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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The Last words

            * 지민이가 글 안에 등장하는 '나'에게 말해주는 방식입니다

어디서 읽으셨다면 저 맞아요

 

 

 

 

눈이 소복히 쌓여 온통 세상이 하얗게 변했던 날, 한 남자가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몸을 비켜 추위에 떨고 있는 남자가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작게 떨어지는 목소리.

그는 난롯가 앞에 앉아 불을 쬐고 있다 따뜻한 차를 가져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삼십대 초반 정도쯤 되었을까? 눈송이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칼과 어딘가 슬픔에 잠긴 듯한 모습은 나로 하여금 침묵만을 지키고 있게 만들었다. 나는 이 낯선 침입자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쩐지 나와 비슷한 느낌을 주어서였을까. 나 또한 마주앉아 책장을 넘겨가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다 식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남자는 조용히 맞물려있던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나에게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The Last Words

 

 

 

 

 

나에게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죠.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그 애도 기억하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어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는 아주 음침하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 음침하고 우울한 기분이 온통 가득차 있던 연구소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요. 아직도 그곳이 있던 진정한 목적은 잘 모르겠어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단 한 가지라면 알고 있었어요. 연구소에 있던 우리들은 모두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수십 명이 모인 아이들은 모두 그 애처럼 부모가 없었어요. 형제자매, 친족조차 없는 그런 오갈 데 없이 버려진 고아들. 사실 부모가 있던 아이들도 있었을지 몰라요. 단지, 부모가 그들을 비싼 값에 팔아넘겼던 거겠죠. 나처럼요. 


내가 그 끔찍한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보다 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요. 항상 술에 취해 버릇처럼 어머니와 나를 때리곤 했어요.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폭력 속에서 어머니는 나를 감싸고 폭력을 견디셨어요. 그러다 결국, 쏟아지는 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죠. 덜렁거리는 어머니의 시체를 한동안 멍하니 봤던 것만 기억속에 남아있어요. 그리고 그 뒤는, 간략히 말하자면 돈에 팔려서 연구소로 끌려갔어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거에요. 재산은 한정적이었고, 그마저도 바닥이 다 드러난 판이었죠. 노름에 도박질, 술,술, 또 술. 돈을 잃고 집에 들어온 날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새끼가 하나. 그런 쓸모없는 자식이 비로소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웃던 끔찍한 얼굴이 떠오르네요. 끌려가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아버지란 탈을 쓴 짐승은 묵직한 돈을 들고서 즐겁게 밖으로 걸어나갔어요. 몰라요 나도, 그 사람의 끝은 최대한 비참하게 죽었길 바래요.

 

끌려가던 도중 악에 받혀 욕을 내뱉던 내 목소리를 듣기 싫었던 건지 한 남자가 때려서 기절시켰고, 눈을 떴을 때에는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고 있던 중이었어요. 울창한 숲 속, 저 멀리서는 온통 음산한 기운에 싸인 건물이 보였지요. 한동안 주위에 익숙해지지 않아 멀뚱거리던 나는 나를 태운 차가 건물 앞에 섰을 때 직감했어요.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라고.



하지만 모두 생각뿐이었어요. 그 때의 나는 아직 성인 남자를 이길 만한 힘 따위는 없었으니까. 피가 튄 벽을 지나 질질 끌려가던 나는 어느 방 안으로 밀쳐졌고 바닥에 엎어졌어요. 동시에 문이 철컥 하고 잠기는 소리가 났고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려고 애를 썼어요. 온 힘을 다해 몸으로 밀쳐도 보고, 쾅쾅 두드려도 보고, 발로 힘껏 차보기도 했지만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았죠.

