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메이크
투두두두, 전투로 황폐화된 지역 위를 한 헬리콥터가 빠르게 지나갔다. 남준은 조심스럽게 정국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도 꽤 화난 표정이다. 매서운 눈초리로 절 죽일듯 노려보고 있어서 도로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헬기에 타기 전까지 줄창 들었던 전정국의 열받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바락바락 고람을 치던 전정국. 누가 마음대로 내보내래?! 어련히 완성하면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허락도 없이 내 아이를 내보내고, 망가뜨리기까지 했잖아!
정국은 항상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자신의 아이'라고 불렀다. 아주 오래전부터 줄곧 말해왔던 습관들 중에 하나였다. 목표지점 접근, 하강하겠습니다. 조종사의 말에 남준이 밖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점점 가까워진다. 투드드, 헬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남준이 닫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정국은 남준과 군인을 밀치고 앞으로 쏠랑 튀어나갔다.
"미안합니다, 좀 예민한 사람이라서요..."
이미 사라져버린 정국 대신 남준이 사과했다. 군인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준은 정국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겨우 살 떨리는 분위기 속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었지만 한숨부터 나왔다.
손 위로 투명하게 비춰지는 위치추적기를 보면서 정국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짜증났다. 귀찮게 여기까지 와야 되고, 여기까지 와서 얻는 것이라고는 제 아이의 잔해 뿐이라니. 멍청한 김남준 때문이었다. 지 말로는 상부에서 압박이 있어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하는데, 그래도 싫다. 그깟 이야기쯤 그냥 무시해버려도 될 일이잖아. 감히 내 일을 방해해서,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고. 정국은 이를 뿌득 갈았다. 자꾸 이렇게 하면 다시는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미 망가진 거, 중요한 데이터는 손상되지 않았을 거니 가져가서 다시 만들어야겠다. 정국은 돌아가서 할 일을 가만히 생각했다. 일단 백업한거 살리고, 사실 손봐야 할 곳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것도 수정해서 새로 해야지. 두뇌회전을 순식간에 마친 정국은 다시 드는 속상함에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재미삼아서 만든거라 완벽하게 하지 않아서 더 허망하게 망가진 것 같다. 사실, 미완성 단계라 움직이는 것조차 아직 보지 못했는데. 정국은 절벽 앞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휘우웅, 뒤에서부터 부는 바람에 검은 머리칼과 긴 하얀 가운이 휘날렸다. 저기 밑에 있는 것 같은데, 내려가는 길이 있을까.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 내리막길이 보였다.
저벅저벅, 간간히 부는 흙바람에 손으로 앞을 살짝 가린 정국은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잘린 팔다리들이나 시체들, 망가진 채 버려진 총들과 수류탄의 잔해들이 보였다. 정국은 큰 돌들과 흙들로 쌓여있는 둔치 앞에 멈춰 섰다. 널부러진 부품들과 푸른 액체에 또 슬퍼졌다. 정국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복잡한 전선들에 얽혀있는 조그만 칩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필요없는 전선들을 똑똑 떼어내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어."
눈에 들어온 물체에 정국은 외마디 소리를 냈다. 사람이었다.
얼굴과 몸은 흙투성이에다가 볼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덕지덕지, 너덜너덜해진 옷들과 목에 걸려있는 긴 줄과 이어진 카메라가 있었다. 정국이 빤히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져볼까, 하다가 너무 더러워 보여서 손을 거두었다. 난 더러운 거 싫어하는데. 죽은 건가? 정국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정말 죽었나? 손을 천천히 가져가 낯선 사람의 볼을 찰싹 때렸다. 반응이 없다. 손을 내려 맥을 짚었다. 음, 살아있네.
정국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필요한 건 이미 찾았고. 이건 필요없는데, 두고 갈까? 정국의 눈이 남자의 손 위에 놓여있는 카메라로 향했다. 이건 왜 들고 있는 거지. 전정국! 뒤에서 절 부르는 남준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마침내 정국은 결정을 내렸다. 이 낯선 사람을 주워가기로.
Nineteen
나인틴
上
종군 기자라는 직업은 위험하다. 전쟁터의 사진을 찍는다는 건, 총격전과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울리는 포탄소리를 들으면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지민은 단 한번도 이 직업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들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전쟁터에 나가서 셔터를 누를 때야말로 살아있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매순간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이 미칠듯이 짜릿하고 좋았다. 전율하는 감각, 끔찍한 비명소리가 난무하지만 지민에게는 전쟁터가 곧 일터이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어차피 전쟁터에 나갈 때 그날 여기서 죽는다고 극단적으로 마음먹고 나간다고는 하지만, 지민이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게 포탄 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저에게 뭐라고 소리치던 군인 같았는데. 지민이 눈을 깜박였다. 흐릿하던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몰라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곳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퍽퍽한 모래먼지가 날리고 전투가 이어지던 황무지였지, 이렇게 깔끔한 흰색으로 도배된 곳은 아니었단 말이다.
"여기, 어디야."
