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있잖아요. 바람에 나부끼는 정국이의 머리칼이 푸석하다. 부쩍 야근이 잦아졌다고 설명했었던,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을 때의 시절이다. 원래 비혼주의자였다면서요. 응. 그러면 나와 결혼하는 거.. 언젠가 후회하지 않을까요? 나는 정국이를 바라보았다. 형이 나와 결혼한 사실을 후회하면 어떡하죠. 알고보니 잘 안 맞아서 싸우는 일이 잦아지고 화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어쩌죠. 혼자가 나았다, 라고 생각한다면. 불안과 걱정이 담겨있던 물음에 나는 뭐라고 답했더라. 내 말에 안심이라는 듯 웃음짓던 그 애의 얼굴은 기억나는데.
두 시간이나 지났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협탁 두 번째 서랍에 들어있는 담배를 찾았다. 필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던 내 손은 어느 순간 얌전히 멈춰 있었다. 서로에게 잘해주지 말자던 정국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아서. 호의라고도 할 수 없는 사소한 행동에도 혹시나 마음이 약해질까 선을 그었던 너. 그래, 정국이의 말이 맞았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균열된 부분을 애써 붙들며 버텼지만 끝내 놓아버리고,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려보겠다고? 웃기는 소리지. 할 말 못할 말 면전에 대고 소리쳤었잖아. 어떻게 하면 상처를 더 잘 줄 수 있는지 준비하느라 혓바닥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후...."
머리칼 사이를 마구 헤집었다. 정국이가 맞는 말을 했는데 속은 왜 이리도 쓰린 건지 모르겠다. 아마 그랬나 보다. 잠시 동안 본능에 지배당해서, 그래서 예전의 좋았던 기억만 떠올라서 그랬나 보다. 질근질근 씹어대서 엉망이 된 담배 필터를 빼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해야할 일이 뭔지 안다. 정국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 또다시 악감정밖에 남지 않은 관계로 돌아가는 것. 만일 실수를 하게 되면 상대에게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을 위치를 고수하는 것.
사건이 터진 건 이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下
대개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이라면 요원들은 항상 멋지구리하게 수트를 빼입고 다니고, 벨트에 권총을 소지하여 적들을 제압하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폭탄이 빵빵 터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콘크리트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이 늘상 일어나는 건 아니다 -폭탄은 엄청나게 드물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 우리는 닥친 위험을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는 방지하기 위해 힘을 쓰니까. 위험분자가 나타나면 미리 감시하고 싹을 잘라낸다. 일을 굳이 크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돈도, 시간도 더 많이 드는데. 아무것도 모를 때 첩보 영화를 보러 가면 와 쩐다, 하고 내내 감탄했으나 여기에 녹아들고 난 후에는 냉정한 시선으로 분석하게 됐다. 귀찮게 저렇게 돌아서 가야 하나? 그건 건드리면 안 되지! 아니, 그냥 가는 거야? 영화가 끝난 후 다른 관객들은 재밌다느니 정말 멋있다느니 자와자와하는 말들이 들렸지만 나는 복장이 터져 있었다. 이래서 자기 직업이 나오는 영화는 보러 가면 안 되나 보다, 스토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일일이 분석하고 있기 바쁘니. 나도 저런 사람 되고 싶다. 막 날라차기 하고, 총알 피해서 동료 구하러 가고! 개-쩔어. 침을 튀기며 감상평을 늘어놓는 중딩의 옆을 지나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영화처럼 사건들이 하루달리 빵빵 터진다면 난 그만두겠습니다. 차라리 제 머리를 쏘십쇼.