 

나는 이 곳이 위험한 곳임을 직감했기에 두려움이 일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죠. 돈에 나를 팔아버린 짐승같은 새끼.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나를 팔아버린 놈. 열리지 않는 문. 주먹으로 친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아 오히려 손만 아팠어요. 이 병신같은 상황은 뭐람. 악에 받혀 소리를 질렀죠. 씨발, 씨발, 씨발! 그렇게 울부짖고 있던 나에게 한 아이가 다가왔던 것 같아요. 뭐라뭐라 말한 것도 같아요. 하지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네요. 이해해주시길. 그 때 나이는 열 살, 매우 한참 전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래도 다가온 아이를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기억나요. 화를 풀 곳은 이 놈이라고 생각했죠. 니가 뭔데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냐. 이런 거지같은 상황에! 얼굴에 주먹을 날려 나가떨어진 녀석을 그대로 발로 콱 밟았어요. 입으로는 수많은 거친 욕설들을 내뱉었죠그러던 중, 코피를 흘리던 녀석의 얼굴에 한 방을 더 먹이기 위해 내려치던 나의 손이 막힌 때가 있었어요.

 

이건 뭐지? 하고 잠깐 든 생각은 복부에서 느껴지는 강한 충격에 사라졌고, 나는 저 멀리 뒤로 나가떨어졌어요. 강한 타격에 순간 눈앞이 노래졌었죠. 울리는 머리를 간신히 들었을 때 눈에 보였던 건 조금 전까지 내가 구타하던 아이를 부축한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애의 얼굴이었어요. 그 애가 나를 때린 놈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자연스럽게 거친 말이 튀어나갔던 것 같아요.

'씨발, 넌 또 뭐야?'


라고요. 그 애는 고개를 돌려 피떡이 된 아이를 한 번 바라보고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하더군요.

 

  

'상황파악을 못하는 병신은 입 닥치고 있어.'

  

 

남자는 이 부분에서 웃었다. 왜 웃는지 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이어질 이야기에 집중했다. 남자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요. 그 애의 말은 정말 맞았었거든요. 나는 그때 상황파악이 안 돼 분노를 마구 표출하기에만 바빴던 병신이었어요. 날 내리까는 말에 눈이 돌아가 덤벼들었죠, 멋 모르고 덤벼들었었죠. 그런 나를 본 그 애는 나에게 맞은 아이를 다른 아이에게 넘기고서는 나를 상대했어요. 

 

상대가 되질 않았죠. 정국인 수없이 많은 빈틈을 보이는 내가 정말 우스워 보였을 거에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내 주먹을 피하며 나를 때렸어요. 쾅쾅 부딪히는 소리가 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자 결국엔 관리자가 들어와 싸움을 중단시켰죠. 끌려들어온 첫날부터 독방을 쓰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분이 엿 같았던 진짜 이유는 내가 본능적으로 그 애한테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것이었을 거에요.

그게 정국이와 나의 강렬했던 첫만남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했어도, 나는 정국이가 그렇게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전정국, 그 애가 나의 일부가 될 줄은.  

 

첫 만남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기로 하죠. 길고 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는 서론이 너무 길어지니까. 그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 애를 싫어했지만 덤빌 수 없었던 것은 정국이가 아이들 사이에서 서열 1위였기 때문이었어요. 그 의미는 정국이가 그만큼 잘 싸웠다는 말이기도 했고, 온갖 실험에서 살아남은 독종이라는 걸 뜻했죠. 맨 처음에는 아이들이 200명쯤 있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연구소로 들어갔던 시기에는 아무리 많이 쳐봐도 수십밖에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만큼 실험은 독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에요, 실험하다가 애들이 죽더라도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국이가 서열 1위였던 진정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 애는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그 애가 있던 방이 생존률이 가장 높았었다는 것을. 왜냐고요? 정국이가 바로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줬기 때문이었거든요. 어린 아이들이 모두 미쳐가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감싸안아준 사람이 정국이었어요. 내가 그 애를 다르게 생각한 것도 그 쯤이죠. 

 

이 부분에서 남자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 지독한 실험을 당한 날이었어요. 미친놈들이 나에게 뭘 주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주사를 맞고 난 후 정말 나는 온몸이 미칠 듯이 아팠어요. 다른 날보다 몇십 배는 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구석에 쪼그려 앉아 나는 욕을 쉴새없이 지껄여댔어요. 저주받을 새끼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릴거야... 그러다가 나는 중얼거리고 있었어요.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엄마가 있는 곳은 행복할까? 죽고싶다, 죽고싶어....... 

