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이 전쟁터로 넘어간 지 한 달. 정국은 매일매일 기다렸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그래서 박지민이 제 옆으로 얼른 돌아오기를. 혹시라도 다칠까봐 지민의 손에 방어막을 쥐어주긴 했지만 안심이 되질 않는다. 진전없이 멈추어진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다음에 뭘 추가해야 하더라?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아, 전원을 껐다. 정국은 스크린에 나타나 있는 초록색 점을 보았다. 카메라에서부터 발신되는 위치표시였다. 박지민은 항상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니, 저 표시가 뜨고 있는 곳은 지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다치지 마. 정국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항상 웃던 그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돌아와. 그 때, 정국이 벌떡 일어났다.
김남준! 정국이 남준이 있는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남준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모니터 가득 재생되는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급하게 달리던 정국의 발이 영상을 보고 우뚝 멈추었다. 과격한 테러리스트 집단이 전 세계로 보내는 협박 영상이었다. 인질을 한 명씩 차례대로 죽이겠다는 경고 영상. 지지직거리는 영상이었지만 한 사람만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정국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저..거, 저거.. 박지민이지?"
떨리는 손으로 영상 안의 사람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박지민이잖아, 맞잖아. 영상 화질이 좋지 않아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보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지민이라는 것은 더 명확하게 알고 있다. 왜 지민이가 저기 잡혀있어? 정국이 남준의 멱살을 잡았다. 야, 왜 박지민이 저기 가 있냐고. 정국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 나갈래. 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남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정국이 영상 속에 담겨있는 지민에게 눈을 고정하면서, 여전히 남준의 옷을 붙든 채 반복했다. 내보내줘, 김남준. 어? 그때처럼 해줄 수 있잖아. 남준의 멱살을 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정국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나갈래. 나가고 싶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박지민이라는 세 글자밖에 들어있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도 박지민의 얼굴밖에 보이지 않아서. 인질들이 잡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과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국이 안절부절 못하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찌나 세게, 계속 물어뜯었던지 피가 뚝뚝 나올 지경이었다. 남준이 그런 정국의 손을 잡아내렸다.
"하지 마. 괜찮을 거야."
정말 그럴까? 정국이 생각했다. 맞아, 그럴 거지만 그래도. 아 제발, 제발. 정국이 간절히 기도했다. 이미 두 명이 죽었다. 빨리 가지 않는다면 지민이 희생당할 가능성만 커진다. 기계음이 공중을 웅웅 떠돌아다녔다. 한 기의 제트기가 착륙하고 정국이 펄쩍 뛰어내렸다. 모래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검은동굴 안. 거기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곧이어 제트기 두 대가 더 착륙했다. 군인들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남준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제 손이 닿는 범위에서 사라진 정국을 확인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정국, 위험해!!"
위험하지 않아. 정국이 엎어질듯 엎어지지 않을 듯 휘청거리며 달렸다. 보초를 서고 있던 괴한들이 나오며 총을 겨눈다. 불꽃을 내뿜으며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된다. 하지만 정국에게 향하는 총알들은 정국을 맞추지 못하고 어느 순간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뭐야?! 뭐야!! 괴이한 현상에 적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기들끼리 빠르게 주고받다가 멀리서 날아오는 총알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정국은 헉헉거리며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둡다, 어둡네. 이러면 내가 보고 싶어하는 네 얼굴도 안 보이겠어. 저를 향해 날아오는 총알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국에게 달려들려던 사내가 뒤에서부터 날아온 총알에 맞아 픽 고꾸라졌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지나친다, 피냄새가 나는 곳을 지나, 지민이 있을 곳으로. 정국이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발을 멈췄다. 정국은 터질 듯한 가슴을 짓누르며 이름을 불렀다.
"...박지민?"
하지만 그곳에 지민은 없었다. 오로지 있는 것은 지민의 카메라와, 호수처럼 마냥 넘실대는 피웅덩이 뿐이었다. 눈앞이 빨갛다. 아찔, 현기증이 난다.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정국이 비척거리며 다가가 피웅덩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흰 옷이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정국이 카메라를 집어들었다. 차갑다. 비릿한 피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왜 이것만 있지? 지민이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게 뭘까,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천재인 자신의 두뇌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돌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군인들 중 하나가 동굴벽에 붙여져있는 자그마한 폭탄을 발견했다. 폭탄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빨리 피해야 합니다! 급박한 목소리가 반대편 벽에 부딪혀 시끄럽게 웅웅거린다. 사라진 정국을 찾아 안으로 들어온 남준이 멍하니 있는 정국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 없어, 나가야 돼! 싫어, 싫어. 시간이 멈춘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던 정국이 발버둥쳤다. 전정국, 빨리 나가야 돼. 여기서 죽고 싶어?! 남준은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국은 말을 듣지 않았다. 미친놈아, 놔! 정국이 손을 탁 뿌리쳤다. 정국의 눈이 번뜩였다.