지민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댔다. 그러다가 문득 든 이상한 기분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응? 눈이 동그래졌다. 파편에 긁히고 쓰라렸던 상처들이 깔끔하게 치료되어 있었다. 붕대로 감겨져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다는 듯이, 멀끔하게. 뭐야?! 지민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종아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총알자국도 없어져 있고,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져보아도 쓰라린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났다. 물론 더 이상 아프지 않아서 좋긴 하다. 하지만 대체 누가, 자신을 이렇게 멀끔히 치료해주었단 말인가?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적하고 깔끔한 공간. 과연 먼지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함이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지민은 걸어다니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딱 보기에도 복잡해보이는 전선들로 얽혀져 있는 부품들,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기계더미들이 줄줄이 놓여 있었다. 좀 섬뜩한데. 지민은 팔을 문질렀다. 오한이 드는 것이,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지민이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이상해, 혹시 상대국에게 잡혀서 끌려온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멀끔하게 치료를 해주고 자유롭게 놔둘 리 없다. 잠시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민은 주저하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아무런 소리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 위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모퉁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한 인영에 지민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서 말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깜짝이야!"
얼핏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깜짝 놀라 손에 들린 파일을 떨어뜨리며 화를 냈다. 누가 그렇게 조용하게 올라오래? 심장 떨어질 뻔 했잖아! 따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지민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한동안 쏘아붙이던 소년은 계속 주저앉아있는 지민을 보고 어이없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뭐해, 멍청아. 안 일어나? 계속 죽치고 앉아있을 거야?"
"어, 어?"
분명히 자기보다 어려보이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소년이 미간을 팍 좁히며 말을 했다. 일어나. 한번 더 말 안해. 반말을 찍찍 쓰는 어린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 안 좋은 거고, 일단은 일어나는 게 맞았기에 지민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흠, 일어난 지민을 보고 소년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보다 조금 큰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히 주워왔나봐."
"응?"
"그냥 죽게 내버려둘걸."
팔짱을 낀 채 손가락을 까닥까닥거리다가 입을 열어 질문들을 다다닥 내뱉는다. 어디 아픈 덴? 쓰라린 데는? 움직이기 불편한 데 없지? 연거푸 쏟아지는 질문에 지민이 정신을 놓고 있다가 한 텀 늦게 대답했다. 딱히, 없는데. 그 말에 소년의 얼굴이 살짝 펴진다. 하긴, 있을리가 없지. 의기양양해진 소년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뭐지. 지민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눈앞에 있는 소년이 지금 자신이 처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조금 정리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혹시 네가 날 치료해준 거야?"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내 아이 데려오려다 옆에 널부러져있는 너 가져왔어. 사람보고 '가져왔다'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절 치료해준 사람이라니 놀랍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민이 약간 눈을 크게 뜬 채 정말? 이라고 되물었다.
"정말? 날 이렇게 멀끔하게 치료해줬다고? 무슨 수로? 어떻게 이렇게 한 거야?"
이번에는 지민 쪽에서 속사포로 쏟아지는 질문에 소년이 인상을 썼다. 하나씩 말해, 하나씩. 랩하지 말고. 어지간히 성격이 깐깐한 모양이었다. 지민은 인내심을 가지고 되물었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말끔하게 치료해준 거니?
"그거 하나 못하면 바보게?"
소년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못하는 건 없어. 소독한 다음에 맞는 피부 재생 속도를 몇십 배로 빠르게 해서 상처 부위에 덧입히는 것밖에 없는데, 숨쉬는 것보다 더 쉬운걸.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피부 조직을 덧입혀? 몇십 배로 빠르게 해? 소년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소년이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왜 자꾸 멍청하게 쳐다봐, 멍청아."
순간 올라오려는 화를 간신히 참은 지민이 스스로를 도닥였다. 참자, 박지민. 상대는 어린애야. 어린애. 참아라, 넌 어른이다. 화를 참은 지민이 아까부터 거슬렸던 반말을 지적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계속 반말 쓰니? 아무래도 내가 나이 많은 것 같은데..."
"웃기는 소리한다, 박지민."
갑작스럽게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 이름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름을 말한 적 없는데, 알고 있다. 어떻게?
"너 29살이잖아. 너랑 나랑 동갑이거든?"
지민의 머리 위로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눈앞의 소년이 뭐라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29살? 19살이라면 모를까, 29살이라고? 지민이 아주 의심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거나 말거나 소년은 등을 돌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니?"
지민의 말에 뒤를 슬쩍 돌아본 소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혼자 서 있는 것도 조금 민망한 터라 지민은 뒤를 따라갔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지나 한 번 더 모퉁이를 꺾자, 무언가로 가득 찬 흰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로 뭉텅이진 사이에서 어딘가 익숙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 뭔지 알아차린 지민은 소년을 쌩 하고 지나쳐 탁자 위에 놓여져있던 자신의 카메라에 앞에서 손을 바르르 떨었다. 차마 손 대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내 카메라..... 듣기만 해도 안쓰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사진들..."
지민이 애처롭게 중얼거렸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들고다니며 그보다 더 소중한 사진들을 찍어놓은 카메라다. 솔직히 일어났을 때 옆에 없는 걸 보고 잃어버렸거나 이렇게 되었지도 모른다고는 예상했었지만, 예상과 실제로 확인사살을 받는 건 충격의 차원이 다르다. 내새끼가 운명한 걸 알았더라면 차라리 영원히 안 깨어나는 게 나았을까...? 지민이 공허하게 중얼댔다. 내용물이라도 되살리고 싶어도 메모리가 반쯤 박살나 그럴 가망성 조차 없어 보였다.