 

방 안에 있던 아이들은 나를 한 치도 신경쓰지 않았어요. 모두 나와 같이 실험을 당한 뒤라 자신의 불행을 욕하느라 바빴을 테니까요. 연신 죽고싶다, 죽고싶다 만을 중얼거리던 나는 어느 순간 따뜻한 온기가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어요. 정국이었죠.


 

- 지금 죽어버리면 저 놈들한테 복수할 수 없잖아요? 참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요.

 

 

그리고 나를 더욱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말해줬어요.

 

 

- 꼭 살아남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같이 여기를 빠져나가요.

 

 

연구소에 온 후 처음 듣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포근함에 울컥 눈물이 나서, 나는 그 애를 부둥켜 안고 울었죠.

아마 그 때부터였을 거에요. 내가 정국일 호의적으로 보게 된 시기가.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항상 그 애에게 눈이 가 있었어요. 고통에 아파하는 아이들을 달래주고, 자기가 훨씬 더 아플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불어넣어주던 정국인, 정신적 버팀목이었어요.

 

아이들은 기댈 곳이 있으면 강해지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가혹했어요. 아무리 우리가 강해진다고 해도 현실은 지옥이었어요. 그날도 우리와 같은 방을 쓰던 아이가 죽어나간 날이었어요. 문 밖으로 사라지는 작고 푸르딩딩한 손을 보고 나는 곧 그 아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죠.

  


캄캄한 밤이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아 나는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어요. 몸은 아픈데 졸려서 기어이 잠은 오더라고요. 잠이 들려던 순간, 내가 잠들지 못한 것은 작게 중얼거리는 정국이의 목소리가 들려와서였어요. 나는 일어나진 않고 그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어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어요.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태형이 형, 민희 누나, 윤지...'

  

 

...세상에. 정국이는 지금까지 죽어간 애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에요. 윤지, 라는 아이는 그 날 아침에 죽어나간 아이의 이름이었고요. 나는 바로 기억속에서 지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그렇지 않았던 거에요.


아이들의 이름을 다 중얼거린 후, 정국인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 애가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나는 잘 수 없었어요. 아니, 잠이 오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나는 소리없이 몸을 일으켜 그 앨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보았죠. 눈 밑에 고인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을. 

 


그 때 나는 깨달았어요. 항상 앞에서 강하게 행동하던 정국인 사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난 그런 정국이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게 좋아하는 감정으로 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고요. 하지만 내가 정국일 좋아하면 뭐하나요. 그때는 모두가 지쳐있어 좋아한다는 말도 짐이 될까봐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어요. 고백도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요. 매일매일 살아남는 게 가장 큰 의미였던 우리들에게 그딴 것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지요. 그래도, 누구에게는 차라리 죽는 게 행복한 일이었을지 몰라요.

 

이 부분에서 남자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나는 재촉하지 않은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아직도 기억나요.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치던 한 여자아이가. 아침까지 멀쩡했던 여자애는 끌려나가 실험을 당하고 온 두 시간 후, 온몸에 물집이 가득 생기기 시작했어요. 간혹 물집이 터지면 그 자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왔고요. 모두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때도, 정국이만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살 수 있다고, 살아남자고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그 여자앤 실험에 실패한 거에요.

점점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는 그 애의 얼굴 또한 침통해져갔어요. 여자애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어요. 비명을 질렀죠.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는, 죽여달라고. 여자애는 정국이의 손을 잡고 울며 애원했어요. 정국인 울 듯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그 아이를 단번에 찔러죽였어요.

조금전까지만 해도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던 아이가 잠잠해지자 아이들은 모두들 고개를 돌려 정국일 봤죠. 하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정국이가 죽은 애를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어요. 그 애가 죽은 아이를 위해 울고 있었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어요. 정국이는 아이들을 위해 그 어린 나이부터 손에 피를 묻혔죠...


정국이는 자신을 위하는 일은 하지 않았던 거에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분명 몇 년은 흘렀을 거에요. 정국이와 나는 키도 많이 컸고, 외모도 바뀌었으니까. 우리들은 그만큼 온갖 실험을 겪었어요. 또 그만큼 아이들은 많이 죽었죠. 하지만 많은 실험을 견딘 만큼 살아남은 아이들은 괴물이 되었죠. 여섯 명이 남았었어요. 정국이와 나, 남자아이 세 명과 여자아이 한 명.

