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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결혼은 미친 짓이다 上

서울은 차가 많다. 특히 퇴근 시간의 대로변은 기가 막힌다. 내가 운전을 하는 건지, 차가 나를 운전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다른 차들 사이에 끼어서 흘러가는 건지. 솟아오르는 짜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뒤로는 성질 급한 운전자들이 클락션을 울리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났지만, 아무리 눌러대도 막힌 길이 뚫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참고만 있었다. 차를 끌고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가 없었다. 5분간 개미 발자국만큼만 움직인 거리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났다. 걸어가는 게 더 빠르겠네. 뻐근한 목을 두어 번 뒤틀며 잠시간 차를 버리고 갈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때였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지도 않았는데 차가 덜컹 흔들렸다. 이건 필시 뒤에 있던 놈이 내 차를 박은 거다. 어떤 멍청이가 내 차를 들이받은 거야. 하루 종일 참고 참았던 짜증이 확 치솟은 나는 안전벨트를 단번에 풀어버리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차를 받아버린 놈의 면상을 확인하려 뒤로 돌았는데,



"저기요,"



그쪽에서 나온 얼굴을 보자 절로 몸이 굳어졌다. 항상 똑같던 차분한 검정색 머리, 크고 순한 두 눈이 나를 보자 '으' 스러운 눈빛으로 물들어간다. 전정국의 모습에 오늘의 운세에 있던 경고를 떠올렸다. 인생은 새옹지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세요.


야, 전남편을 마주친다고 자세히 써놨어야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

 





나는 유부남이었다. 과거형.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다. 본래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은 염세적인 인간이었다. 선생님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말만은 아직도 기억난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민이도 커서 훌륭한 아빠가 될 거예요.'했던 말에 '저는 결혼 안 할 건데요?'라고 샐쭉하게 받아쳤다. 결혼을 할 생각도 없는데 멋대로 아기를 기르는 아빠로 만들어버린 선생님이 무지 괘씸했다. 인생은 혼자 사는 법.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물론 비혼주의라는 말이 내가 연애를 한 번도 안해봤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내 얼굴을 봐라, 그게 말이 될까? 아무튼, 시간이 흘러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드니 종종 결혼을 하는 친구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에 싱그러운 글씨체로 써져있는 청첩장. 수많은 축하 속에서 올려지는 결혼식,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딱히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 진짜 결혼할 생각 아직도 없냐? 이 연애주의자 같으니, 나이 들어서도 짝이 없으면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워서 눈물 주룩주룩 흘리는 놈들도 있대.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는 친구의 조동아리를 엄지와 검지로 조용히 닫아주었다. 나는 어떠한 확신이 있었다. 내 등본에 다른 사람이 배우자로 적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 전정국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과 술 한잔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친구는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었다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아내가 분만 예정일보다 빨리 진통이 왔기 때문이었다. 예정일보다 2주일 빨리 닥친 건데, 나중에 전해들은 말로는 예쁜 딸이 무사히 태어났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가 갑작스럽게 자리를 떠나고 나자 덩그러니 놓여진 나는 심심해졌다. 자작을 하며 남은 술을 비우고 가게를 나와 털럭털럭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보인 클럽에 멈춰섰다. 클럽이라. 자주 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입사한 뒤로는 편하게 놀러가지 못한 지 꽤 됐다. 내 일이 좀 그런 일이라. 그대로 클럽에 들어간 나는 고막을 찢을 듯한 음악 소리와 강렬한 조명을 마주했다. 리듬에 몸을 맡길 기분이 아니라 그저 뒤로 빠져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뭔가에 홀린 듯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조금 신기했다. 나도 예전에는 저랬을까. 한동안을 지켜보기만 하던 순간, 구석에서 그를 발견했다. 나처럼 구석에 가만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가만히 구경하고만 있는 한 남자. 클럽과는 정반대로 차분하게 내린 머리칼과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들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잔을 내려놓으려 고개를 돌렸다가 쳐다보고 있는 나와 정통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담배로 인한 뿌연 공기속에서, 우리 사이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눈을 마주한 그 순간, 번개를 맞은 듯 찌릿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길로 클럽을 나왔다. 내 손에는 남자의 손이 잡혀있는 채였다. 어떠한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받은 키로 모텔방을 열자마자 입술이 격렬하게 맞붙었다. 나는 손을 들어올려 그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겨냈고, 그는 내 입술을 따라가며 조급한 손으로 내 허리춤을 풀러내리기 바빴다. 뭐가 그리 바빴던지, 침대로 걸어가는 열 걸음만에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성급하게 시작된 관계는 연속해서 세 번을 붙어먹고야 간신히 수그러들었다. 내 밑에서 엉엉 울어 잔뜩 발개진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춰준 나는 그제야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러자 조금 쉰 목소리로 답했다. 정국.., 전정국이요. 그게 정국이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첫 만남에 잔 건 일반적인 커플들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빠르게 서로에 빠졌다. 흰 눈보다 새하얗게 웃음짓는 미소를,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보다 또렷하게 빛나는 눈을 사랑했다. 비단 그뿐만은 아니었다. 상냥한 입술이나 곧은 손, 나를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나더러 정국이를 사랑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사귀었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했다. 그러나 정국이를 '사랑하게' 된 후에는 그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좋아했던' 게 되어버렸다. 삼 개월. 비혼주의자이던 내가 마음을 고쳐먹고 정국이와 결혼식을 올리는 데 딱 삼 개월이 걸렸다. 새하얀 수트를 맞춰입고, 환호성과 야유 반반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던 우리 둘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가 보통 이야기의 끝이겠지만, 그랬다면 내가 지금 돌싱이 아니었겠지.