정국이 볼을 긁적였다. 사실, 박지민을 주워올때부터 카메라가 망가져있긴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완벽하게 망가뜨린 건 인정하긴 싫지만, 제 실수가 있기도 했다. 일단 의식을 잃은 지민을 대충 치료해놓고,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들여다보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미 한번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 카메라는 그대로 천국행. 하지만 절대로 말할 수 없지. 정국은 궁상을 떨고 있는 지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혹시 안의 사진들이 중요한 거면 나한테 있으니깐. 지민의 목이 홰액 돌아갔다.
"진짜?"
"메모리도 박살나서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볼래?"
정국의 말에 지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보여주세요. 공손한 말투에 기분이 좋아진 정국이 손뼉을 짝짝 두 번 쳤다. 그러자 환했던 공간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두 사람 사이에 투명한 스크린이 하나 떴다. 뭐야. 지민은 나타난 모니터를 보고 잠시 당황했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장치에 놀라는 사이에 정국은 백업 파일을 찾고 있었다. 파일을 찾아 손가락으로 한 번 터치하자 공중에 사진이 주르르륵 뜬다. 와. 지민이 감탄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해놨잖아.
전쟁통에서 발로 뛰어다니며 찍어놨던 모든 사진이 그대로 들어있다. 한참동안이나 넘어가던 사진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지민이 투명한 스크린 너머로 비치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너무 궁금하다. 대체 어떻게 부서진 메모리에 들어있던 사진들을 이토록 완벽하게 복구하고, 상처투성이던 제 몸을 완벽하게 치료한 거지?
"..너, 누구야?"
그러자 정국이 지민을 응시했다. 누구 같은데? 정국이 되물었다. 지민은 말없이 뚫어지게 보기만 했다. 피식 웃은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기자니까 기본 상식은 있겠지? 툭 하고 던진 정국이 스크린에 마크를 하나 띄웠다. 떠오른 표식을 본 지민이 중얼거렸다.
"K컴퍼니....."
"-에 딸려있는 연구소 안,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인들에게는 보통 군수산업으로 유명한 K컴퍼니였다. 하지만 이쪽 분야를 직업으로 삼은 지민은 K컴퍼니가 내놓는 것이 군수산업 물품들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래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선두주자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무서운 기술들을 내놓는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에는 제이라는 개로 떠들썩했다.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 개. 약을 주사한 순간부터 늙지 않고, 육체적 능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개에서 나아가 인간에까지 적용이 가능하면 불로불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며 핫했었다. 그 약을 만든 과학자는 베일에 쌓여 있었다. 아주 어린 천재. 하지만 그 외에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는, 뜬구름을 잡는 것 마냥 형체가 없는 과학자. 지민이 중얼거렸다.
"...제이."
"그러나 사람에게 적용시키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고 들었겠지. 하지만 아냐. 애초부터, '제이'는 개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정국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19살에 만들고, 성공했던 거. 지민의 눈이 커졌다. 영광이지? 기억해 놔, 오늘은 이 몸을 만난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소년의 모습을 한 정국이 예쁘게 웃었다.
* *
정국은 어른을 싫어했다. 어른들을 볼 때면 몸에 소름이 돋고 역겨움이 밀려왔다. 어른들은 역겹다. 정국은 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왔고, 여태껏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자신의 세계를 짓밟았다. 어른들의 말을 착실히 듣으며 그대로 행동해봤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국은 도피하기 위해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러다 찾았다. 과학이라는 운명을.
정국은 천재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고아였다.
고아원은 최악의 환경이었다. 아직 어리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음식은 오로지 한 끼의 점심식사 뿐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그중에서 정국과 같이 힘 없는 아이들은 그것마저도 제대로 못 먹기 일쑤였다.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정국은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정국은 빛을 발했다. 원장은 정국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별한 재능과,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외모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원장은 정국에게 간식거리를 준다는 말로 따로 불렀으며, 은밀한 방에서 정국을 더듬었다. 정국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아둥거리면 그나마 나오는 밥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정국은 가만히 앉아서 원장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참을 수밖에 없었다. 원장이 달콤한 말로 정국을 예쁘다고, 착한 아이라고 칭찬할 때면 정국은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야만 했다. 구역질 나는 시간이 끝나고 원장의 방에서 나올 때면, 정국은 매번 화장실로 달려가서 아무것도 없는 빈 속을 게워냈다.
어느 날,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고아원을 찾아왔다. 사내는 주기적으로 고아원에 찾아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보곤 했다. 정국은 남자의 얼굴을 몇 번 보았다. 몇 번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남자는 정국이 하는 모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정국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또다른 어느 날. 남자는 고아원 원장과 이야기를 했다. 원장은 보석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여지껏 살아온 눈치를 통해서 정국이 꽤 큰 값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정국을 그냥 넘기기에는 아까웠다. 그리고 제 손에 감기던 보드라운 살을 잊기 아쉬웠다. 원장은 있는 말 없는 말 포장하며 정국을 감싸기에 바빴지만, 사실은 돈을 더 받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정국은 어린 나이에도 눈치챌 수 있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원장은 정국을 비싼 값에 팔아넘겼다. 원장이 눈을 번뜩이며 지폐를 세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정국은 토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앞으로 이 곳에서 지내는 거다.'