 

우리들을 한 방에 몰아넣은 그들이 바보짓을 한 것이었어요. 모여서 여기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울 기회를 줬으니까요. 가능성은 충분하고도 남았어요. 감시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나머지는 다 비리비리한 과학자들이었고. 우리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어요. 그리고 성공했죠.  ...비록 실패한 성공이었지만.

 

연구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어요. 그러나 최후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우리 둘 뿐이었죠. 나는 정국이가 살아있는 아이에 속했다는 사실에 기뻐 죽은 아이들을 애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나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정국이에게 손을 내밀었어요. 그러나 정국인 그저 멀뚱히 나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죠. 답답해진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었어요.

 

 

'빨리 일어나. 여기를 빠져나가야지.'

 

 

나의 말에 정국인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어요. 왼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라고.

 

그 말에 나는 그제서야 정국이의 왼쪽 다리가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죠. 얼른 붕대로 응급처치를 한 후 나는 정국일 업고 지옥같은 곳을 걸어나갔어요. 나 또한 격렬한 싸움으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그 때는 이상하게 힘이 났어요. 드디어 여기서 빠져나간다는 사실이 매우 기뻐서였을 거에요. 끌려들어온 날 이후, 처음으로 바깥 공기를 쐬었을 때 느꼈던 기분이란..... 

 

눈물이 끝없이 펑펑 쏟아져내렸어요. 그건 정국이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내 어깨가 축축히 젖어 들어갔었으니까.

우리는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연구소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어요. 한참 동안 우리는 말도 하지 않고 춤추는 불길을 바라보고만 있었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잿더미로 변하는 건물이 우리가 그토록 고통받았던 곳이라니. 일렁이는 불길을 뒤로 하고서, 우리들은 곧 시끄러워질 현장을 떠났어요.

  

그래, 뒤를 돌아볼 이유는 없었어요. 나의 곁에는 정국이가 있었으니까 말이에요.

 

정국이를 업고서 나는 길고 긴 숲속을 지났어요.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견딜만 했죠. 숲속에서 우리들은 몇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 같은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했어요. 우리들은 그곳에서 지친 몸을 가다듬었어요. 의논 끝에 그 집에 살기로 결정했고, 음침한 냄새가 나던 집은 차츰 생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죠. 시간이 지나 다친 상처도 아물었어요. 심하게 다쳤던 정국이의 다리도 말이죠. 물론, 예전처럼 완전하게 되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애가 두 발로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만 했어요.  

 

연구소에 갇혀 있던 기간은 자그마치 7년이었어요. 어쩌면 그보다 더 길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그 애는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끔찍한 곳에서 견뎠단 것을 뜻하기도 했어요. 아, 왜 그 애는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드는지... 그토록 희망없이 우울한 곳에서, 어떻게 미쳐버리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요? 나는, 그 애 덕분이라지만......

이 부분에서 남자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미안해요. 못난 내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 말을 이어가지 못했어요.

남자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고 곧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동안 우리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았어요.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어요. 몇 년 동안 그 애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나의 마음을 이제 꺼내도 될 시기였어요. 살아남기에 바빠 말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을 그제서야 말할 수 있었던 거죠. 내가 정국이에게 고백했던 아침은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 날 아침은 왠지 모르게 아침 공기가 좋았어요. 왠지 햇살 또한 다른 날보다 더 따스하게 느껴졌었고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마치 나더러 정국일 데리고 산책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정국일 데리고 밖으로 나갔어요. 손을 잡고, 문 밖을 나갔죠. 흔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렸을까.

 

우리는 길을 따라 걸었어요. 길가에 핀 자그마한 꽃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죠. 나는 그 애를 이끌고 우리들만의 공간으로 갔어요. 봄철이면 갖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넓은 장소. 제멋대로 핀 꽃이 오히려 진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었죠. 우리는 그 에 도착하고 말을 잃어버렸어요. 한동안 말없이 꽃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죠. 그러다가 풍경을 즐기기 위해 우리는 약간 떨어져서 걸었어요. 나는 노란 꽃을 보았어요. 그 애에게 주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분홍색 꽃을 보았죠. 또, 그 애가 좋아할 것 같았어요. 꽃잎이 겹겹이 있어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거렸죠.