"나가고 싶으면 너나 나가."
다급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2분 14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남준은 아예 정국을 들쳐업고 일어났다. 정국의 옷에 번져있던 진득한 혈액이 남준의 옷까지 번졌다. 내려, 개새끼야. 정국은 남준의 등을 퍽퍽 때렸다. 내려줘, 내려줘. 정국이 울었다. 박지민이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란 말이야.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남준은 그 말을 무시했다.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며 동굴안에서부터 큰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충격에 남준이 엎어졌다. 그 바람에 정국도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정국이 꼭 쥐고 있던 카메라도 옆으로 떨어졌다. 이글이글 불타는 열기. 차마 동굴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못했던 세 군인들의 비명소리가 폭발음에 섞여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아려왔다. 손등도, 다리도 아려온다. 정국이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몇 분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있었던 동굴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루가 된 동굴의 흔적을 보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잖아.."
정국이 울먹거렸다.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었어...
정국이 울부짖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처절한 울음소리. 등신같은 자식,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꼭, 내 곁에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눈을 감은 채 오열하는 정국의 목소리를 들었다. 남준이 일어서지 않으려는 정국을 억지로 일으켜서 태우고 갈 때까지.
Nineteen
나인틴
下
정국이 피폐해진 눈을 들어 복잡한 공식들로 가득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정국은 몸을 돌려 천천히 방을 나갔다. 주인이 나간 방이 어두워졌다. 계단을 내려가 방 한가운데에 쓸쓸히 놓여져있는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이미 망가져 버린 지 오래였지만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정국이 원망했다. 멀쩡하게 내 옆으로 돌아온다더니.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새롭게 들리는 소식은 없었다. 혹여나 하는 생각 때문에, 듣지 않던 외부의 소식도 매일 듣는다. 하지만 자신이 제일 간절하게 원하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좋아하던 연구도 하기 싫었다. 정국은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다. 왜 오지 않는 거야. 정국은 한 달 동안 악몽을 꿨다. 폭발하는 동굴, 그 안에서 절 부르는 지민의 목소리. 꿈 속에서 절 애달프게 부르는 지민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해서, 정국은 매번 땀에 흠뻑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난 네가 어른인 것도 보고 싶은데.'
살짝 미소짓는 얼굴로, 아쉽게 중얼거리던 지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정국이 중얼거렸다. 넌 입버릇처럼 내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었지. 내가 어른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너는 웃는 얼굴로 다시 날 찾아와줄 거야?
정국은 온종일 스크린에 빽빽히 공식을 채워넣었다가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멈춰버린 자신의 신체가 다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막히는 부분이 나올 때면 정국은 전과 달리 난폭하게 변해서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집어던졌다. 예전에 혹여나 깨질까봐 조심히 다루었던 희귀 샘플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으레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난 후면 정국의 손이나 볼에는 생채기가 난무했다.
정국은 신경질적이었다가, 무기력했다가 다시 신경질적이 되기를 반복했다. 양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개진 지 오래였다. 찾아온 남준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당장 자라고 윽박질렀지만 정국은 막무가내였다. 남준이 억지로 침실에 우겨넣고 가면 자는 척 하다가 다시 나와 미친듯이 공식을 써넣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남준도 체념했다. 며칠간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머리가 깨질 만큼 아파왔다. 하지만 조금만 더 견디면 됐다. 정국은 자기자신을 다독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돼. 미친듯이 움직이던 정국의 팔이 멈추었다. 드디어, 해냈다.
정국이 눈을 떴다. 몇 십년간 잠들었다가 깨어난 냉동인간처럼, 들이쉬는 공기가 무척이나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눈을 깜박이고 있던 정국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맨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섰지만 전보다 높아진 시야에 적응이 안 돼,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정국은 팔을 들어 벽에 걸려있던 자신의 옷을 집어들고 등을 기댔다.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천천히 떼었다.