새로 도착한 곳은 고아원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은 곳이었지만, 고아원보다 더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남자는 정국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정국은 자신의 새장 안에 갇힌 신세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데려온 남자도, 역겨운 어른이었다.
암울한 현실에도 정국은 빨리 적응했다. 정국은 넓게 펼쳐진 방들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제가 만들고 싶은 건 어디서 만들면 돼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정국은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치는 길을 택했다. 어른들 사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로, 정국은 과학을 선택했다. 정국은 수많은 시간을 혼자서 공부하고 수없이 만들어냈다. 딱히 이걸 만들어서 뭘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맨 처음에 새파랗게 어린 정국을 탐탁치않게 여긴 연구원들은 그런 정국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저렇게 조그만 아이가 어떻게 현대 과학 기술로는 아직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지. 당연히 정국을 질투했고, 멀리 했다. 정국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어른들은 다 그래. 각오하고 있었지만 또다시 속에서 토기가 치밀었다.
큰 연구소 내에서 정국이 가는 곳은 자신의 방과 연구실 뿐이었다. 다른 곳을 나가면 어른들밖에 없었기에, 정국은 나갈 수가 없었다. 어른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그자리에서 토악질을 할 지 몰랐다. 자진해서 외톨이가 되었기에, 정국의 성격은 점점 더 비뚤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 한 명이 정국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네가 정국이지?'
까무잡잡한 소년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김남준이라고 해. 이 회사의 후계자야. 정국은 실험을 멈추고 내밀어진 남준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손이었다. 정국이 내민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 자신을 남준이라고 소개한 소년이 정국의 손을 잡아채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정국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로만 가득한 연구소 안에서 남준은 정국을 제외한 유일한 어린아이였기에 쉼터가 되어줄 수 있었다. 너 왜 밖에 안 나가? 어느 날 남준이 물었다. 정국이 대답했다. 안 나가는 게 아니라, 못 나가. 왜? 정국이 대답했다. 나가면 사방에 어른들 천지잖아. 그리고 그 전에, 내 마음대로 여길 나가지도 못 할걸.
뭐 해? 남준이 공중에 스크린을 띄워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정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 뭐 해. 대답을 왜 그렇게 해. 남준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맨날 그런 식이지. 툴툴대는 목소리에 정국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조금 삐친 기색의 남준이 눈에 들어왔다. 정국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네 말대로 난 맨날 이런 식이니 이제 좀 익숙해져. 매정한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준은 체념하고 정국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곤 빠르게 재생되는 텍스트와 입체영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자신도 후에 이 회사를 이을 후계자이기에, 특수한 교육을 받고 자라 남들과는 훨씬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도. 하긴, 천재와 비교할 바는 못 되겠지. 남준은 정국의 뒤통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맛있는 파스타 집 알았는데. 같이 먹으러 갈래?'
'그 맛집보다 내가 만드는 게 더 맛있을 걸. 정확한 비율로...'
'아니, 그러니까 나는... 밖에 나가자는 소리였어.'
'난 안 나가.'
'넌 계속 여기 있으면서도 지겹지도 않아?'
'응.'
정국은 스크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사람이 무서워? 날아온 질문에 잠시 손이 멈췄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니, 난 어른이 싫어. 망설임없이 떨어진 대답에 남준이 물었다. 그럼 나는? 정국이 눈을 깜박였다. 그때의 남준은 아직 열다섯 살이었다. 넌 어른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어딘가 자꾸 빗나가는 대화에 남준이 다시금 물었다.
'왜 어른을 싫어해?'
전정국이 열 살에 이곳에 온 이후, 줄곧 회사에 딸린 연구소 안에서 지내며 바깥 세상을 거의 접하지 않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만이라면 괜찮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물어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다. 설명해달라고 요청해도 대충대충, 그러다 가라며 손을 휘휘 저어 쫒아내고. 재수없는 말투라도 일일히 답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정국을 이 곳으로 데리고 온 남자의 동생인 김남준. 물론 처음에 남준은 정국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 몇 개월을 꾸준히 무시당해야 했다.
어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 내가 그들의 기준 안에서만 행동하길 바라고, 통제 범위를 벗어나면 질타를 하지. 그걸 만든 자들은 모두 어른들이잖아?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게 무엇이든지, 하라고 했어. 근데 아니었어. 여기도 마찬가지고. 어른이 무섭진 않아. 하지만, 나도 어른이 될까봐 무서워. 정국의 대답에 남준이 턱을 괴었다. 그럼 이건 어때?
'어른이 되지 않는 거야.'
정국이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정국이 남준에게 달려갔다. 남준아, 이제 난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남준이 물었다. 정국은 자랑스럽게 길죽한 검은 상자를 내밀어보였다. 상자를 열자, 주사기 한 개가 나타났다. 성장을 멈추는 약을 만들었어. 이걸 맞는 순간부터 모든 신체 능력은 그 순간으로 멈추게 돼. 이제 난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정국은 보기 드물게 환한 얼굴이었다. 너도 어른 되지 말자, 정국이 남준의 손을 잡았다. 너도 나처럼 나이 안 먹게 해 줄게. 남준이 눈을 크게 떴다. 정국의 뒤로 다가온 사람이, 손에 들려있던 상자를 채 갔다.