 

나는 어느 새 정국이에게 걸어줄 화환을 만들고 있었어요. 조그만 하얀 꽃을 넣고, 약간 푸른 빛이 도는 꽃도 넣고, 매끄러운 풀잎으로 고정하고. 하지만, 나는 갑자기 뭔가가 내 머리에 씌워지는 느낌에 화환을 만들던 손놀림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잘 어울려요. 생각한 대로다.'

  

 

환하게 웃던 정국이의 얼굴에 벙찐 얼굴로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가슴이 벅차오를정도로 아름다웠거든요. 나는 뭐에 홀린 듯한 느낌으로 천천히 일어나 정국이에게 화환을 씌워주었어요. 내 입에서는 여과 없이 말이 튀어나갔죠. ...예뻐,

 

   

'좋아해, 정국아.'

 

 

어쩜 그리 밋밋한 고백도 또 있을까요. 멍한 얼굴로 일어나 그딴 소리를 중얼거리는 나란 놈은 정말 어딘가 모자란 것일런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리 멍청한 고백에도 정국인 활짝 웃으며 내 품 안으로 들어와 날 꽉 껴안았어요. 속삭이던 따스한 한 마디.

 

 

'기다렸어요, 그 말을.'

 

 

그건 내가 여태 들은 말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이었어요. 예전에도, 지금에도, 앞으로도..... 

 

남자는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듯이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우리는 몇 년간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배려하며 그렇게. 그 애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은 우리들을 제외하고서는 아무것도 필요없을 정도로 행복했었죠. 처음으로 키스한 날. 사람의 입술이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처음으로 같이 긴 밤을 보냈던 날. 맞닿은 온기가 그렇게 따스하고 벅찬 감동을 주는 것 또한 그 날 처음 알았죠. 흐드러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웃음기가 섞인 신음 사이로 달콤함을 나누던 우리 둘의 목소리마저도, 나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여기서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을 자책하는 어조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람은 간사하죠. 옆에 있는 소중한 것에, 그 소중한 것이 주는 포근함을 질려하거든요. 아니, 질려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 분명해요. 분명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소중한 것을 절대 떠나면 안 된다고 신호를 주고 있는데도 다른 것에 눈이 멀어 신호를 무시하는 거죠. 내가 그랬어요.

 

시곗바늘이 돌고 돌아, 내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 나는 주위의 모든 것에 따분함을 느꼈어요. 매일같이 보는 태양이 지겨웠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도, 촉촉하게 젖어 나던 향긋한 풀내음도 토기가 나올 만큼 역겨웠어요. 그보다도 더 지겨웠던 건 그 애의 얼굴이었죠. 아니, 그 애의 변함없는 마음에 넌더리가 났어요.

 

정국이는 항상 나를 따스한 목소리로 불러주었어요. 항상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죠. 그것이 세상의 진리인 듯 정국인 단 한 번도 나를 차갑게 대하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그래서 그 때의 나는 그 애를 지겨워하고 넌더리나 했을지 몰라요. 나는 너에게 질려가는데, 너의 그 모든 것이 짜증나고 지겨워지는데 왜, 너는 왜, 계속 나를 사랑해주는지.

 

정국인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는데 나만 변해가는 게 짜증났어요. 화가 났죠. 그 애도 똑같이 나를 지겨워하면 차라리 나았을지 몰라요. 나는 서서히 우리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날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웃지 않게 되었죠. 나는 정국이가 없는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어요.

너만 없다면,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나의 과거는 몇 년 전 연구소를 나올 적에 다 지워졌기에.

 

소름돋을 정도로 생생하게 이별을 고할 때의 인사를 기억해요. 보통 때와 같이 창문 안쪽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았죠. 커텐은 걷어져 있었고요. 정국이가 걷어두었을 것이 분명했죠. 나는 평소와 같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어요. 그리고 정국이가 있을 아래층으로 향했어요. 식탁 위에 앉고, 아침식사를 하고, 편안한 정적이 흐르고, 내 컵에 담긴 물의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신 후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나를 따라 일어나는 그 애에게 이렇게 말했죠.