그래도 뭐, 아주 없진 않다. 내 복부 오른쪽에는 흉터가 남아 있는데 7개월 전 임무 중에 칼을 맞은 흔적이다. 더운 날씨 탓에 곪아서 꽤나 고생했었지. 비단 나만 상처들을 달고 있는 건 아니다. 팀장님은 왼쪽 팔 부근에 살이 패인 흔적이 있고, 다른 동료는 가슴께에, 그리고 어느 동료들은... 목숨까지 잃기도 했다. 처음으로 동료를 잃었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가라앉았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잠금이 해제된 도어락의 문고리를 잡고 돌렸는데, 센서등만이 켜져 있는 어두운 집 안을 유심히 바라봤다. 신발을 벗어 바닥에 디딘 후 한참을 서 있자 센서등이 꺼진다. 양 손가락을 차례로 움직여 푼 나는 다리를 움직이다, 가까워진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을 피해 머리를 숙였다. 윗 공기를 가르는 조금은 섬뜩한 소리. 놈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으나 그쪽도 피했다. 지극히도 평범한 몇십 개의 가구가 사는 아파트에서 때아닌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찰나동안 반짝인 쇠붙이는 한 개가 아니었다. 퍽, 하고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간 나이프가 벽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따끔한 감각과 함께 배어나오는 피에 신경을 쓸 시간은 없었다. 나는 목줄기를 향해 들어오는 팔을 붙잡고 발끝으로 놈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부러질 정도로 아주 세게. 흉기를 휘두르던 팔을 세게 비트는 행동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다. 되려 성한 다른 팔로 새로운 나이프를 꺼내들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내가 더 빨랐다. 빼앗은 나이프로 손목 한가운데를 박아넣고 다른 팔을 대충 빼놓자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꺾이지 않은 형형한 눈. 우물거리는 입술에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쑤셔넣어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매고 있던 넥타이를 힘겹게 풀러냈다. 우드득, 단단한 이에 아작나는 바람에 내 의지가 아닌데도 손이 덜덜 떨렸다. 진짜 아팠다. 넥타이를 입안에 쳐넣은 다음 손을 살폈다. 선명하게 난 잇자국 사이로 퐁퐁 솟아나는 붉은 피. 하, 새끼 세게도 물었네. 나는 미간을 좁히며 핸드폰을 꺼냈다. P인데요, 거친 손님이 하나 찾아와서요.
- 뭐? 어느 쪽인데.
"그건 나도 모르겠고. 빨리 와요 여기 내 둥지야. 근데 내가 건든 게 뭐 있어요? 이런 놈들이 올 만한 건수를 다뤘나 최근에?"
벽에 고정된 팔목을 빼내려 애를 쓰기에 발로 살짝 정강이를 걷어차주며 물었다. 꽤 고통스러웠을 신음은 넥타이에 먹혀 작게만 흘렀다. 저런 놈이 왜 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게 없었다. 나와 비슷한 말만을 내뱉는 윤기 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를 닦아내려 휴지를 뽑았는데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게 있었다. 호텔에서 열렸던 비공개 자선 파티. 하루 동안 도청기와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었으나 별 소득이 없어 구석으로 밀어놓았던 내용들. 그 일과 관련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형, 자선 파티때 자료 돌려봐요.
"그리고 그날 우리가 조금이라도 스쳐 지나갔던 인간들 싹 다 털어내..."
쏟아내던 말문이 막혔다. 파티에 들어간 사람은 나하고 정국이잖아.
왜? 뭐야, 무슨 일이야? 형의 물음에 나는 다급하게 둘러댔다. 확인할 게 있어서, 빨리 이쪽으로 사람 좀 보내요. 대답도 듣지 않고 끊은 나는 정국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부에 저장되어 있지조차 않은 11자리 숫자. 하지만 손이 외우고 있었다. 1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라, 받아. 나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간절하게 빌었다. 두 번째로 몸을 섞은 이후 정국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같은 건물에 있기에 마주치고, 합동 작전도 있었기에 좁은 공간에 앉아서 설명을 듣고 심지어 작전에 관해 의견 교환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족을 전혀 덧붙이지 않았다. 모르는 척, 단순한 비즈니스 동료로 대하는 척. 하지만 느끼고 있었다. 나도, 정국이도. 서로를 물어뜯을 듯 세우던 이를 더 이상 세우지 않게 되었으니까. 지금 내 전화를 받고 왜 또 이러냐고 차가운 말이라도 날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웃으며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바로 끊을 텐데. 그러나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는다. 안내음까지 기다릴 수 없어 통화종료를 누른 후 다시 걸었다. 황급한 마음에 물어뜯긴 손가락으로 액정을 두드려 위에 피가 배인 지문이 묻었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정국이를 찾아 나가고 싶었지만 저 놈 때문에 나갈 수도 없고. 연달아 네 번이나 받지 않는 정국이에 미친듯이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아냐, 내 직감이 틀린 거겠지. 스스로를 가라앉히며 중얼댔다. 자선 파티와 연관이 없는, 나만 했던 임무와 관련이 있겠지. 집으로 온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앞선 전화들과 똑같이 신호음만 가고 받진 않는 정국이에 끊으려고 했을 때, 받았다.