즐겁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연애 시기에는 한 발짝씩 물러서서 서로를 이해해줬고, 품어줬지만 결혼 후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산다는 건 보통의 이해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 신혼 초까지는 참았다. 그러나 반 년이 지나자 둘 다 인내심에 바닥이 났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걸 연애할 때는 왜 몰랐지? 아니, 장담컨데 알았더라도 이런 것쯤이야 사랑으로 수용 가능하다고 넘겼을 것이다. 일어나고 잠드는 것부터 시작해 식성, 취미, 가치관도 모두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싸움은 참고 참다가 어느 날 사소한 일로 레이스를 끊었다. 



'아, 알겠다고요! 누가 안한대요? 진짜 짜증나게...!'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나는 너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어련히 내가 알아서 잘 하니까 신경 꺼요.'

'뭐?'

'형이 날 언제 걱정했다고 그래요? 맨날 잔소리만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정국이도 더 날카로운 말로 되받아쳤다. 감정과 기분이 상한 상태로 끝이 났고, 다음날 화해를 했지만 말했지, '레이스를 끊었'다고.


세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백 번은 넘게 싸웠을 거다. 서로를 향해 손찌검을 하거나 물건이 깨지는 일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펜은 칼보다 날카롭고, 말은 보이지 않은 상처를 더 깊게 내니까. 또 싸움이 났던 날이었다. 30분 가량 주구장창 화내던 중 느낌이 왔다. 조금만 더 싸우면 돌이킬 수 없을 느낌에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을 꺼내자 정국이가 악을 썼다.



'또!! 그만하자고!! 형은 항상 그만하자고 그래!!'

'그럼 그만 안 해? 더 하면 상처받을 게 뻔한데 더 하자고?'

'그런 말로 포장하며 회피하려 하는 게 아니고? 형 방식, 지겹다고!'

'지겨워? 나는 안 지겨운 줄 알아 매번 이렇게 싸우는 패턴? 항상 똑같잖아! 너는 노력해봤어? 내가 말한 대로 하려는 노력이나 해 봤냐고! 그렇다면 똑같은 문제로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형도 지겨워? 그럼 왜 살아? 서로 지겨워 죽겠는데 왜 같아 사는 건데? 애초에 결혼은 왜 했냐고!'

'이런 생활일 줄 몰랐지!!'

'아, 후회하고 계시겠다? 형만 결혼한 거 후회하는 줄 알아? 나도 후회해!! 결혼하지 말 걸!'

'그럼 이혼하던가!'

'해, 해! 못할 줄 알아? 내가 잘못했다고 굽힐 줄 아냐고! 이혼해!!'



...그렇게 됐다. 누구 한 쪽도 물러나지 않고 핏대 서게 싸운 결과는 이혼. 1년만에 이혼남 타이틀이 붙어버린 걸 보니 얼마나 어이없던지.


좋게 끝난 사이가 아니기에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나는 의도적으로 정국이에 대한 연락을 모두 끊었다. 같이 살던 집도 계약을 파기하고 나와 제각기 다른 집을 구했다. 걔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그 전에 한국에 있기는 한지 모두, 모두!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알아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테니까. 또, 전에 알았던 것들과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고. 정국이가 일하던 회사에서 파는 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나였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가 가시겠지. 그래서 우연으로라도 전정국의 머리털 한 끝도 본 적 없었다. 어제 퇴근길에 일어난 접촉 사고로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의미로 시간이 멈춘 것 같더라.