 

 

'이제 난 너를 떠날 거야.'

 

 

아, 내가 미쳤나 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을까요. 그 때의 나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천하의 어리석은 놈.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당장 질 나쁜 농담이었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미쳐있었어요.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남자는 수없이 자책하더니 목이 메이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한참 뒤, 천천히, 느리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국인 나를 잠시동안 바라보더니 말했어요. 

 

 

'...알았어요. 잘 가요.'

 

 

가지 말라고 잡거나, 왜 갑자기 그러느냐고 묻지도 않았죠. 정국인 평소처럼 식탁을 치웠어요.

 

우리의 이별은 정말로 시시했어요. 그동안 서로 사랑했던 게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그렇게 날 쉽게 보내줄 지 몰랐어요. 그렇게 쉽게 보내줄 줄 알았더라면, 그 전에 떠나는 건데. 정국이 또한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를 지겨워했던 것이 분명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은 정말로 가벼워졌어요. 문 밖으로 나와 맞이한 햇빛이 천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풀잎의 냄새도 아주 달콤한 사탕 같은 향기가 났죠. 나는 미련없이, 단 한 번도 오두막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숲 속을 나왔어요.

 


우리가 존재하지 않은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신비로웠어요. 아름답게 치창한 여자들.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들. 어딘가를 바삐 가는 어머니와 딸.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어요. 그들은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가고 있었죠. 정처없이 걷던 나는 한 도시에 다다랐어요. 나의 눈을 사로잡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죠. 나는 문득, 그들이 사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졌어요. 나는 곧 한 도시에 정착했죠.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요. 대저택에 살고 있는 한 젊고 잘생긴 청년. 그의 신원은 불분명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죠. 돈과 외모에 눈이 먼 사람들은 내게 빠르게 다가왔어요. 나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수없이 어지럽고 난잡한 생활을 즐겼죠. 돈은 내게 종이조각에 불과했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었어요. 여자 남자 구분할 것 없이 문란하게 즐겼어요. 파티를 시도때도 없이 벌여 나의 능력을 과시했어요. 그런 나를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추종했죠.  

 

내가 마치 이들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정국이와 단 둘이 살 때는 이러한 기분을 느낀 적 없었기에 나에게 그런 생활은 신비하고 달콤한 동시에 추악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더럽고 추한 건지 느낄 수 없었어요. 몇 년동안 나는 그렇게 살았어요. 내 머릿속에서 그 애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후였죠.

나의 신비롭고 환상적이던 생활이 깨진 건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나는 일어나서 거울을 봤어요. 내 목에는 전날 밤에 나와 질펀한 밤을 즐기던 여자들이 남긴 키스마크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죠. 방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어요. 술에 쩔어서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어요. 창틀 밑에 주저앉은 사람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라고요. 남자 옆에는 깨진 술잔과 술병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고요. 나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고 그 남자 앞을 스쳐 지나갔죠. 하지만, 그런 나에게 남자가 불쑥 묻더군요.

  

  

'왜 이런 일을 벌입니까? 당신에게 남는 게 있습니까.'

  

 

남는 것이란, 없었죠.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나는 그저 돈만 써대는 멍청이었어요. 하루만을 즐기기 위해 생각없이 사는 바보였구요. 나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그냥 지나쳤어요. 그런 나의 등 뒤로 목소리가 다시 들렸죠.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마도 계속 있을 텐데요. 그 자리에서.'

  

 

그가 정국이를 알 리는 없었어요. 처음에는 그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게 누구인지 알지 못했죠. 하지만, 그 날 저녁에 처음으로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애가 생각났어요. 한 번 떠오르고 나니 생각을 멈추는 걸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원하는 순간에도 계속 그 애의 얼굴이 아른거렸어요.

6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를 잊고 다른 사람과 살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미치도록 그리워졌어요.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매 순간마다 나를 사로잡았죠. 결국, 나는 호화롭고도 추악했던 도시생활을 접고 예전에 단둘이 살던 곳으로 내려갔어요.