방을 나와, 복도를 쭉 걸어갔다. 정국이 걸어갈 때마다 불이 하나하나 켜졌다. 무너질 듯 말듯 계단을 내려갔다. 모퉁이를 돌았다. 어두워진 밤하늘 덕분에 검게 반사된 유리창으로 흰 가운을 입은 사내가 갓 걸음을 뗀 아이마냥 위태롭게 걸어가는 모습이 비춰졌다. 이제는 끝없는 악몽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 정국은 물끄러미 잠금장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인식기에다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초록색 불이 파란색으로 바뀌며, 잠금장치가 해제된다.
지민아, 네가 바라던 대로 난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 된 내 모습, 안 보고 싶어?
정국은 양 손으로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바깥 세계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외로웠다.
지민과 같이 나왔을 때의 바깥 세상은 알기 쉽고 마냥 편안한 곳이었는데, 혼자 나오니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지민과 같이 갔던 곳부터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 할지를 몰랐다. 사방은 어른들로 가득했다. 아직 어른에 익숙해지지 못한 정국은 당황해서 달려가듯 걸었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마구 건넜다. 끼이이이익! 트럭이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했다. 야 이 새끼야, 어딜 보고 건너는 거야!! 운전수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듣지 않았다. 정국은 흰 가운을 입고 펄럭이며 밤거리를 헤집었다. 사람들은 그런 정국을 정신나간 사람 보듯 하며 피해다녔다.
골목길. 얼만큼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다리가 아팠다. 주변에 어른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다양했던 불빛들도 없었다. 무채색의 공간에 도착해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 정국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형형색색의 불빛들을 단시간에 많이 봐서 그런지 눈을 감아도 불빛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윽, 정국이 가슴께를 쥐어뜯었다. 호흡이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심장이 귀 옆에 있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와 지금 이 자리에서 심장이 터져 죽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잡았다."
약품이 섞인 손수건이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정국은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몸과 지친 체력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정국의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졌다. 지민아... 멀어져가는 의식 뒤로, 누군가가 자신을 끌고 가는 게 느껴졌다.
정국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가 눈을 가리고 있었다. 꿈지럭던 정국은 다시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싸구려 약품을 쓴 게 분명했다. 구둣굽에 밟혀서 죽어가는 개미마냥 바르작거린 정국을 알아차린 건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일어났나 본데?"
"어디? 오, 그러네."
정국은 움직임조차 멈추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저벅저벅, 치이이익, 철그렁. 그러니까 내가 재워놓고 하자고 했잖아. 이렇게 빨리 일어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야 됐고 가서 약이나 더 가져와, 저 새끼 재우게.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딸그랑. 쇳소리.
"뭔지 궁금하지?"
"......."
"어차피 마지막인데, 서비스로 친절하게 설명해줄게."
보이지 않는 눈 바로 앞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저 쪽에서는 다른 사람이 킬킬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보이지 않는 사내가 도로 입을 열었다.
"싱싱한 재료로 팔려가게 되는 거야. 요새 인육이 비싸게 팔리는 건 알아? 아 물론, 그 전에 돈이 될 만한 장기들은 빼내고."
"아으....."
"보니까 좀 사는 도련님 같은데, 어떡하냐. 운이 안 좋았네."
거친 손이 정국의 볼을 툭툭 쳤다. 그러다 감탄사를 흘렸다. 사내새끼가 피부는 좋아요, 그러고 보니까 되게 하얗네, 재수없게시리. 사내가 발로 정국을 걷어찼다. 커흑, 정국이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와요, 가다가 뒤졌나. 사내가 껄렁하게 중얼댔다.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 정국을 유심히 내려다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야."
"왜."
"이새끼 얼굴 궁금하지 않냐?"
"아서라, 우리 얼굴 보면 어쩌려고."
"어차피 죽을 건데 얼굴쯤 보이면 어때."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거칠게 벗겨졌다. 얼굴이 쓸려 눈쌀을 찌푸리고 있던 정국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두운 지하 창고 속에서 싸구려 전등이 대롱거렸다. 홰액, 사내가 정국의 턱을 붙잡아올렸다. 정국은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의 손아귀 힘이 더 셌다. 사내새끼 맞아? 왜 예쁘게 생겼어, 짜증나게. 사내의 양 눈이 위험한 눈빛을 띄었다.
"난 이렇게 생긴 새끼들만 보면 열받아."
"미친 새끼...또 시작이냐."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역겹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어떻게 하던지 간에, 파는 데 지장만 없다면 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사내가 씩 웃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그리고 한 모음 내뱉는다. 후우, 퀴퀴한 지하실 냄새에 담배 냄새까지 더해졌다.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뺀 사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정국에게 다가갔다. 엄습해오는 불안함에 정국이 뒤로 움직였다. 하지만 비좁은 공간 내에서 물러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사내는 정국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손에 들린 담배가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너같은 새끼들 보면 좀 빡돌아. 당한 게 있거든, 그놈들한테."