내 뇌에게도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그날 밤 꿈을 꿨다. 배경은 우리가 같이 살던 신혼집이었는데, 수십번은 더 겪었던 그대로 정국이와 내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정국이는 다 풀어헤쳐진 와이셔츠만을 입고 있었고, 나는 딱 달라붙은 바지만을 입고 있었다. 반씩 벗은 상태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는데 어찌나 생생하던지 일순간 현실인 줄 알았다. 화가 날 때면 미묘하게 톤이 올라가는 정국이의 목소리, 뱀처럼 꿈틀대는 눈썹이 보여서.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말로 꿈인걸 알았다. 왜냐하면 1부터 100까지 모두 맞지 않은 우리가,



'웃겨, 나도 할 말 있거든요?'



유일하게 맞은 게 딱 하나 있었는데,



'형 밤일 존나 못한다고!!'



바로 속궁합이었기 때문에.



* *



구남친 구여친보다 무섭다는 게 구남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순간에 떡하니 마주쳐버렸을 때는 더더욱. 다시 떠올려봐도 기가 막힌 일이라 나는 마구 발길질을 했다. 그러다 잘못 차서 발을 찧자 억 소리를 내며 몸을 수그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아침부터 별 지랄은."

"아 발톱 깨진 것 같애...."

"발톱 깨진거 가지고 엄살이 존나 심하네. 배때지에 구멍 뚫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가오 다 잡은 놈이?"



까칠의 극치에다 세상살이 힘든 말투 다 짊어진 목소리. 다크서클이 발끝까지 내려온 윤기 형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 얼굴은 또 왜 그래? 금방이라도 피 토하고 쓰러질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뾰루지 하나 안 났네. 완전 부러운 피부다.



"어떤 멍청이가 싸놓은 똥 수습하느라 38시간동안 한 숨도 못 잤어."

"안됐네. 그러게 현장을 택하지. 차라리 내가 낫네, 칼빵 맞으면 아프지만 잠은 잘 수 있으니까."



보통 평범한 회사에서 출근해서 칼빵이니 38시간이나 못 잤다느니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다. 야근을 아무리 빡세게 시켜도 38시간은 오바니까. 그래, 여기서 눈치챘겠지.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다. 지금 내가 있는 건물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 옆에 위치한 증권 회사지만, 겉만 그렇게 보일 뿐. 증권 회사로 위장한 이 곳은 특수 요원들이 쓰는 시크릿한 일터다. 아, 살인청부업자는 아니다. 그 반대면 몰라도. 구린 행동들을 하는 그림자들을 잡아서 처리하는 게 나와 윤기 형, 그리고 여기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업무였다.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입사하는 방법은 거의 백 프로 추천제였다. 나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민윤기였고.


윤기 형은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독특했다. 매번 어디론가 사라져 틀어박혀 있는 데다가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던 인간이었다. 고등학교가 같았는데, 형은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음습한 얼굴로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었다. 말을 나눈 적도 손에 꼽았다. 거기, 문 닫아라. 야 창문 좀 닫아. 조용히 해. 이게 다였다. 이 형이 대학교를 어디 갔는지 뭐 하고 사는지 몰랐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몇 년 후, 길 가다가 마주쳤다. 박지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더니 윤기 형이었다. 안 친했지만 별개로 허연 얼굴을 잊을 순 없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은 10년이 지나도 또렷했을걸. 하여튼, 그때의 나는 취준생이라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다. 냉정한 현실을 그제서야 온몸으로 느낀 햇병아리 사회인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윤기 형이 그랬다.



'너 취직할래? 돈 많이 줘. 음, 조금 바쁠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돈은 졸라 많이 줘.'



설명은 허접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때의 난 취직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뜨였다. 구원자를 만난 양 형의 두 손을 덥썩 붙잡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네! 취직! 할래요!! 데려가 주세요! 근데 범죄는 아니죠? 응 아냐. 그리고 그게 여기였다.


후에 윤기 형한테 왜 나냐고 물어봤었다. 나보다 더 제격인 사람이 쌔고 쌨을 텐데 왜 나였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을 데려다 훈련을 시키고 가르쳐야 하는 것보다는 시설에서 양산된 요원들과 컨텍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했더니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했다. 걔네들은 단독행동을 즐겨하는 애들이라 다루기가 무지 어렵다고. 그리고 자기가 정말로 가능성이 없는 일반인 따위를 데려왔을 것 같냐고 했다. 다음으로 뭔가를 좔좔 읊어줬는데, 와 난 그때 내 프라이버시가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렸을 때 커서의 꿈을 그려볼 때 이런 영화에 나오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자, 는 전혀 없었지만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맞다. 천직이다.