'노화를 멈춘다고?'
차갑고, 낮은 목소리.
정국은 약의 제조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악용될 게 뻔했다. 말을 듣지 않고 거부하자 남자는 정국을 때리고 독방에 가두었다. 그 날 다시, 정국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각했다. 자신은 이 회사에 팔려온 거였다. 그들은 제가 만든 것을 돈을 받고 팔았고, 자신을 이용해서 수익을 올리기 위해 가치도 없는 고아원 원장에게 돈을 쓰면서까지 절 데려온 것이었다. 어른들은 정국의 자료 파일을 샅샅이 찾아내서 어떻게 만드는지 방법을 알고자 했으나 자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빼앗은 샘플은 혹시나를 대비하여 정국이 일부러 완성의 중간까지만 만들고 가져갔던 거라 한계가 있었다.
전정국.
남준이 정국을 불렀다. 어느 새 남준은 저보다 한참 자라 있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남준은 자리를 이어받아 새롭게 회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남준은 정국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정국이 멍한 눈으로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의 지원을 일절 끊을 거야. 남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준아, 너도 어른이 되었구나.
올라오는 헛구역질에 정국은 입을 틀어막았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역겨움이 다시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 *
지민은 정국을 바라보았다. 어물쩡하는 사이에 여길 나가야겠다고 말하겠다는 타이밍을 놓쳐서 덩그러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절 구해줬다는 전정국은 이미 자신에게서 신경을 끄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림자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적막했다. 원래 연구소 안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런 지민의 의문을 읽었던 건지, 정국이 입을 열었다.
"여긴 나 밖에 없어. 다른 연구원들은 서쪽 동에 자리하고 있지."
"혼자만 쓴다고?"
"그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정국이 대답했다. 아까 충격적인 상황 뒤로 몇 번 더 확인시켜줘서 결국 정국과 자신이 동갑이라는 것을 납득했지만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꿈을 꾸는 기분이랄까. 현실성이 없게만 느껴졌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정국을 두고 혼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지민은 저 쪽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보이자 그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기만 했는데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 패스워드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 」"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정국의 말이 날아왔다. 내가 가만히 있으랬지.
투명한 스크린이 글자로 검게 물들여보일 정도로 휘갈기던 정국이 팔을 휘젓자 시스템이 종료된다.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긴 정국은 지민의 앞으로 다가왔다. 정국이 오자 패스워드 어쩌고 하면서 절 거부했던 잠금장치가 저절로 해제된다. 세 개의 스크린이 공중에 떴고, 정국이 손으로 그것들을 앞으로 끌어오자 더 자세히 보였다. 지민은 소리내어 읽었다. 프로젝트 제이.
"이거, 그거잖아?"
"맞아."
이슈가 되었던 자료가 지금 제 눈앞에 떠올라 있다. 혹해서 열심히 쳐다보았으나 일반인인 제가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정국이 비웃었다. 봐도 모르겠지? 멍청하니까. 지민이 받아쳤다. 멍청한 거 아니거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웬만하면 못 알아볼 거 같은데? 정국은 순순히 수긍했다. 맞아, 여기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르더라. 이게 뭔지 하나도 못 읽으면서 만드는 방법을 내놓으라 윽박질렀었는데, 웃겼지. 정국이 스크린을 손으로 밀어 휴지통으로 집어넣었다. 귀중한 자료를 곧장 삭제해버리는 행동에 놀란 지민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버려도 되는 거야?!"
"놔둬서 뭐하게.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버리는 게 좋아. 어른들이 써먹으면 어쩌려고."
차가운 말투, 심지어 약간 혐오스럽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는 전정국.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간 까칠하다고 생각해도 차갑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 갑자기 왜 분위기가 바뀐건지 모르겠다. 정국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른들은 자신의 배부름만 신경 쓰고, 멋대로 악용하고. 뭐, 이미 체념한 지 오래지만, 이게 역겨운 어른들의 손에 넘어가는 건 못 보겠어. 대화도 어딘가 이상했다.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도 어른이잖아?"
"난 어른 아닌데."
"그럼, 나는?"
검은 눈동자가 한 번 깜박였다. 정국은 불편한 얼굴로 지민을 보고 있다가 엉뚱한 말을 했다. 자꾸 헛소리하면 있던 데에 버리고 올 거야. 정국은 지민을 밀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덥석, 지민이 정국의 손목을 잡았다. 잡지 마, 기분 나빠. 날카로운 말에 지민은 손을 거두었다. 떨어진 손목을 가볍게 턴 정국은 지민을 한 번 힐끔 쳐다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걸어가면서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른들은 다 똑같아. 역겨워."