"........."
"이 짓을 하다보면 가끔 반반한 놈들이 왔긴 했거든? 내가 어떻게 했게?"
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사내는 손에 들린 담배를 내려 정국의 어깨에 지져댔다. 옷자락이 순식간에 타들어가고, 살이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 정국이 고통스러워할 때마다 사내의 얼굴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져갔다. 담뱃불을 지지는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정국의 몸도 뒤틀렸다. 그 때, 털컹 하고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오냐?"
화풀이할 게 있으니 좀만 있다 작업을 시작하자고 말하려 고개를 돌리던 사내의 이마에 총알이 박혔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몸이 넘어지자 구석에 있던 남자가 놀라 총을 찾았다. 하지만 남자가 총을 찾기도 전에, 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뇌수가 우수수 쏟아졌다.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정신히 혼미해져가던 정국은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씨발새끼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빠르게 정국에게 다가온 남준은 칼로 밧줄을 끊다 참지 못하고 욕을 뱉었다. 담뱃불로 힘껏 지져진 어깨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준은 한 번 더 욕을 내뱉었다. 개새끼들, 씨발...!! 정국은 자꾸 멀어지려는 의식을 잡으려 애썼다. 아까와 같은 큰 고통도 없었고, 부자연스럽게 묶여 있던 손도 자유로워졌다. 저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지민 같아, 정국은 꺼져들어가던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지민이, 지민이야...?"
"무슨 박지민이야, 정신차려."
"지민이...찾으러 가야 해...."
중얼거리던 정국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지민아, 지민아. 나 이렇게 아픈데, 왜 안 와. 정말 안 와? 너가 오지 않을 리 없을 텐데... 살아있다면 그럴 리 없을 텐데...
* *
지민은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또 이런 데인가. 포로로 잡혀서 동굴 속에 갇혀있었을 때보다는 나은 장소였지만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지민이 몸을 일으켰다. 찰그락, 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벽에 박혀있는 긴 쇠사슬이 자신의 손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뭐야, 지민이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솨사슬을 끊어내려고 했지만 당연히 끊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랑거리는 소리만이 지하실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 때, 끼이익 거리는 쇳소리가 나며 철문이 열렸다.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툭 뱉었다. 남자는 철문을 닫고 지민에게 걸어오며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너도 참 명줄 질기다. 그지? 용케도 거기서 살아남았네. 남자가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놓인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절 쳐다보는 지민의 모습에 다시 입을 연다. 아, 그렇다고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던가, 안도의 한숨을 쉬라는 건 아냐. 남자가 손을 홰홰 저으며 덧붙였다. 나 지금 너 팔아넘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하도 안 일어나길래, 한 시간 내에 눈 안 뜨면 그냥 장기나 팔려 그랬어."
"....."
"그런 눈 하지 마, 무섭잖아. 내가 진짜로 죽인 것도 아니고..."
"......"
"깨어났으니 된 거 아냐?"
남자가 어깨를 들썩였다. 갈비뼈 두 개랑 왼쪽 팔 나갔는데, 그거 다 붙을 때까지는 안심해. 장기적출은 안 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말라고, 어우 살 떨려. 과장된 몸짓을 그리던 남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턱을 괴고 한참동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남자는 흥미가 사라졌는지 도로 팔을 내렸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지민의 앞에 다가가 쪼그려앉았다.
"근데, 너 이름이 뭐야?"
"......"
"난 김태형인데. 서로 말 까자?"
십새끼가 계속 내 말 무시하네, 좆같게. 자신을 김태형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웃으며 욕을 내뱉었다. 곱게 물을 때 대답하자, 응? 태형이 검지로 지민의 볼을 툭툭 쳤다. 지민이 태형의 손을 쳐내고선 툭하고 내뱉었다. ...박지민. 손이 내쳐졌음에도 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태형이 싱글싱글 웃었다. 아 그래, 박지민이.
"배고픈데, 뭐 먹을래?"
상당히 생뚱맞은 말이었다. 지민이 얼굴을 구겼다.
