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의 작은 마을은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와는 많이 달랐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도로에 차들이 빼곡하고 타인에게 관심없이 자기 할 일에만 바쁜 도시인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여기는 털털거리는 트럭 한두 대만 간간이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서로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건 얼마전에 이사를 온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라, 얼마전에 이사 온 총각 아녀? 우리집 회 맛있는데, 나중에 한 번 들러봐. 나는 짤막하게 웃으며 그러리라 대답하고서는 다시 길을 걸었다. 저 앞에 보이던 등대가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색이 다 벗겨지고 한눈에 봐도 낡아 보이는 등대였다. 마을 사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을이 세워지기 전부터 함께한 등대였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추억이 묻어서인지 철거는 하지 않았다고.
등대를 지나쳐 방파제 앞에서 한동안 철썩이는 바다를 쳐다보았다. 소금기가 담긴 바람이 마구 머리칼을 헝크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한 곳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어떤 아이가 방파제 위의 둑에 앉아 있었다. 소년이었다. 소년의 옆에는 초록색 병 두 개와 하얀색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는데, 초록색 병이 소주병이라는 걸 보고서는 미간을 슬풋 좁혔다. 미성년자 같은데 음주를 해도 되나, 말려야 하나, 괜한 오지랖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총각, 뭘 그렇게 보누?"
"아, 할머니. 저기 앉은 애를 좀..."
한씨 할머니는 내가 보고 있는 쪽을 확인하더니 혀를 끌끌 찼다. 저 아가, 참 안됐어.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저 애의 사정은, 좀 충격적이었다. 제 어미는 도저히 못살겠다 싶어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고, 애비라는 것은 허구헌 날 술을 달고 사니, 저렇게 하염없이 바다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제. 아가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누. 안타깝제...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애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하얀 비닐 봉다리와 초록색 소주 두 병이 그 애의 양 손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전정국. 그 애의 이름은 전정국이라고 했다. 나이는 18세. 보통이라면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으나 집안 꼴이 저러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를 했다고 했다. 무능한 아비에 매정한 어미. 마을 사람들은 다 정국이를 알고 있었고, 집 사정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면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여기도 도시와 비슷한 걸까? 라고 처음에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란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전씨가 되게 무서워, 저번에는 왜 지 집 일에 간섭하냐며 홍씨네 가게를 아주 뒤집어 엎고 갔었지. 그래서 그 뒤로는 어쩔 수 없었어. 딱하지만 어떡해, 우리도 살아야 하는데.
살아야 한다. 맞는 말이었다. 예전의 나라면 동감하며 안타깝지만 그 애에게서 시선을 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을로 이사온 뒤로는 별로 소용이 없어졌다. 25살의 나는 우울증과 신경 과민증이 왔다.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기 시작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를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줄 수는 없었다. 병원에 가서 1년이 넘게 치료를 받았으나 그때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나는 말라갔고, 비틀어져만 갔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어느 날 도로 한복판에 훌쩍 뛰어들어 생을 끝마치는 방법을 선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걸 정리하고, 이 해안가의 작은 마을로 내려왔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내기만 해보려고. 병이 낫는다면 도시로 돌아갈 거였지만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애초에 나는 이 곳에서 죽으려고 온 걸지도 몰랐다.
아무런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자연스레 그 애를 시야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 애는 주로 내가 처음 보았던 등대 주변의 둑에 앉아 있었는데, 두 다리를 모으고 한참동안 수평선을 응시하곤 했다. 사나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둑 위를 위태롭게 거닐기도 했는데,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그 애가 바다로 빠질까 아니면 몸을 돌려 다시 지상에 발을 디딜까 저울질하는 건 아닐까 했다. 다행히도 매번 둑 밑으로 내려왔다. 내 옆을 지나갈 때 나는 그 애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열여덟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무섭도록 침잠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애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한껏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도 그 누구도 그 애에게 인사를 해주지 않았다. 그 애도 굳이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아,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집에 가서 아버지라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할까. 문득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어쩐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 애의 목소리를 들었던 때는 그로부터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난 뒤였다.