"정국이야?"
나도 모르게 밝아져서 물었으나 들린 목소리는 정국이가 아니었다.
- 보호자분 되시나요?
굳은 표정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정국이를 쳐다보았다. 총알이 어깨를 관통했다고 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출혈이 심했어서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병원에 들어닥치고는 곧바로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 상상이 갔다. 나와 비슷한 일이 있었겠지. 저에게 왔던 놈은 처리했을 터였다. 그 상태로 쓰러져 일반인의 눈에 띄이기라도 하면 상황이 좀 복잡해질 것이기에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을 거다. 나는 깨끗한 붕대가 감긴 손가락으로 곱게 눈을 감고 있는 정국이의 볼을 쓸었다. 아까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도,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혈액들도 어떻게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내 몰골을 보고 기겁하던 간호사가 치료해주고 붕대를 감아준 손가락. 수근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조폭이라고 여기는 듯 한데, 정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볼을 쓸던 손을 거둔 나는 옆에 놓여진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잠금 장치가 걸려 있었지만 쉽게 풀었다. 패턴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으므로. 통화 기록으로 들어가자, 감정을 욱여넣느라 목울대를 크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 편]
나의 번호를 저장한 이름. '그래도, 내 편.' 뭐라고 저장했냐고 수없이 물어봤지만 정국이는 단 한번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자기, 여보 아니냐고 추궁했지만 아니라고 세 단어라고 했다. 설마 그냥 박지민이라고 저장했냐는 물음에 까르르 웃어제쳤던 정국이.
- 그냥,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야.
이건 너무하잖아. 정국이는 이혼하고 나서도 내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면과 자고 있는 정국이를 한참이고 번갈아보던 나는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이 바꿔달라고 하십니다. 정국이의 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건네진 전화를 받아들고 병실을 나섰다.
"그래서, 나왔어요?"
- 예상했던 것보다 큰 일이야. 홍콩에서 유행하는 delta-9있지.
"약쟁이는 우리 소관 아니잖아요."
그건 마약처리반이 담당하는 거 아닌가? 그러자 부정적인 반응이 들렸다. 파티장에서 우리가 원래 노렸던 타겟 옆에, delta-9를 들어오려는 놈이 있었어. 그런데 내부에서 소란이 있었나 봐. 파가 갈렸는데 원래 추진하려던 그놈 말고 다른 파가 주권을 잡았어. 찾아보니까 이미 죽었더라. 나는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여기까지만 들었는데도 벌써 단단히 꼬인 느낌이 났다. 그래서요? 그래서 뭐냐면, 죽었던 놈이 홍콩 쪽이랑 손을 잡아서 계획안을 다 짰는데 그 계획안이 홀랑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추적하려고 다 캐내다 보니 너네가 걸렸나 봐. 거짓 신분 두 명, 딱 봐도 각 나와, 자기들을 노렸다고 짱구를 이상하게 돌린 거지. 국내로 델타 나인을 들여오면 조 단위로 벌어들이니까 정보도 알아낼 겸 윗선에 말이 들어가지 않도록 미리 처리하려고 했던 건데, 멍청한 짓 덕분에 우리가 알았지 뭐.
- 상처는 어때? 전정국은 총상이라고 하던데.
"저는 멀쩡해요. 손가락 두 개만 빼고는. 정국이도 곧 깨어날 거래요."