이 안에만 갇혀 지내서 그런지 그동안 시간이 얼만큼 흘렀는지, 지금이 몇 시고 며칠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지민이 방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보니 정국의 얼굴만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져야지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정국의 얼굴은 또렷해져만 갔다.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은, 처음에는 웃고 있던 정국의 얼굴이 점점 우는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둬든 김태형이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절 팔아먹으려고 데려왔다던데,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넌 그냥 니 뼈들이 빨리 붙기나 기도해. 대체 나한테 뭘 원하냐고 참다 못한 지민이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온 대답이었다. 태형은 하루종일 구석에 앉아서 길다란 탁자 위에 몇 대의 노트북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곤 했다. 흘끗 쳐다본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것들만이 떠다녀서, 지민은 볼 때마다 정국이 살고 있던 연구소를 떠올렸다.
"야."
"..왜."
"요새 일거리가 좀 줄어들어서 심심해서 그런데."
태형이 의자를 빙글 돌리며 지민을 바라보았다. 너 저번에 말한 걔 이름이 뭐라고? 정전국? 지민이 정정했다. 전정국. 아 맞다, 그래.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타닥, 키보드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태형은 무언가를 입력하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내 해킹 실력은 끝내준단 말씀이야. 내가 뚫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없지! 나같은 유능한 인재를 정부가 써줘야 하는데, 하! 그놈의 국제범죄자. 태형이 낄낄거렸다. 지민은 태형의 혼잣말을 흘려보내며 고개를 젖혔다. 몇 분쯤 지났을까, 태형이 지민을 불렀다.
"얘야?"
지민은 고개를 돌렸다가 화면에 뜬 얼굴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오...섹시하게 생겼네. 태형이 호오,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어딘가 좀 처연미도 있고. 지민은 할 말을 잃었다. 노이즈 때문에 깨끗한 화질은 아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정국은 자라 있었다.
예전의 열아홉에 멈춘 소년의 모습이 아닌, 완전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정국아. 지민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태형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왜, 좀 더 보여줄까? 어느 새 옆으로 다가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지민을 발견한 태형이 물었다. 아무런 반응없던 지민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신이 난 태형은 cctv회선을 해킹했다. 조그만 모니터 안에 다양한 정국의 모습이 꽉 들이찼다. 이야, 여기도 있고, 저기도....어?
"김태형, 이거 풀어."
지민이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태형이 눈을 내려 찰랑거리는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지민은 오른손으로 태형의 멱살을 세게 틀어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태형은 눈쌀을 찌푸렸다.
"야, 이거 놔. 숨막혀."
"풀으라고 했다."
숨통을 점점 더 조여오는 통에 태형의 얼굴이 점점 더 찡그려져갔다. 지민이 으르렁거렸다. 씨발, 풀으라고! 이미 포기했던 상태였는데, 눈 앞에서 정국의 모습을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나 마지막으로 본 장면에는 더더욱. 기절한 채 어딘가로 끌려가는 정국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더더욱. 미칠 것 같았다. 왜 이토록 무기력하게 있어야 되는 지를 모르겠다. 화가 났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고, 정국이 보고 싶어서 화가 났다. 나는 왜 너에게 갈 수 없는가. 컥컥거리며 지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던 태형이 발로 지민을 걷어찼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컥...."
"조금 놀아준거 가지고 되게 지랄이네."
태형이 욕을 하며 방을 나갔다. 지민은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의 다 붙어가던 뼈가 다시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지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국아, 정국아. 기분 탓일까, 모니터 안에서 움직이던 정국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너 자꾸 왜 이래."
정국을 끌고 연구소로 돌아온 남준이 진심으로 화를 냈다. 전의 일이 있고 나서 감시를 철통같이 하는데도 어찌나 잘 빠져나가는지, 남준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몇 번이고 위험에 처한 걸 구해냈는지 몰랐다. 만일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국은 되돌릴 수 없는 강을 영영 건너게 될 수도 있었다. 한 번만 더 나가면, 가둬버릴 거야. 남준이 협박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그래, 연구소 나간 것 까진 좋아, 하지만 왜 계속 위험에 휘말리냐고! 김남준이 화를 내거나 말거나, 정국은 전혀 신경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전정국, 남준이 이를 뿌득 갈았다. 너, 진짜...!
"쿨럭,"
방금전까지도 멀쩡하게 서 있던 정국이 급작스럽게 피를 토했다. 투둑, 정국이 토해낸 핏덩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한 대 쳐서라도 말을 듣게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먹었던 남준은 그러한 생각조차 잊고 놀란 눈으로 떨어진 핏덩이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피였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게 뭐야. 남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국이 손등으로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별 거 아니야. 태연한 목소리였다.
"별 거 아니긴 무슨 개소리야!!"
