 철없던 소년처럼 장난이 붙어서 서로를 간지럽히기도 하고. 유난히 간지럼에 약한 나는 김태형이 달려들 때면 바로 항복하곤 했는데 아무리 항복해도 김태형은 도무지 간지럼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다. 결국 웃음을 참다 못해 눈물을 찔끔 흘리면 그제서야 김태형은 어딘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위에서 내려오곤 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김태형이 갑작스럽게 떠난 일을 꺼내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룰이었다. 첫날, 내가 그렇게 끊어낸 의미를 김태형이 잘 알아들은 것이었다고 나는 확신했다.


* *

 

 

추위와 더위를 심하게 타는 나에게 있어서 여름과 겨울은 최악의 계절이다. 오늘은 영하까지 기온이 떨어진 날이었고, 하필이면 난방장치도 점검일이라 반나절동안 쓸 수 없는 날이었다. 속된 말로 뭐 된 거였다. 나는 이불을 뚤뚤 둘러싸고 침대에 누워서 덜덜 떨고 있었다. 늙어서 그런지 뼛속까지 시려 죽을 거 같았다.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떡하지. 이번에 독감 장난 아니라던데. 독감 걸려 응급실에 실려갔다더니 입원했다더니 하는 몇몇 친구들의 소식을 들은 나는 나도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그 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김태형이 내 방으로 뛰쳐들어왔다.



"존나 추워."

그러더니 내 옆으로 다이빙해 둘둘 말고 있던 이불을 풀어헤쳐 지도 안으로 쏙 들어왔다. 야! 어딜 들어와!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추위에 질려 차가운 김태형의 몸뚱이가 감히 이불속에서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던 나에게 빅엿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체온 유지로 둘다 덜 춥대."

"웃기지마, ​니가 내 체온 빼앗아가는 거 모르냐?!"

체온 유지는 커녕 체온을 뺏기는 중이었다. 내가 반항하거나 말거나 꽉 안고 있던 김태형은 결국 못 참겠던 건지 훅 하고 입을 열었다. 안 되겠어.




"카페로 피신하자."

"뭐?"

"거기는 최소한 여기보단 따뜻하겠지. 가자. 여기 쫌만 더 있다간 동사될 판이야."

그렇게 말한 김태형은 이불을 걷고서 몸을 훅 일으켰다. 어느새 촥촥 방을 나가 외투를 입고 지갑까지 챙겨 날 기다리고 있었지만 천만의 말씀. 나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춥긴 하지만 밖으로 나가기는 귀찮았다. 안 가? 안 가.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자 2초간 정적을 유지하고 있던 김태형이 씩 하고 웃어보였다. 불길했다. 김태형이 저렇게 웃는다는 건 무슨 속셈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잠시 후 나는 김태형에게 이끌려 강제로 이불 밖으로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씨발새끼. 죽여버릴 거다.




추위에 길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카페로 피신해왔는지 들어가는 족족 카페는 모두 다 만석이었다. 두세번쯤 허탕을 치고 난 후 추위에 지쳐버린 내가 짜증을 줄창 내뱉어도 무시하고 응응, 이라고 응수하던 김태형은 나를 질질 끌고 어느 카페로 들어갔다. 다행히 네번째로 들어간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따뜻하고 안락했다. 아 세상에 소소한 기쁨은 바로 이런 걸까. 구석에 놓인 소파 쪽에 재빠르게 자리를 잡은 나는 팔을 쭉 뻗고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이게 바로 천국이지. 흐물흐물해진 표정으로 드러누운 나를 보곤 김태형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걸어왔다.


"그렇게 좋냐?"

"엉. 음료수는?"

"시켰어."



김태형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동작도 빠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려서 음료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까는 추워서 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따뜻한 음료를 먹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오니 시원한 음료수가 먹고 싶었다. 하긴 나는 원래 날씨가 춥든 안 춥든 아이스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김태형은 분명히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겠지? 워낙 추웠으니까... 정말 갈대같군, 이랬다 저랬다 하고.

꽤나 자기반성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진동벨이 울렸다. 일어나서 가져오려는 나를 저지한 김태형은 음료수를 양 손에 들고 왔다.

"자."

김태형이 내민 음료를 보고 난 눈을 깜박였다. 아이스 라떼.

"이한치한 김석진 씨."

이녀석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이걸 기억하고 있었나. 조금 놀라운 기분으로 한 모금 빨아들이자, 곧바로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김태형은 뭘 시켰나 해서 쳐다보니, 옅은 갈색인게 아무래도 아메리카노 같았다. 쓴 거 싫어하는 놈이었는데, 취향이 바뀌었나.

음료수도 나왔겠다 이제는 정말 할게 없어서 편한 마음으로 쭉쭉 마시며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단정하게 인테리어가 된 안. 그러다 눈을 굴려서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메세지가 왔는지 그는 핸드폰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 녀석도 나처럼 별로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하는 것 같았다. 할 일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녀석의 얼굴에 집중했다. 살짝 깔린 눈 아래로 보이는 긴 속눈썹, 우뚝하니 선 콧대, 그리고 굳게 다문 입. 김태형은 어찌보면 여자처럼 예쁘장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뚜렷한 이목구비와 짙어진 선이 그런 느낌보다는 잘생겼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도록 만들었다.

문득 스치면 인연이라는 김태형의 별명이 떠올랐다. 워낙에 친화력이 좋고, 사랑받는 애였으니까 내가 모르는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겠지? 알지 못하던 시간 동안 벌어졌을 일들을 상상하니 갑자기 기분이 급격히 하락했다. 괜히 짜증나서 컵이 일그러지도록 콱 잡았다가 손에 흘리는 바보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휴지..."

"칠칠맞게. 너가 애야? 흘리고."

"휴지 좀 갖다주라."




나는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김태형의 손길에 당연히 그가 나의 부탁을 들어주러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태형은 음료가 묻어있는 내 손을 자연스럽게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핥아먹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나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김태형이 붉은 혀를 내밀어 핥아먹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혀로 핥아낸 김태형은 내 손을 놔주며 말했다.

"다 됐다."

정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내리는 모습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도대체 왜?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정신없이 떠돌아다녔다. 이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야?

 

 

 

 

* *

 

 

'Sh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정] 킬 유어 달링  (7) 2017.01.15
[뷔진] 그녀석이 돌아왔다 下  (3) 2017.01.10
[지정] The Last words  (4) 2016.11.17
[지정] Diary of JM  (1) 2016.10.07
[지정] 가이드  (0) 201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