"너! 불쌍해서 봐줬더니 이제는 훔치기까지 하니!!"
정씨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말이 공기를 갈랐다. 소리가 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 애가 정씨 아주머니에게 팔과 등을 두드려 맞고 있었다. 그 애는 반항하지 않았지만 얼굴은 억울한 빛이 가득했다. 칼을 벼린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 그 눈을 본 아주머니는 더 크게 화를 냈다. 훔친 주제에 어디서 그런 표정을 지어?!! 정씨 아주머니는 좀 전보다 소리를 크게 높이기 시작했다. 외상값도 안 주고!! 안 되겠다, 너...! 더는 두고 볼 수 없어진 나는 그쪽으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정씨 아주머니를 불렀다.
"아주머니."
"는... 응?"
"제가 대신 낼게요. 밀린 외상값도요. 그러니까 정국이 그만 때리세요."
"총각이 그럴 필요는 없어."
"아뇨, 낼게요. 그러니까 그만해주세요."
단호한 내 말에 아주머니는 그 애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마음을 정한 건지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계산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해주었다. 외상값이 좀 많이 밀렸어, 50만원 정도. 다 애비가 술을 사오라 한 건데 아무리 외상이라고 해도 더는 무리겠다 해서 밀린 돈을 주지 않으면 안 주겠다고 했더니, 훔치려고 하더라고. 나는 문 밖에 서 있는 그 애를 바라보며 말을 들었다. 그 애는 망부석처럼 고개를 숙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훔친 적은 없던 앤데,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그만... 아주머니는 후회하는 듯한 말을 했다. 대신 계산을 마친 나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앞으로는 정국이한테 그냥 내주세요. 술이든, 뭐든요."
"응?"
"제가 대신 낼테니까요. 정국이한테 돈 받지 마시고, 나중에 저한테 얼마 나왔다고 알려주세요."
조금 충동적으로 말한 후 슈퍼를 빠져나왔다. 나는 그 애를 불렀다. 정국아. 그러자 고개가 들어올려진다. 피딱지가 어려 있는 입가와 맞은 흔적이 보이는 볼을 보자 나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왜 훔쳤는지 이유를 물어보고 타이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게 필요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어, 음. 잠깐 저기에 앉아 있어볼래? 약 사가지고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약국에서 약을 사고 돌아오면서 그 애가 없어져 있으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했으나 그 애는 차분히 앉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후시딘을 비롯한 연고와 소독약을 꺼냈다. 약을 묻혀 다친 상처를 톡톡 건드리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픈가. 나는 상처가 어쩌다 생겼는지 묻지 않았는데,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했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밴드까지 말끔하게 붙여주고 입을 열었다. 다 됐다. 그리고 알려주어야 할 걸 말했다. 슈퍼집, 다시 가도 돼. 외상으로 하겠다 말하지 않아도 필요하다고 하면 그냥 주실 거야. 과자나 음료수나,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사먹어도 돼. 그러자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안 도와주셨어도 돼요."
"이미 도왔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니?"
"..........."
"뭐, 딱히 고맙다는 말을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아저씨."
"26살에 아저씨라는 말을 듣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충분히 아저씬데."
"........"
"...고맙습니다, 형."
나는 피식 웃으며 옆에 따라 앉았다.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형. 응? 왜 훔쳤는지 안 물어봐요? 왜 물어보겠어, 사정이 있겠거니- 하지. 그럼, 상처가 왜 생겼는지도 안 궁금해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애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내가 열한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어요. 지긋지긋한 남편과 애새끼와 집구석이 싫어 죽겠다고. 그때까지만 했어도 아빠는 날 때리진 않았어요. 그저 술을 마시며 나 때문에 엄마가 나갔다는 말을 할 뿐이었죠. 그러다 4년 전부터 손을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취했을 때만 때렸는데, 이제는 술을 마시거나 안 마시거나 눈에 띄기만 하면 때려요.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빠가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 작자를 아빠라 부르는 것도 싫증나요. 전에 몰래 여기를 떠나려고 했는데... 걸려서 죽도록 맞았어요. 씨발놈의 새끼, 키워줬더니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하지는 못할망정 애미처럼 도망갈 생각이나 한다고... 아빠가 날 키우긴 뭘 키웠냐며 맨날 술만 마시고 있지 않았냐며 대들었더니 빈 술병을 들더라고요. 입구가 한 쪽 깨진 술병이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집을 도망쳐 나왔었어요.