침착하게 대답하는 정국의 말에 남준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너, 이, 야, 씨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욕이 절로 나갔다. 머릿속을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치고 지나갔다. 전정국이 어떻게 단시간내에 신체 성장을 이뤘는지 아예 추측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정국이었기에, 바로 전정국이었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몸인데, 설마 그러겠어. 그리 생각해서 넘겼던 거다. 그런데.
남준이 입술을 짓씹으며 정국을 다그쳤다. 이거, 부작용이지? 그렇지. 정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민이 보고 싶어. 예전에는 나보다 키가 조금 더 컸는데, 이제는 내가 훨씬 더 크겠지? 대화가 엇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전정국, 솔직히 말해 봐."
"남준아, 지민이가 보고 싶어."
"부작용이지, 너."
대화가 자꾸 엇나갔다. 남준이 정국의 양 어깨를 세게 붙잡고 대답을 종용했다. 대답해, 전정국. 부작용이잖아. 단기간 신체 성장의 부작용이지? 정국은 남준이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렸다. 팔랑팔랑, 바람에 제멋대로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정국이 남준의 손을 붙들었다. 남준아, 제발. 정국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 다 알아. 이미 올때까지 온 이상, 더 이상의 발버둥은 의미가 없었다. 이어지는 정국의 말을 들은 순간 남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남준아, 난 다 알아.
"네가 지민이 전쟁터로 보낸 거 알아..."
"......"
"하지만 원망 안 할게."
"......"
"지민이, 만나게 해 줘."
"......"
"살아있잖아. 그렇지? 살아있잖아, 지민이..."
"......"
"김남준, 제발."
정국의 다리가 후들거리다, 바닥으로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남준은 멍하니 주저앉은 정국을 내려다보았다. 쿨럭, 정국이 다시 한번 더 쿨럭거렸다. 새하얀 바닥에 붉은 피가 또 한번 묻어났다. 지나치게 넓은 방 안에서 정국의 목소리만이 반사되어 웅웅거렸다. 맞아, 나 네 말대로 부작용이야. 나 얼마 못 살아... 그러니까 남준아, 지난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지민이, 보여줘.
그 날 이후로 정국은 조그만 방 안에 갇혀서 살았다. 방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정국은 음식을 거부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자, 의사가 영양제를 투여하고 갔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링거액으로만 목숨을 연명하자 하루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정국은 가만히 앉아서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얼마쯤 더 살게 될까. 정국은 자신이 살 날을 가늠했다. 지민이랑 약속한 곳을 다 갈 시간쯤은 남아있을까. 끼이익. 두꺼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국은 텅 빈 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박지민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미가 없었다. 남준이 정국의 앞에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침통한 목소리였다.
"내가 졌어."
"......"
"박지민, 만나게 해 줄게."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드디어 널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디서 숨어있던 건지 모르는 힘이 솟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꼭 깨문 입술을 잠시라도 떼어놓으면 바로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곧 올 거야. 남준이 벽에 기댄 채 말했다. 정국은 제자리에 우뚝 서서 기다렸다. 어서 지민이 나타나기를. 정국이 다리를 달달 떨었다. 어서, 어서. 몇 분쯤 더 기다렸을까. 모퉁이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민인가 해서 걸음을 떼려던 정국은 지민이 아님을 알고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 뒤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키, 익숙한 얼굴,
"정국아."
익숙한 목소리.
정국은 지민에게로 날아가듯 달려가 와락 안겼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정국을 기다리던 지민은, 마주안은 순간 으스러져라 힘껏 안았다. 정국아,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그토록 원했던 체온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커졌다. 이제는 나보다 크네... 웃음기가 섞인 지민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정국아. 지민이 고개를 들지 않으려는 정국의 얼굴을 들어올리고 키스했다. 지난 날을 이 키스로 보상받고 싶다는 듯, 한없이 격렬한 키스였다. 다급한 행동에 서로의 코가 부딪혔다. 두 사람이 살짝 눈을 떴다가, 눈이 마주치고서는 미세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먼저 웃음을 멈춘 지민이 부드럽게 정국의 입술을 물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서로의 숨결과 지난 시간들을 나눈다고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키스였다. 지민은 정국의 뒷머리를 끌어당겼다. 머리칼이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그토록 닿고 싶어했었는데, 드디어.
"........."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 하아, 한숨과도 같은 황홀한 숨이 뱉어졌다. 정국은 아까 자세히 보지 못했던 지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많이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정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민의 팔을 쓸어내렸다. 왜 이렇게, 말랐어. 지민이 미소지으며 정국을 달랬다. 괜찮아, 별로 안 힘들었어. 그리고 그건 내가 할 말인걸. 왜 이렇게 마른 거야.