늘 그랬어. 속에는 시커먼 걸 숨기고 있으면서 얼굴은 웃고 있지. 정국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지민은 말없이 정국을 응시했다. 어른에 대한 혐오와 전정국이 미성년의 상태로 멈춘 모습. 혹시 어른이 되기 싫어서 약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말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길 나가면 사방에 역겨운 어른들이 득실대. 숨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러니 나는 나의 낙원에서만 살아야지. 시끄럽지도 않고, 내가 하는 대로 얌전히 풀리기만 하는 아이들과 함께. 정국의 눈은 지금껏 만들어낸 시스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너도 어른이야. 따스한 눈빛이던 정국의 눈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니야. 내가 왜 어른이야? 어른은 이 밖에 있는 역겨운 인간들 뿐이라고.
"부정해도,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아니라고!"
정국이 내뱉었다. 왜 자꾸 시비걸어, 짜증나게. 자꾸 그러면 너 주워온 곳에다 다시 버리고 올 거야. 협박해도 지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렇게 매섭게 반응하는 정국이 안쓰러워 보였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지민은 천천히 정국에게 걸어갔다. 상처받은 마음을 애써 꽁꽁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려는 불쌍한 사람. 다가오는 지민을 피해 정국이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이내 등에 벽이 닿았다.
정국은 바로 앞에서 멈춘 지민을 바라보았다. 올라오는 손에 입술이 깨물렸다. 뭐 하려는 거지, 불안한 마음과는 다르게 따스한 온기가 볼에 닿아온다. 지민이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진지한 검은색 눈동자, 차분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나도 어른이야."
"......."
"역겨워?"
지민이 진지하게 말했다. 정국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름끼치도록 싫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워? 지민이 재차 물었다. 말없는 정국을 물끄러미 보며, 지민은 손을 조금 더 뒤로 움직였다. 손 안에 감겨오는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절 바라보는 눈동자가 티없이 맑고 아름답다.
"나도 싫어, ...정국아?"
흔들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정국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짓씹던 입술을 놓았다. 타인의 손이 닿았다. 그것도 어른의 손이. 그러나 토기가 치밀지 않았다. 뭘까, 얘는. 뭘까... 이 사람은.
작은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얼굴이 떴다. 침입자가 누군지를 확인한 정국의 표정이 펴졌다. 박지민이었다. 정국은 재빨리 승인 버튼을 눌렀다. 박지민이 온다, 지민이가 와. 손을 멈추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계단을 빠르게 걸어올라가 복도를 지나치고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여기로 오겠지. 난 여기서 기다릴 거야. 정국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으려 노력했으나 다리는 달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있으면 꼭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것 같잖아? 고민하다가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쯤이면 내부로 들어왔을 테지. 그러면 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아이들을 손보고 있다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무심하게 뒤돌면서 왔어? 하고 말할 거야. 아니야, 정국이 발을 멈추었다.
사실, 박지민을 빨리 보고 싶은데.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다가 계단에 털썩 앉았다. 돌아가기도 싫고, 박지민을 마주하러 나가는 건 지는 것 같아서 싫고. 정국이 다리를 모으고 얼굴을 숙였다. 1분 3초,4초,5초. 지민이 절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정국은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왜 그러고 있어?"
가볍게 웃는 소리와 함께 손이 닿았다. 고개를 들자 웃는 멍청한 얼굴이 보인다. 정국은 속마음을 숨기고 퉁명스레 뱉었다. 늦었잖아. 지민이 미안, 하고 대답했다. 할 일이 좀 많았어서. 니가 많아봤자 나보다 많아? 정국이 핀잔을 주었다. 지민과 계단을 올라가면서 계속 불평을 토해내는데, 그 때 검지가 입술 위에 닿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제 입에 손가락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민. 정국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내 말 듣기 싫다는 거야?"
"그건 아닌데, 입 맞추고 싶어서."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정국은 가까워지는 지민을 밀어내지 않았다. 얌전히 닫힌 지민의 눈꺼풀, 입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혀가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웠다. 맨 처음에 입 속에 혀를 밀어넣는 지민에 왜 이러냐고 물어봤었다. 그런 제 물음에 박지민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생각난다. 정국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그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입맞춤이니까.'
지민이 입술을 뗐다. 뭐가 불만인 건지 정국의 눈은 가늘어져 있었다.
"또, 이 표정. 이번에는 왜 그래?"
"넌 맨날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 그러지?"
정국은 지민의 손을 쳐내며 소파에 앉았다. 지민은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국아. 같이 밖에 나가지 않을래?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지민은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예쁜 숲을 발견했어. 차가운 시냇물이 흐르고, 물을 머금은 풀잎들이 흔들리고, 조용한데 사람은 없더라. 그러니 다른 어른들을 마주할 일도 없을 거야.
"싫어."
단호한 거절의사가 떨어졌다. 정국은 지민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넌 왜 그렇게 나를 바깥으로 꾀어내려 하는 거야? 바깥 세상은 귀찮아, 추악하고. 걸어가던 정국이 정면을 응시했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이 안에서 얼마든지 재현해낼 수 있어. 말이 끝나마자마 흰 벽이던 사방이 즉시 어두워지더니 어느덧 두 사람은 숲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입체적으로 눈앞까지 다가와 마치 정말로 숲에 온 것 같았다. 놀란 지민을 보던 정국은 건조하게 말했다.
"그러니 안 나가도 돼. 이렇게 다 할 수 있으니까."