"형은 이름이 뭐예요?"
"...박지민."
"형은 도시에서 살았죠?"
"어떻게 알았어?"
"그런 건 딱 보여요."
그 애는 푸스스 웃었다. 마치 별이 흩어져 땅으로 내리는 것마냥 아름답고 처연한 웃음이었다. 형도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로 내려온 거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멀쩡해 보이는 형도 사실은 아픈 사람이죠. 그 애는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다 아픈 사람들이에요. 아까 정씨 아주머니도, 남편이 바람나서 버리고 갔고, 김씨 아저씨는 태풍에 자식을 잃었죠. 다 멀쩡해 보이지만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에요. 그 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도와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고, 도움을 청하지도 않아요. 나 하나 챙기기에도 벅찬 사람들이니까요. 의외의 말이었다. 그 애는, 정국이는 어른만큼, 아니 어른보다 더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도움을 받았더니 기분 좋아요."
"괜찮으면 힘들 때, 아니, 심심하거나 하면 형 찾아와."
"그래도 돼요?"
"응."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형. 정국이는 맑게 웃어보였다.
정국이는 말이 많았다. 누구한테 이야기 할 수 없으니 그걸 나에게 쏟아내는 듯 싶었지만 귀찮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둠을 휘감고 다니는 애라고 생각했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순수했으며,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입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재미있었다. 한참을 떠들다 '너무 많이 떠들어서 화난 건 아니죠...?' 하고 물으며 눈치를 보곤 했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내가 화났다고 착각한 이유는 눈앞의 생명체가 이토록 사랑스럽고 빛날 수 있나 궁금해서 한없이 진지해진 내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같이 낡은 등대 주변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정국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이 등대 굉장히 오래된 거 알아요? 이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는 등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색이 바랬긴 했지만 몇 년 전에 여기서 빛이 새어나오는 거 봤었는데. 내부는 의외로 쓸만할지도 몰라요.
"한 번 들어가볼래요?"
"엉?"
"들어가요, 들어가자."
어찌할 새도 없이 정국이의 손에 이끌려 등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입구는 쇠사슬로 칭칭 동여매었을 뿐, 자물쇠조차 없었다. 정국이는 한동안 꼼지락거리며 쇠사슬을 풀어내더니 이내 찰캉 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육중해 보이던 문도 정국이의 손끝에서 열리고 말았다. 형, 뭐해요? 빨리 와요! 이미 반쯤 몸을 들이밀고 나를 향해 손짓하는 정국이의 모습을 보며 갈등했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열심히 갈등했으나 결국은 정국이의 말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들어가고 말았다.
내부는 퀴퀴했고 어두웠다. 이런 건 조금 불편한데. 정국이는 연신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불, 불... 아 찾았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등불이 점멸하더니 노란 불이 전체적으로 들어왔다. 등대 안에는 빈 상자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며, 옆에는 올라가는 계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뭐야, 생각보다 별거 없네요. 그럼 뭘 기대했는데? 음, 최소한 이것보다는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정국이는 발로 상자를 툭툭 치며 받아치다가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 돌아보았는데,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정국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다.
철근이 울리는 소리가 등대 안에 온통 울려퍼졌다. 마지막까지 올라갔을 때 나는 검게 물든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태양도 없고, 아직 달도 뜨지 않은 시간. 쏴아아아 하고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던 나는 몸을 반쯤 빼놓고 있는 정국이를 보고 황급히 팔을 뻗어 끌어당겼다.