- 그래, 다행이다. 더 알아내야 하겠지만 오더가 내리면 우리쪽도 개입 권한이 있을 거야. 둘이나 공격당했으니까.
"개입 권한이 없었어도 꼈을 거예요 난."
뒤꿈치로 바닥을 두드린 나는 뭐? 라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먼저 찔러놓고 우리가 해결할 테니 빠지라, 그건 절대 안 되죠. 너 다쳤다며. 다친 수준이 아니라 걸레짝이 되었다고 하더만. 손가락을 못 쓴다고 팔을 못쓰는건 아니잖아요. 아 됐어요 그렇게 알아요. 나 안 넣어주면 진짜 평생 지랄할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끊은 나는 핸드폰을 돌려줬다.
"팀장님한테 전화 걸려오는데요?"
"그냥 씹어. 내가 지금 갈 거니까."
정국이가 누워 있는 병실을 돌아본 나는 걸음을 옮겼다. 몇 시간은 더 흘러야 눈을 뜨겠지. 정국이를 죽이라고 명령 내린 놈을, 반드시 내 손으로 잡아 족칠 거다.
* *
시간은 생명이다. 일반 사람들에게 1초란 지극히도 무의미한 시간이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 1초는 엄청난 무게를 가진다. 초침이 똑닥이는 차이로 성공과 실패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도 한다. 발목 부근에 숨긴 나이프 두 개와 총격을 대비하기 위한 방탄 조끼. 실탄을 채워넣으며 귀로 흘러들어오는 지시에 주의를 기울였다. 약간 불편하기에 다시 끼우려 무심코 손을 움직였던 나는 인상을 쓰며 작게 욕설을 뱉었다. 집에 숨어있던 놈에게 손가락 두 개가 아작난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았으니, 고통이 생생한 건 당연했다. 5분 후 C조부터 차례로 돌입한다. 놈들은 20명. 지하에 두 명, 2층에 다섯 명. 마지막으로 점검하면서 생각했다. 정국이는 일어났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지금 내가 델타 나인을 들어오려는 현장에 있기까지 걸린 48시간은 최근 1년 중에서 본부가 가장 급박하게 돌아갔던 시간이었다. 병원을 떠나 본부로 돌아갔을 때 시각은 새벽 3시가 넘었지만 전 층의 불이 켜져 있었고 온 컴퓨터들이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까지 정신이 없는 사이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약이라는 특성상 우리가 단독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고, 정보도 그쪽이 잘 넘겨주지 않으려 하는 게 보통이었다. 동종 업계는 경쟁 의식이 있으니까. 하지만 지랄견이라는 별명이 붙은 내가 어디 갈 쏘냐. 손을 떼라는 마약밀수 담당자에게 쉬지 않고 쏘아붙였다. 나는 사실 말싸움도 잘 한다. 안타깝게도 담당자는 머리는 좋았으나 말빨이 후달렸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쪽과 합세하기로 한 발 뺐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현장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목숨이 위험할 현장에는 더더욱. 본래 이 세계를 모르던 일반인이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왜?
- 30초 후 작전 개시.
잡념을 떨쳐냈다. 이유가 뭔지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잠시 후에 이어질 현장에 집중하기로. 9, 8, 7. 나는 반대편에 자리한 팀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몸을 숙여 재빠르게 이동했다. 무방비하게 서 있는 한 놈의 뒷목을 세게 가격해 기절시킨 다음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같이 들어온 팀원도 똑같이 해서 지하는 예상했던 것처럼 쉽게 처리됐다. 철문이 무거워서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라 1층에 놈들이 있으면 들킬 게 확실했는데, 하늘이 도와서인지 1층에는 아무도 없어서. 여전히 아릿한 손가락 세 개를 한 번 털고 올라가려고 시선 교환을 했을 때였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뒤에 있던 팀원이 쓰러졌다. 이, 씨발. 발각됐다. 허술한 척 했던 건 다 계략이었나. 철근 여기저기를 울리는 총탄을 피해 빠르게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야지만 주 거래 건물로 넘어갈 수 있는데. 계단을 돌자마자 총구를 드는 상대에 먼저 쏴 총을 놓치게 만들며 반대편 벽으로 몸을 숨겼다.