전정국은 아주 어릴 때 여기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따위는 없다고 했다. 버려진 아이. 정국이 어른을 배척하고 싫어하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이용만 당해왔던 거겠지. 그러나 알려주고 싶었다. 이 밖에는 그가 싫어하는 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고.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종군 기자로 노선을 바꾸기 전에는 곳곳을 다니며 풍경을 찍었다. 이런 장소가 있었나? 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곳이 있었다. 며칠 전에 발견한 숲은, 꼭 정국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소였다.
"내 생일, 사실 오늘이거든."
"뭐?"
"생일선물로 내 소원 들어주라."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정국은 열리는 지민의 입을 응시했다. 살며시 휘어지는 눈 끝. 원하는 선물은... , 나랑 같이 나가자.
* *
부아아앙,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시원하게 울려퍼지는 이륜차 소리. 정국은 필사적으로 지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일인용에 적합하게 만들어져있는 스쿠터에 두명이 탑승하니 무게중심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불안하다. 게다가 이런 속도로 달려가면 중간에 뒤집혀지지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박지민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승낙해버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지민이 드디어 속도를 천천히 줄여가며 한적한 곳에 스쿠터를 세웠다.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하하."
정국은 갑갑했던 헬멧을 벗으며 지민을 노려보았다. 가로등도 없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내린 곳은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는 막다른 길이라 딱히 더 걸어갈 데도 없었다. 예쁜 숲이 있다고 그리 자신있게 말하더니. 정국이 불평했다. 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는 아니고, 조금 더 걸어가야 해. 그리고 정국을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 정국이 팔짱을 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피식 웃은 지민이 문장을 꺼냈다. 그럼 눈 감아볼래? 내가 손잡고 이끌어 줄 테니.
"눈 감고 걸으라고? 내가 왜. 그러다 자빠지면 어쩌라고?"
"그러면 내가 잡아준다니까... 응?"
내밀어진 손을 한동안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정국은 결국 잡고 말았다. 눈까지 감아버리자 한 치 앞도 가늠하지 못할 상황이 걱정됐지만 지민을 믿기로 했다.
발 조심해, 이제부터 내려가는 길이라. 정국이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떼었다. 내리막길이다, 그것도 포장되지 않은 길. 발목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났다. 정국이 왁 하고 소리치며 눈을 뜨려 했다. 조심조심 내려가면서도 혹시나 정국이 눈을 뜰까 바라보던 지민이 재빨리 손으로 정국의 눈을 가리고는 타일렀다. 보일 듯 말듯했던 시야가 다시 깜깜해진다.
"별 거 아니야, 그냥 부러져있던 나뭇가지야."
놀랐던 정국은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지민의 손을 잡아내리려고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진짜로. 그 말에 잠잠해진 정국이 다시 한 걸음,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 걸음. 세 걸음, 열 걸음. 기울어진 언덕 같은 곳이 끝난 것 같았다.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고 평평한 땅이 밟혔으니 말이다. 흙 냄새. 여전히 눈은 지민의 손에 가려진 채, 정국이 문득 속으로 중얼거렸다. 투박하지만 시원한 냄새가 난다. 지민이 발걸음을 멈추자, 정국도 그 자리에 멈추었다. 지민이 가린 손을 치웠다. 이제, 눈 떠도 돼. 정국의 속눈썹이 슬며시 움직였다.
"......"
눈을 뜬 후, 보이는 풍경에 정국은 제자리에 붙박혀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 사방에 작은 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별? 아니다. 초록색과 노란색 사이의 불빛을 내면서 공기중을 떠돌아다니는 건... 반딧불이. 반딧불이 하나가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정국은 양 손을 들어 빛나고 있던 그걸 손 안에 가두었다. 안에 내려앉은 듯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닫았던 손을 떼자, 반딧불이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금빛의 꼬리를 남기고 떠나는 반딧불이를 보던 정국의 옆으로 지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때? 괜찮지 않아?"
반딧불이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박지민. 수없이 빛나는 세계에서 지금 가장 빛나고 있는 사람. 아름다웠다. 그 때 그를 데려왔을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자신의 세계가,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정국은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네, 좋아...."
그리고 지민의 코 끝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웃음기 섞인 숨소리. 서로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이 맞물렸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별빛 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진해서 정신이 멍해졌다. 아니, 아니다. 정국은 제 목에 입술을 묻는 지민에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박지민에게 홀려 있었던 거야.
"난 네가 어른인 모습도 보고 싶은데."
"그 말, 97번째야."
"분명히 더 예쁘고 섹시하게 생겼을 것 같단 말이야.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
"목소리는 좀 더 낮아져서 섹시하고... 입술은 빨갛고 야하고.."
"그만 해라, 좀."
점점 더 짙어지는 수위에 듣다못한 정국이 지민을 때렸다. 아야. 아픈 척 신음을 흘린 지민이 모로 누워 정국을 쳐다보았다. 정국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다 채우지 않은 셔츠 사이로 붉은 자욱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왔다. 정국은 여전히 떠다니는 반딧불이들을 응시했다. 지민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풍경 속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는 정국을 끌어안으며 지민이 속삭였다. 다음에는 더 근사한 곳에 가자.
"어디 갔다 와?"
막 연구실로 들어서는 정국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남준이었다. 남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정국은 자리에 멈춰섰다. 남준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차분했지만 그래서 더 위협적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정국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남준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 아래로 비춰지는 바깥 풍경을 주시했다.