"됐다 난 걍 실내 작업이 내 적성이야. 아, 맞다 그거 아냐."

"뭘요?"

"여수 쪽 더이상 안 해도 돼. T팀이 처리했다더라."

"그걸 할 만한 사람이 있어요?"

"어, 이사온 애가 가지고 왔어."



나는 이만 자러갈 거니까 질문 그만. 말을 끝내고 사라지는 윤기 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떠올렸다. T팀은 내가 속한 팀과 경쟁구도를 펼치는 같은 현장 팀이었다. 그랬는데 4개월 동안 K팀 -내 팀이다- 에 밀리고 있긴 했다. 뭐, 경쟁구도라고 해도 어차피 한 조직 안에 속한 사람들이니까 악감정 같은 건 없었다. 가끔씩은 합동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악감정이 없다는 게 해당 팀에서도 최상의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말을 뜻하는 건 아니지. T팀의 팀원들은 팀장에게 잔소리를 오지게 듣곤 하는 모양이었다. 유능했던 한 명이 은퇴하고 나서 내 팀과 실적 차이가 크게 벌어진 거였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메울 괴물같은 신입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누굴까? 너무 궁금한데.





궁금해하지 말았어야 했다. 박지민 이 개자식아.


몇 시간 전의 과거의 나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하며 술을 들이켰다. 반대쪽에 앉아있는 전정국 또한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안쓰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국이가 왜 여기서 나오죠 천지신령님? 설마 신입이 정국이일 줄은 털끝만큼도 상상하지 못했다. 몇 개월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 잘 마무리되어 회식을 하자는 팀장님 말에 좋아라 하며 따라나온 죄밖에 없다. 열심히 집어먹고 있는데 T팀도 같은 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그렇다면 아침에 들었던 그 대단한 놈이 있겠네- 하고 뒤돌아 본 죄밖에 없다. ...죄 엄청 크네. 술잔을 쥔 오른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전정국이 나와 같은 요원이었다니. 주류 회사를 다닌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내가 바보고, 이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 상표를 단 주류는 입에도 대지 않은 내가 불쌍해 죽겠다. 좋아하는 맥주가 있어서 얼마나 슬펐는데...



"정국이 짠-!"



T팀의 팀장은 정국이를 아예 옆에 앉혀두고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긴, 나라도 그럴 거다 복덩이가 굴러들어온 거니까. 도대체 몇 가지를 섞어야 저런 색을 내는지 의문스러운 술을 다 넘긴 정국이는 눈알을 부라리며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집어 와작 씹었다. 그러니까, 콩나물 대가리가 마치 내 머리인 양 씹었다는 말이다. 쟤를 진짜 어쩌면 좋지. 회식 내내 눈싸움을 하면서 먹었던 것 같다. 거리는 떨어져 있는데도 바로 앞에 두고 1대 1 대결을 펼치는 선수들마냥 내가 소주를 원샷하면 정국이도 소주를 원샷하고, 니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하자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량이 비슷했던 터라 정신력 싸움이었다. 스멀스멀 취기가 올라오는데 평소 같았으면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잤을 테지만 아직 죽지 않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바람 좀 쐬러요. 저 안돌아오면 집에 간 줄 알고 그냥 가시고 내일 봐요."


 

말할 때마다 숨이 아니라 알코올을 내뱉는 기분이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간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목을 뒤로 젖혔다. 속이 너무 안 좋은데. 도로변을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세로로 길게 반짝거렸다. 정말, 이대로 집이나 가야겠다. 그러려고 했는데, 뒤에서부터 들린 발소리가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다. ....박지미인. 1미터 옆에 떨어진 거리에 나와 똑같이 벽에 몸을 기댄 정국이가 중얼거리다가 히 웃었다. 자세는 한없이 건들댔다. 한 쪽 다리를 쫙 피고, 다른 다리는 구부정하게 굽히고 손은 양 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날 빤히. 저거 취했네. 뭔가 시비를 걸고 싶어져서 입을 뗐다. 너 지금까지 나한테 거짓말 했냐. 주례할 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삶을 살겠다면서. 직업부터가 그짓말이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맥주 1년동안 못 마신거는 어떻게 보상할 거야."

"거짓말 한 건 형도 마찬가지잖아. 펀드매니저라고 했으면서.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로 안 오는 건데. 이게 뭐야, 진짜."

"내가 할 말이다 그건. 내가 먼저 있었다? 난 떠날 생각 없으니까 옮기려면 너가 가."