"지원 요청 바랍니,"
도움을 요청하다 또 나타난 상대에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으나 찰각이는 소리만 났다. 옆으로 던져버리고 발목에 숨겨둔 나이프를 꺼내 정중앙을 향해 날리자 고꾸라지는 걸 본 것까진 좋았으나 쓰러진 놈 뒤에서 나온 놈이 나에게 총을 쏜 건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다친 손가락 쪽의 팔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더 못 쓰게 됐다.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생명 수당 타게 생겼네. 이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중얼거리던 나는 날 쏜 놈이 갑자기 쓰러지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빼앗은 총으로 깔끔하게 전방까지 정리하고서는 뒤도는 인물은.
"언제까지 쉬고 있을 거야."
정국이었다. 놀리는 어조로 가볍게 목울대를 울리는 웃음 소리.
내 앞에까지 걸어온 정국이는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손을 잡는 대신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네가 여기 있어? 형이랑 같은 이유로. 정국이는 허리를 숙여 내 팔을 잡으며 대답했다. 너 어깨 아직 안 나았잖아. 그건 형도 마찬가지잖아. 또 자기만 잘난 척 하긴. 잘난 척이 아니라, 까지 대답하고 정국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 하는데 빠르게 눈빛을 바꾼 정국이가 방아쇠를 당겼다. 육중한 소리가 난 걸로 보아 내 뒤에 적이 있었나 보군. 자체적으로 일어서는데 정국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해서 살펴보니 관통상 당한 어깨가 약간 내려가 있다.
"너 역시 무리해서 나왔지."
"형보단 쓸만하거든. 일어났으면 가자, 빨리 끝내게."
받아든 실탄을 채워넣으며 정국이를 흘깃댔다. 그새 저만치 앞으로 간 정국이의 뒤에 따라붙으며 물었다. 진짜 왜 나왔어? 형이랑 같은 이유라니까. 계단을 올라가면서 느릿하지만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닐걸. 맞을걸. 이어진 건물 통로를 이동하며 기다리던 상대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면서 그랬다. 정국이에게 날아오는 나이프를 보고 머리를 눌러 숙이게 만들고 입을 열었다.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줄이 끊어져 기능을 상실한 무전기를 빼내 던졌다. 다리를 길게 걷어차 한 놈의 턱주가리를 세게 후려진 정국이는 곧바로 돌진하는 상대의 팔을 꺾어내 그의 복부에 찔러 넣고 돌아와서 대답했다.
"집에 가는 길에 무식한 놈이랑 붙었을 때,"
철근을 뛰어넘는 바람에 일단 거기까지 밖에 듣지 못했다. 한 발에 하나.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에 훙하니 바람이 불었다. 야 씨발 야 모여 모여!! 사방이 막혀 있어 저들끼리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내 옆으로 합류한 정국이에게 방금 뺏은 나이프를 건네주자 방금 전 못 들은 말이 이어졌다.
"형한테도 갔을까 생각했거든."
일어났는데, 쉬라고 하더라고. 마약이 개입되어 있으니 우리 분야가 아니고, 다친 김에 쉬라고 했는데. 쓰러진 사람의 위를 넘어가며 문장이 이어졌다. 근데 형이 나갔대. 무전에 나와 함께 있다고 대답을 한 정국이가 피식 웃었다. 위층이 마지막이래. 다른 쪽은 끝났다고. 나는 전달받은 지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바싹 다가온 정국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엉망으로 뒤집어진 머리카락, 피가 미세하게 배어나온 볼.
"형이 왜 여기에 나왔는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나도,"
다음 말을 듣지 않고 입술을 부딪쳤다. 길진 않았다. 바로 입술을 떼어냈으니까. 나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속에 들어있던 말을 끌어올렸다. 있잖아, 지금 우리한테는 다섯 계단 만큼의 시간이 있어.