"저 사람, 처음이 아니지."
남준이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빠르게 사라지는 스쿠터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남준이 말하는 사람이 지민임을 모르진 않았다. 정국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과 지민의 사이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어디까지 알고 있나. 눈치 챈 지 별로 오래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다 알고 있더라도 김남준은 자신한테 차갑게 굴 수 없었다. 그래서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
남준의 눈썹이 꿈틀댔다. 날카로운 대답에 심경이 뒤틀린 남준은 정국의 앞으로 걸어왔다. 우뚝 멈추어 선 남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국아, 너가 뭘 잊은 것 같은데. 목소리에서 냉기가 배어나왔다. 너, 맘대로 행동 못하는 거 알잖아. 전에는 네가 네 위치를 알고 잘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준의 눈이 무감각했다. 요새는 왜 그래? 정국이 입을 다물었다. 무섭다.
너한테 화내기 싫어. 그러니까 조심하자. 응?
정국은 남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민을 따라 전에 갔던 시냇물이 흐르던 숲을 가고, 넓은 들판도 찾아갔다. 이렇게 좋은 데를 왜 이제 알았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런 장면들을 알려고 하지 않고 저 하얀 연구소에서만 살고 있었겠지.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다. 온 몸이 쫄딱 젖은 꼴이 되었지만 짜증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왔다. 짜릿하리만큼 행복한 순간에 정국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물에 빠진 발 끝으로는 송사리들이 왔다갔다 거렸다. 지민의 손을 잡고 찾아온 장소에 존재하는 것은 항상 자신과 박지민, 단 둘 뿐이었다. 이상적인 세계였다. 지민이 정국의 손을 꼭 잡으며 문장을 속삭였다.
- 난 이 세상에서 전정국이라는 단어가 제일 좋아.
맞아, 나도 그런 것 같아. 정국은 스크린에 써내려가던 글을 멈추고 생각했다. 지민아, 지민아. 네가 너무 좋아. 계속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한 번 알고 나서는 놓을 수 없게 됐어. 어쩌면 내 전부였던 자그마한 세계보다 소중한걸지도 몰라.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정국에게 있어서는 먼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든지 가까운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던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큰 이슈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니까. 연쇄살인마가 3번째 희생자를 냈다더라, 어느 공장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더라. 내 세계와 관련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이슈는 지민이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군기자, 박지민. 정국이 눈을 깜박였다. 어느 순간부터 바깥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국이 물었다. 안 가면 안 돼?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미안. 지민은 정국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사과했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정국이 툭 내뱉었다. 나갔다가 죽으면 어떻게 해? 가지 마. 죽다니...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죽어, 너한테 아직 못 보여준 곳도, 못 알려준 것도 많은데 어떻게 죽어? 지민의 말에 마음이 조금 안정된 정국이 물었다. 언제 떠나는데? 내일 모레. 정국이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지민에게 통보했다. 그럼, 내일 잠깐 여기 들렸다 가. 줄 거 있어.
지민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정국이 매달렸다. 진한 포옹에 당황했던 지민은 곧 팔을 들어올려 정국을 힘 있게 끌어안았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정국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주먹보다 조금 작아보이는 물건에 지민이 물었다. 꼭 장난감 처럼 생겼다. 정국이 대답했다. 절대로 몸에서 떼어놓지 마. 그게 날아오는 총알이랑 파편들을 막아줄 거야. 반경 1m이하로 들어오는 일정 크기와 일정 속도 이상이 되는 물체를 순식간에 분자 크기로 분해하는... 정국은 자세히 설명하려다 지민의 멍한 표정을 보고 말을 쉽게 바꿨다. 그냥 가지고 있으면 총이나 파편에 맞아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돼. 지민의 손을 꼬옥 접어주며 말을 마쳤다. 고마워.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국이 준 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중, 정국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가지 마. 걱정 돼."
"정국아."
지민이 정국을 달랬다. 이름을 부른 것 말고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정국은 알고 있었다. 박지민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나마 한번 더 붙잡고 싶었다. 불안했다. 걱정됐다. 불길한 예감이 절 집어삼키고 있었다. 난 네가 불안해 지민아, 네가 혹여나 다칠까봐 걱정돼. 이 모습이 마지막일까봐... 걱정 돼. 정국은 말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물었다. 언제 가? 다섯 시간 뒤. 새벽에 출발이야. 지민은 정국의 볼을 어루만지다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귀에 속삭였다.
"다치지 않고 돌아온다고 약속할게."
"..돌아오자마자 여기로 와."
"알았어."
"...꼭이야."
정국은 지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네가 어디쯤에서 뭐 하고 있는지 다 아니까, 그러니까.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정국이 불안해하는 걸 느낀 지민이 정국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반드시 멀쩡하게 돌아올게. 지민은 다시 한 번 약속했다. 정국은 지민의 등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쿵쿵, 일정하게 느껴지는 심장소리에 그제야 안심이 된다. 지민은 정국의 입술을 찾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기다려줘."
절 달래주는 목소리가 한없이 상냥해서, 제 입술을 물어오는 체온이 너무나도 좋아서, 정국은 불안감을 잊기로 했다. 그래,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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