"왜요?"
"아, 아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 날 향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몸 전체를 기울여 바다로 투신하는 모습이 비춰보였었는데,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형은 가끔 그런 눈이더라. 정국이는 아직도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내 손을 풀어내어 다시 네모낳게 뚫린 곳으로 가며 중얼거렸다. 걱정된단 눈빛으로 날 봐요.
"아니, 불안한 눈인가?"
지금은 나와 이렇게 웃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저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걸 안다. 어른스러운 말을 곧잘 하지만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감당하지 못할 폭력들이 쏟아지는 것도 안다. 아버지가 어느 날 확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정국이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이 확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정말로, 정국이가 사라져 버릴까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국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상한 생각 하면 안 돼."
".........."
"어디로 떠나고 싶으면... 형한테 말하고. 도와줄 테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정국이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턱을 괴며 잔잔한 어조로 말한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정국이가 말을 이었다. 어디로 떠나고 싶다, 라... 예전에는 생각 많이 했는데, 이제는 별로 안 해요. 정국이는 눈매를 곱게 접으며 말했다. 형이랑 있는 이 바닷가가, 좋아요.
누워 있으려니 생각이 퐁퐁 떠올랐다. 예전에는 자기 전에 생각들이 떠오르면 견딜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고, 달라지게 만든 사람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정국이.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사랑스러운 그 애. 좋은 것만 받고, 좋은 것만 보고 살아야 할 나이인데 왜 하늘은 그 애에게 나쁜 것만 내렸을까. 정국이는 지금 집에 있을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에게 맞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다 하니 어쩌면 혼자 있을 수도. 그런데 왜 나는 누워서 생각만 하고 있을까. 팍 하고 든 건 그거였다. 그동안 정국이를 만나면서도 나는 말만 주고받았을 뿐, 실질적으로 해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라는 작자의 손에서 구해주지도 않고, 집으로 가야겠다는 정국이를 붙잡지도 못했다. 다음 번에 만날 때 정국이는 얼굴에 피멍을 또 매달고 오게 되겠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한밤중의 마을은 가로등도 몇 개 밖에 켜져있지 않아 몹시 어두웠다. 어두운 길을 향해 걸음을 바삐 옮기면서 나는 정국이의 말을 떠올렸다.
- 마을에서 제일 밑에 있는 집에서 살아요. 매년 태풍이 불 때마다 집이 쓸려내려가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요. 아버지든 뭐든, 다 쓸어가버리라고...
낡은 등대를 지나치자 걸음이 더 빨라졌다. 집에 들이닥쳐서, 누가 있든 없든, 정국이의 손을 잡고 나가서 어디론가 가버리자고. 나랑 같이 가자고 할 말을 되뇌이는데 저 앞에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성인이라기에는 조금 작은 체구였다. 그 사람이 더 가까워져서 내 주변의 가로등까지 다가왔을 때.
"ㅎ, 형...."
정국이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손을 비롯한 온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애의 손에 묻어 있는 흥건한 피를 보고 상황을 직감했다. 나는 미친듯이 달려가 정국이를 끌어안았다. 덜덜 떨리는 몸은 내 품에서도 진정되기를 거부했다.
"혀, 형, 형. 내가,"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괜찮아...."
"내가, 아빠, 를...."
끝내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정국이는 펑펑 울면서 쏟아냈다. 죽였어요...