"키도 커지고..."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
"어른...."
지민이 중얼거렸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침착한 반응에 정국이 물었다. 왜? 지민이 손등으로 정국의 볼을 쓸어내리다가, 손바닥을 댔다. 정국은 고개를 기울여 지민의 손에 제 얼굴을 댔다. 지민은 어딘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조금 불안해진 정국이 한번 더 재촉했다. 왜.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것보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싶어서."
예뻐. 지민이 한번 더 반복했다. 정국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그리고 다시 지민의 품에 기대려고 했다. 하지만 지민은 뒤쪽을 살짝 바라보고서는 제 품에 기대려는 정국을 떼어놓았다. 왜? 조금 퉁명스럽게 정국이 내뱉었다. 얼굴 보고 싶어서. 기대면 얼굴 안 보이잖아. 지민이 정국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징그럽게 왜 그래."
정국이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왜 굳이 입 밖으로 꺼내냐는 물음이었다.
"그것보다 너 얼굴 상한 거...."
"사랑해."
정국은 이어지던 말을 멈춘 채 지민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지민이었다. 입 밖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면, 자신을 향한 무한한 감정이 '사랑한다'는 말 하나로 축약되는 게 싫다며 한 번도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박지민이었다. 가끔 제 손을 끌어다가 진지한 얼굴로 손바닥 위로 사랑한다는 단어를 쓰다가 그만두기도 했고, 몸 구석구석 수없이 입을 맞추어주며 사랑한다는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국이 눈을 깜박였다. 지민의 눈빛은 애달펐다. 가슴이 저릿해올 정도로 슬픈 눈동자였다.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갑자기. 왜 그런 눈빛을 하는거야, 불안하게. 어딘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눈빛을 왜 하고 있는 거야, 지민아. 왜 그래, 갑자기. 도대체 왜 그래. 심장이 쿵쿵 뛰고 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서 뛰고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뛰고 있는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왜... 정국이 말라오는 입술을 떼어, 물어보려 마음먹은 때였다.
"사랑해."
"......"
"널 사랑해, 전정국."
지민이 손을 뻗었다.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절 바라보고 있는 정국을 달래주기 위해서. 따스한 볼을 잡고... 너에게. 지민의 손이 정국의 볼에 막 닿기 직전인 순간이었다. 탕, 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국의 볼에 닿으려고 했던 손은 갈 곳을 잃고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정국이 고개를 내렸다. 지민의 가슴 부근에서 붉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빠르게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뭐야? 잠시 파악이 안 되어서, 정국은 오류가 생긴 기계처럼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스르륵, 지민이 무너져 내렸다.
"...지민아?"
정국이 지민을 따라 무릎을 끓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잘게 떨리는 팔로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지민을 붙잡았다. 손이 젖어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피. 지민아? 지민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지민이 쿨럭였다. 정국의 어깨는 지민이 토해낸 피로 젖어들어갔다. 지민아, 이름을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떠는 듯 계속해서 떨렸다. 지민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보았다. 지민이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사랑..해. 쿨럭, 피가 섞인 목소리로 지민은 계속해서 반복했다.
"사,랑해..."
"지민아, 아, 아아...."
"ㅈ,정국,아..사..랑....해."
끝없이 이어지는 사랑고백이었다. 절절한 감정고백을 듣는 정국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지민을 붙잡고 있는 정국은, 지민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약해지는 숨소리, 더 약해지는 목소리. 그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뒤에 다가온 발걸음의 주인이 누군지, 정국은 알고 있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길 거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국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민의 마지막 눈빛을 보아야 했다. 정국은 눈물이 차올라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있는 힘껏 지민에게 집중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자신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을 읽었다. 널 사랑해, 너는?
"나도... 사랑해."
정국이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을 때, 지민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남준이 방아쇠를 한번 더 당겼다. 탄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정국이 천천히 쓰러졌다.
* *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 니가 전에 말했던 전정국 있잖아. 너 볼 수도 있을 것 같거든. 태형의 입에서 나온 정국이라는 말에 지민이 반응을 했다. 김남준이 연락을 해 왔어. 박지민이라는 놈 혹시 거쳐갔던 적 있냐고. 내가 너 데리고 있단 말은 안 하고, 왜냐고 물어봤는데. 김남준도 호구새끼지 뭐.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버리지를 못 해. 태형이 욕을 하다가, 다시 지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가 김남준한테 빚진 게 있어서, 걔 말은 한 번 들어줘야 하는데. 뭔가 그동안 너한테 요상한 정이 들어서 말해주려고. 태형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너, 가면 죽어.'