 


도착하니 그 곳은 많이 달라져 있더군요. 우리만의 공간이던 울창한 숲은 사라졌고, 숲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곳만 남아있었어요. 그 애매한 곳에는 많은 집들이 자리하고 있었고요.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 걸어갔어요. 마치 둘만의 기억을 남이 억지로 침범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러다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오두막.

우리가 살고 있었던 조그만 오두막집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어요. 마치 사람이 계속 살고 있는 것처럼요. 나는 가슴이 뛰었어요. 저 안에, 정국이가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죠. 그 애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하고 나온 건 내 쪽인데. 나를 보면 어떻게 나올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일단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죠.

 

안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아침식사를 했던 탁자, 저 쪽에 놓여져 있는 의자. 모든 게 그대로였어요. 나는 바뀌지 않은 가구들의 위치에 안심해하며 정국이의 모습을 찾았어요. 거실, 욕실, 부엌, 위층까지 올라가서 다 뒤져보았는데도 그 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 애가 보이지 않자 나는 마음이 갑갑해졌어요. 분명히 집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없다니. 일단 어디 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 기다려보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죠.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동네 주민들에게 정국이의 행방을 묻기로 마음먹었어요.

 


문을 똑똑 두드리니 한 중년여자가 나오더라고요. 나는 그녀에게 저 오두막집에 살고 있던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청년의 행방을 아느냐고 물었어요. 내 말에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죠. 나는 그 표정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여자는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어요. 의자에 앉아 여자가 설명해주기를 기다리며 조마조마한 가슴을 붙잡았죠. 그녀는 제게 묻더군요.

'그 청년과 가까운 관계였나요?'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의 대답에 여자는 더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나에게 마실 것을 가져다주면서 이야기를 해주었죠.  

 

1년 전, 집에 강도가 침입했다.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것 같지만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강도는 집에 살고 있던 청년을 처참하게 토막내어 죽인 뒤 달아났다. 아직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내가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추리자면 이러했어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아찔해졌어요. 검은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나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사람이 맞느냐고 한 번 더 물었어요. 이름이 전정국이라는 것도 맞느냐도 물었지요. 질문들에 중년여자는 안타깝지만 모두 맞다고 대답했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리고서는 그 집을 걸어나왔죠.

 


나는 숲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어요.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물음들이 떠돌아다녔죠. 하지만 이상한 것은, 강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었어요. 내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은 우리 두 명은 괴물이었다고요. 쉽사리 죽지도 않을 뿐더러, 성인이 다 된 지금에서야 강도에게 죽는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았죠. 이미 열여섯에 성인 스물 세 명을 죽인 우리들이에요. 하찮은 강도 따위에 죽는다는 말은 나비의 날갯짓에 맞아 죽는다는 말도 안되는 가능성과 동일했죠.

달이 기울고, 어슴푸레하게 해가 떠오를 즈음에야 난 알았어요. 그 애가 스스로 원해서 죽었다는 것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정국이는 미치도록 나를 그리워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자 내 눈에서는 수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눈물샘이 고장난 듯 그저 눈물만 계속 흘러나왔죠.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걸까요. 그 애에게 지옥을 선사해주고 나 혼자는 즐겁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냈잖아요. 그 애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나를 끝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새카맣게 잊어버렸던 거였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남자는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가 진정될 동안 나는 식었던 차를 걷어가 다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차로 바꿔내왔다.

  


 

나는 다짐했어요. 일단은 그 애를 죽인 놈을 찾아내자고. 찾아서, 최대한 잔인하게,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릴거라고 다짐했어요. 목표가 정해지니 그 다음은 움직이기 쉽더군요. 모든 정보를 모았어요. 나의 온 감각을 동원해 놈의 흔적을 쫓았죠. 그 새끼는 쉽게 잡히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나는 조급해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되었건, 끝내 놈을 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반 년 후, 나는 놈을 잡았어요. 낙엽이 다 떨어진 험준한 산중에서였어요.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서 나는 놈의 그림자를 봤어요. 그 냄새였어요. 전정국을 죽인 놈의 냄새. 나는 놈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노력했어요.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르며 물었죠. 그 애를 죽일 때 즐거웠냐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놈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어 혀를 잘랐어요. 네가 이렇게 아픈 건 그 때 그 애의 아픔에 비할 게 못 돼. 이 개같은 새끼야. 나는 울면서 놈을 죽였어요.