정국이는 꺽꺽 울었다. 아빠를, 죽였어, 내가... 찔러버렸어... 정국이는 마치 고장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을 쉴새없이 반복했다. 나는 정국이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주며 같이 울었다. 말하지 마, 괜찮아, 아냐, 너 잘못한 거 없어... 피를 토해내듯 괴로웠다.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어야 하는 건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어두운 파도소리에 맞추어 흔들거렸다. 어떻게 해... 나 이제 어떻게 해... 젖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피로 흠뻑 젖은 정국이의 손을 씻어냈다. 낡은 등대 안에서 정국이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저번처럼 불을 켜지는 않았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하기 위해 구석으로 도망쳤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했다. 목을 조르는 우악스런 손에 미친듯이 발버둥치다가 손에 잡히는 걸로 힘껏 밀어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고 했다. 눈을 내리니, 깨진 소주병이 아버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고. 정국이는 새빨개진 눈으로 울었다. 어떡해... 나 이제 어떡해요... 정국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괜찮아,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어떻게 괜찮을 수 있냐고 중얼거렸지만, 결국 그 애는 지쳐서 잠들어버렸다. 나는 말라붙은 눈가를 쓸어주고 그 애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너는 꿈을 꿨다고만 생각해.
단언컨데 내 손목에 수갑이 채워질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난 수갑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고 있었다. 익숙해지는 게 이상하려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때였다.
"형!!!!"
울부짖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면서 그 애는 나를 보고 울부짖었다. 안 돼, 안 돼. 형이 거길 왜 가요....! 왜...! 정국이는 경찰에게 붙들려 내 손목에 채워져있는 수갑을 보고 고개를 미친듯이 저었다. 안 돼, 안 돼! 정국이는 이를 악물며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러나 경찰이 제지했다. 나는 경찰의 손에 따라 이동하다 정국이 앞을 지나가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다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어쩌면 내 말을 읽어냈던 걸까. 정국이는 어제보다 더 눈물을 더 펑펑 쏟아내면서 울었다.
교도소에서의 5년은 끔찍했다. 거짓으로라도 괜찮았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선택해서 들어온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재판을 받을 때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적이 있는 날 보았는지 교도소에서도 주기적으로 의사가 찾아왔다. 의사가 물어보는 대로 답을 해주고, 하라는 대로 하던 나는 어느 날 그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기록에서 보았던 우울증이나 신경 과민 증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당신이 우울증으로 사람을 죽였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고. 맨 처음에는 내가 사이코패스인줄 알았다고 했다. 우울증도 아닌데 우울증세를 흉내내서 그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미친놈이 아닌가 했다고. 그런데 말하다보니 아닌 걸 깨달았다고 했다.
'어떤 사람을 위해 대신 여기에 들어온 것, 맞죠?'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면 혹여나 의사가 뒷조사를 했다가 찌른 사람이 내가 아닌 정국이라는 걸 알아내기라도 할까봐.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그동안 몇 번의 면회가 있었지만 정국이를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 애가 날 잊었는지 잊지 않았는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정말로 잊었다고 하더라도 원망은 없다. 그 애는 앞날이 창창했고, 나는 그 애를 구해주고 싶었다. 오히려 늦게 행동해 끔찍한 경험을 안겨주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무의미한 삶이 그 애를 구원해줌으로써 조금 더 가치가 있어졌다, 고 생각했으니 그 애가 날 잊어도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면 상관없었다.
"1013번. 나와."
출소를 이끄는 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침했던 옷을 벗어던지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나가서는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라고. 나와 친한 교도관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나는 마주 웃어주며 문 앞에 섰다. 끼이익 하고 무거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몇 년만의 바깥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멍해져서 가만히 서 있는데, 교도관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누가 아까부터 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교도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생했다. 나에게 던지는 말이었을까. 닫힌 문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이제 어디를 가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쪽에서 앉아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를 알아차리자 나는 놀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성숙하고, 더 커진,
"지민이 형..."
'그 애' 였음을.
정국이는 와락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내 키보다 커져서 오히려 내가 안긴 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형. 끌어안고 있던 정국이는 날 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날 보자마자 한 말이 고생했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아닌 단지 '형'이라는 글자 하나뿐이었지만 알아들었다. 나는 정국이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매미가 시원하게 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정국이를 초여름에 만났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헤어졌다. 혼자서 다섯 번의 계절을 지냈으나 거기에 여름은 없었다. 비로소,
여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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