태형이 비딱하게 기댄 채, 바르작거리는 지민에게 경고했다. 지민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채 멈추지 못한 철그렁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퍼지다 뒤늦게 멈췄다. 조그만 소음마저도 사라지자 방 안에는 완벽한 정적이 감돌았다. 너, 죽는다고. 태형이 반복했다. 하지만 지민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었다. 태형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김남준이 너 죽일 거야.'
보아하니 너도 김남준 좀 아는 모양인데. 그 새끼 사이코란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어마어마한 미친놈이란걸. 평소에 깨끗한 척 하느라 나한테 연락도 잘 안하던 놈이 이제와서 연락을 한 이유는 뭘까? 태형이 손등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너 완벽하게 죽이려고 그러는거지. 두 눈으로 직접 죽는 꼴 보아야겠다고 저러시는 거라고. 얌전히 숨만 끊어지면 다행이게, 시체 형체를 못 찾아보게 조각조각 낼 수도 있을걸. 태형이 겁을 줬다.
'그래도 가고 싶어?'
'어.'
지민의 입에서 떨어진 즉답에 태형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야, 너 돌았어? 내가 너 살려줄 수도 있다잖아. 그 새끼한테 너 못찾았다고 하면 돼. 살려준다니까? 너 가면 이백퍼센트 죽는다니까? 태형은 당사자인 지민보다 필사적이었다. 가면 죽어, 그래도 좋다고?
'그래도 좋아.'
'병신같은 새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
'전정국을.'
태형이 입을 다물고서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먼지투성이인 얼굴에서도 두 눈동자만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아니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의지였다. 태형이 한숨을 쉬곤,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살 기회를 준건데, 니가 차버린거야. 알겠어? 그러니까 뭐... 하, 모르겠다. 야, 씻어. 걔 보는게 마지막일 텐데 좀 깔끔하게 하고 가.
"이제 마음이 편해?"
태형이 물었다. 남준은 대답을 삼켰다. 대답을 듣고자 던진 말은 아니었던 건지, 태형은 곧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난 모르겠더라. 그 놈의 사랑이 목숨보다 중요한지. 태형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시궁창 인생만을 살아오느라 그런 거 느껴볼 여유가 없어서 그랬나. 뭐, 지금처럼 뒷세계에 오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았어도 사랑 타령은 하지 않았겠지만. 태형이 비웃었다. 그러다가 또 표정을 굳혔다.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부럽긴 하더라.
"그만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남준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태형은 어딘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남준과 눈이 마주친 태형은 슬쩍 던졌다. 왜, 너도 부러웠어? 남준은 주먹을 쥐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따지고 보면 너나 나나 그럴 자격 없지 않아?
"안 그래?"
"..됐고, 약속했던 금액이나 가져가."
"필요 없어."
태형의 입에서 나온 거절의 말에 남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그렇게 물어오는 눈빛에, 태형이 덧붙였다.
"그 돈 받으면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거든."
"........"
"그걸로 장례식이나 치러줘."
태형이 말한 장례식이, 두 사람을 가리킨다는 걸 남준은 모르지 않았다. 태형이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발자국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준은 몸을 돌려 검게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
열아홉. 모든 걸 멈춘 시간. 내 의지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 시간.
손 끝으로 식어가는 지민의 체온이 느껴졌다. 정국은 시선을 올려 지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의 끝까지 웃고 있었다. 왜 웃어, 너. 바보야...? 정국이 말을 듣지 않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지민의 얼굴을 매만졌다. 지난 날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처음 만났던 날의 흙투성이였던 너. 나를 보고 웃어주는 너, 날 안아주던 너. 반딧불이가 춤추던 기억 속의 어느 날. 짧지만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마지막에 떠오르는 시간들 속에는 지민이 꼭 들어가 있었다.
아, 너는 이런 사람이었나. 정국이 생각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이만큼 나에게 큰 영향력을 준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랬다. 어른을 끔찍히도 싫어하는 자신이, 어른인 지민을 데리고 왔었다. 어른들을 보면 역겨움이 치밀어올랐지만, 지민한테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른인 지민을 데려오고, 치료해주고, 또, 사랑하고. 정국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정국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열아홉. 모든 걸 멈춘 시간. 내 의지로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다시 세상을 연 시간.
열아홉. 십 년 동안 멈추었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을 만났던 시간.
그리고, 스물아홉.
너를 향한, 우리들의 시간이 영원히 안녕을 고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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