"뭐냐면, 결정을 내릴 시간 말이야."
나는 위를 한 번 살펴본 후 고개를 도로 돌렸다. 미친 생각을 아까부터 했거든. 우리가 이미 예전에 한 번 겪어봤던 거. 나를 보는 눈동자를 주시하며 이어갔다. 후회했고, 또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잖아.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닫혔던 문이 날아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여댓 명의 인간들. 단련된 움직임으로 급소만을 골라 내리찍었다. 첫번째 계단. 아작이 난 손가락은 실로 아팠지만 한 명이라도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휘둘렀다. 두번째 계단. 위에서 총을 갈기는 바람에 얼결에 내 앞에 있던 사람을 방패막이로 써 버렸다. 밑에 머물러 있던 정국이 덕분에 총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세 번째 계단을 올라, 네 번째 계단. 한 번에 세 개를 뛴 정국이가 문 안으로 사라졌다. 재빨리 따라들어간 나는 정국이의 등을 노리는 자를 해치운 다음 몸을 붙였다. 서로 탄탄하게 붙은 등이 느껴지고, 그 다음에는 방향을 바꾸어 마주본 상태로 정국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빈 탄창들과 사방을 울리는 앓는 소리들. 상황 종료다.
정면만을 바라봤던 상태에서, 눈동자를 살짝 움직였다. 정국이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몇 초간의 짧은 눈빛 교환 끝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총이 바닥으로 떨어져 철그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내 등 바로 뒤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후에 우리 쪽에서 도착한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렇게, 계속. 물음에 대한 정국이의 답은 듣지 않아도 방금 전 나눈 온도로 알았다.
그래, 좋아.
미친 짓 한 번 더 하자.
라고.
* *
"왜 어렵게 가? 이렇게 하면 되는데. 형은 머리라는 게 있긴 해? 아, 그래서 지금까지 현장만 뛰었구나."
"팀장님, 정국이 이번 작전에서 빼주시면 안 되나요?"
불평을 가득 토해내도 막무가내다. 나는 입을 비죽 내밀고서는 팔짱을 꼈다. 나름대로의 짜증 표현방식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면 어떡해. 옆에서 깐족대는 정국이의 입을 어떻게 해 버리고 싶었다. 음, 주먹 말고. 다른 거. 결국 정국이의 의견이 수렴되어 새롭게 짜여진 작전을 받아들고 브리핑실을 나왔다. 형 삐진 거 아니지 또? 또가 왜 붙어? 내가 언제 삐쳤던 적이 있어? 짖궂은 표정이 가득한 정국이의 볼을 꾸욱 밀어내며 톡 쏘아붙였다. 눈길도 주지 않자 한 바퀴 빙 돈 정국이가 어깨에 달라붙어서 쭝얼댔다. 형 엿먹이고 싶어서 한 건 아니야. 알지?
"알긴 뭘 알아."
손을 치우라고 어깨를 흔들자 요상한 소리를 내던 정국이는 내 볼에 쪽 하고 떨어졌다. 부드러운 감각에 눈을 돌리니 고새 손을 흔들며 T팀으로 가고 있었다. 저걸 어찌해야 하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더 이상 짜증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정국이의 뽀뽀가 받고 싶어서 연기를 한 거였으니까.
결혼은 미친 짓이란 걸 난 어릴때부터 알고 있었지. 하루하루가 다툼과 화해의 연속이라는 걸. 머리아픈 건 싫어요, 결혼은 안 할 거예요. 그렇게 말했지만 두 번이나 해버리고 말았다. 예전에 느꼈던 것처럼 후회할지 몰라. 지금도 후회라는 걸 한다. 처음 결혼했을 때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해질걸- 하는 후회. 애초에 생김새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인데 어떻게 모든 게 다 맞을 수 있겠어. 결혼생활이라는 건 맞지 않은 부분을 맞추어나가는 것, 각진 모서리를 조금씩 둥글게 만들어 나가는 것. 그리고 매일 후회하면서도 또 사랑하는 것.
나는 한 사람과 결혼을 두 번 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자, 가장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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