너 때문에 정국이가 죽었어. 다 너 때문이야. 이 개자식...! 


글쎄요, 과연 그놈의 잘못만 있었을까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하얗게 올라가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늘하늘 춤을 추던 연기는 곧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우리들이 살던 곳으로 갔어요.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던 그 집으로. 살해당한 사람이 살던 집이라는 소문이 돌아서인지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어요.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정적과 청소를 하지 않아 그득히 쌓여있는 먼지들, 그리고 냉기만이 감돌았죠. 나는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어요. 저번과는 다르게, 느리게 말이에요. 그 애의 남아있는 체취를 미세하게라도 느껴보고 싶어서 바닥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있었어요. 아주 긴 시간동안 말이에요.

  

그러다가 나는 문득 감았던 눈을 떴어요.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어요. 빛이라고는 창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미세한 달빛과 별빛 뿐이었죠. 그 중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어요. 미세하게 새어들어오는 빛 사이로, 뭔가 보였어요. 바닥에 뭔가 비치는 것 같았어요. 글자였어요, 그건. 나는 글자를 손으로 긁었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긁히지 않더라고요. 단지 내 손 위로 글자가 비치고 있을 뿐이었죠. 그건 바닥에 쓰여있는 글씨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에 반사되어 보이는 글자였어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는 미친듯이 주변을 뒤졌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내 직감은 그게 그 애와 관련되어 있다고, 정국이가 나에게 남긴 것이라고 외쳐댔어요. 한동안 뒤진 끝에 나는 조그만 유리조각을 발견했죠. 글자가 비치는 끝에는 유리조각이 있었어요. 그것을 집어든 나는 손전등을 찾았어요. 미세한 달빛에만 의존해서 글자를 명확히 읽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손전등을 찾은 나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손전등을 유리조각에 비추었죠. 그러자, 벽에 글자가 나타났어요.  

 

단어였어요. 문장이 아니었어요, 그건 단어였습니다. 분명히 앞으로 몇 개의 유리조각이 남아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요. 정국이가 남긴 조각을 찾자. 일단, 그것을 찾자.

"​그리고 어젯밤 그것을 다 찾았어요. 나는, 이제 내가 할 일을 다 끝냈습니다."

 

 

남자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한 차 대접해 주신 것도 감사해요. 잠시만, 잠시만 있다가 곧 나갈게요. 남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하룻밤 지새고 가셔도 괜찮아요. 밖은 지금 혹독하게 추우니까요. 남자는 웃었다.

"당신은 정말 상냥하네요. 제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절 겁내시거나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때와 같군요."

  

나는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글쎄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에게서는 위험한 기운이 풍기지 않는걸요. ...그런가요.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저는 이만 올라가서 자야겠어요. 추우실지 모르니까 여기, 담요 드릴게요. 담요를 건네받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 *


아침이 되어 응접실로 내려갔을 때 남자는 그곳에 없었다. 집 안 어디에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작은 유리조각들만이 어제 남자가 앉아있던 곳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하얀 세상 사이로 총총히 찍힌 발자국이 보였다. 머릿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띈 채로 걷는 남자의 모습이.

이어지는 발자국을 눈으로 쫓던 나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발자국이 찍힌 곳은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시 집 안으로 돌아온 나는 남자가 남긴 조각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집어들었다. 집 안 어딘가에 있던 손전등을 찾아낸 나는 존재하던 모든 불빛을 껐다. 벽난로 주위를 제외하고 어두워진 방 안을 바라보다가 손전등을 키고 유리조각을 비추었다. 벽에 글자가 나타났다. 글자를 읽은 후, 나는 다른 조각을 손에 들고 다시 비추었다. 그걸 반복해서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나는 남자가 남겼던 유리조각들을 모두 한 손에 그러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타닥타닥 타고 있는 벽난로 사이로 가볍게 던졌다. 그 사람이 원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둘만의 비밀이니까 그렇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길 사이로 유리조각들이 튀었다.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 사랑해, 나는 언제나 형을 기다리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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