"하여튼 유치하게 굴어 또..."



목을 두어 번 꺾더니 고개를 늘어뜨렸다. 숙인 고개 사이에서 술에 쩔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짜증나서 어떻게 출근하지... 그러더니 부르르.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서 비척비척 걷기 시작하는 정국이의 뒤에 대고 말을 던졌다. 차 수리비는? 그러니까 또 발걸음이 뚝. 천천히 돌아진 몸이 날 응시했다. 모르는 척 하는 거 같아 간단히 설명을 덧붙였다.



"니가 어제 내 차 박았잖아."

"...이번 달 월급 다 형 줄게. 됐지?"



손을 휭하니 흔들고 비틀대며 걸어가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는데 몸이 푹 꺾이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다리가 움직였다. 다리가 꼬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뻔한 애를 잡고 대체 몇 병이냐 마신 거냐고 캐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야, 전정국. 흔들지 마 토 쏠려 시바...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흔들지 않고 얌전히 일으켜줬다. 아무래도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걸로 보아 집까지 갈 수가 없겠는데. 휘휘 둘러보다가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신호등을 건너 8층까지 올라오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처음 알았다. 나한테 의지하기 싫어서 계속 몸을 떼어내려고 하는데 한 발만 떨어지면 자꾸 바닥과 충돌하려고 해서 종래에는 죄수를 연행하는 간수마냥 꽁꽁 잡아버렸다. 에휴, 어쩌다가 내가 전남편의 뒤치닥거리를 하고 앉았을까. 받은 키를 밀어넣자 초록색 불이 뜨며 문이 열렸다. 아웅... 술에 쩔어서 애교인지 짜증인지 모를 그 중간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철퍽 엎어진 정국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몰라, 길바닥 아니니 이제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찝찝함이 가득 묻은 손을 씻고 호텔을 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발목을 잡는 힘에 하마터면 나자빠질 뻔 했다.



"어디 가....시발롬아..."



내 발을 잡고 죽 잡아당기는 행동에 몸이 주저앉아졌다. 히히 박지민 완전 짜증나 이 개새기.... 아기처럼 웃는 얼굴로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다 쌍욕 뿐이었다. 짜증을 넘어 화가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정국이의 말이 이어졌다. 야 그거 알어? 형 진짜 개시발새기인 거. 이혼하고 나서 진짜 단 하루도 형 그리워한적-없었다-?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웃는데 예쁜 얼굴은 그대로라 열이 받았다. 나도거든. 너랑 결혼한 게 세상에서 제일 잘 못한 일이라고 두고두고 후회하거든. 받아치자 역시 같은 생각이네, 한다. 근데 말이지-



"나 형 몸은 가끔 생각난다?"

"하..."

"섹스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는데. 진짜...그것만 아니었으면 반 죽여 놨는데,"



형이랑 하면 맨날 좋았어서... 완전 짜증나. 바닥에 누워 날 올려다보는 정국이의 눈이 다 풀어져 있었다. 술기운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에서 비롯된 건지는 몰라도, 붉게 달아올라 있어서. 그래서 내 얼굴을 끌어당기는 정국이의 손을 저지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입술이 포개지고, 살짝 찌푸려지는 눈가를 야하다고 생각해버린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술냄새가 좁은 복도 사이를 다 채우고 있어서, 멀쩡한 정신을 술이 다 흐려놓아서. 정국이의 목덜미에 이를 세운 것도 다...술 때문이다. 



* *



유난히 무거운 눈두덩이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두통이 덮쳐왔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통을 목에서 분리하고 싶은데. 손으로 이마를 강하게 싸매며 몸을 일으켰는데, 이불이 흘러내렸다. 근데 왜 이렇게 시원하지.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두통에 눈을 뜨니 눈앞에 펼쳐진 건 널린 옷가지들이었는데 무서운 건 한 사람분이 아니어 보였다는 거다. 왜냐하면 바지가 두 개여서. 뭐야, 뭐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술김에 사고를 쳐버린 전적은 대학생 때 빼고는 없었는데 대체. 기억이 싹 다 날아가 있어서 심히 무서웠다. 그리고 이마를 감싸던 손을 침대로 내려놓았는데 옆에 사람이 만져져서 너무...무서웠다. 어쩐지 손에 익숙한 피부의 느낌이라서. 아 설마. 아, 제발 아니게 해주세요. 고개를 돌리기 전에 몇십 번이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도가 무색하게, 옆자리에 누워서 자고 있는 알몸의 전정국을 보고 웃었다.


 

아,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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