촥, 하고 커텐을 젖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방 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문을 덮고 있던 커텐이 모두 옆으로 밀려나자 방 안은 본격적인 아침을 맞이했으나, 침실의 주인은 아직도 꿈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에 정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도련님."
"......"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정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엠이 시간을 확인했다. 곧 있으면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정국은 자고 있는 중에 깨우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지금 깨우지 않는다면 후에 어떠한 잔소리들을 들을지 몰랐다. 물론, 정국에게서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서. 알엠이 정국에게 다가가 그를 흔들었다.
"흔들지 마...."
정국이 잠이 묻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하지만 알엠은 냉정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시면 일정이 모두 틀어집니다."
"틀어지라 그래...난 잘거야..."
잠에 젖은 손이 절 흔드는 알엠을 떼어내려 배회하다가 도로 이불 위로 안착했다. 불평을 토해내다가 다시 잠이 든 기색이었다. 하지만 알엠은 더 이상 봐줄 생각이 없었다. 알엠은 왼손으로 정국의 등을 받친 채 한번에 훅 하고 일으켰다. 그 바람에 타의로 잠이 깬 정국이 코끝을 찡긋했다가 결국 서서히 눈을 떴다.
"30분 뒤 대기시켜놓은 차를 타고 이동하셔야 합니다."
"알겠어, 알겠다고."
정국은 짜증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으, 하고 목을 한 번 돌린 정국이 이불 밖으로 맨 발을 내밀어 슬리퍼를 신고서는 완전히 일어났다.
"나 씻고나올 동안, 알엠이 오늘 입을 옷 좀 골라주라."
그렇게 말을 한 정국이 몸을 돌려 씻으려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막 일어나서 뒷머리가 눌린 정국의 머리카락을, 알엠은 한동안 바라보았다.
1.
알엠이 처음 정국을 봤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이었다. 그가 아직 16살이고, 아직 정국이 5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또한, 알엠이라는 명칭이 아닌 남준이라고 불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알엠, 아니 남준이 지금 양지에서 정국의 경호를 하는 것과는 달리 그 때의 그는 음지에 속해있었다. 부모에게서 버려져 검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던 아이, 그게 그 때의 남준이였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비정함을 알았다. 배곯이를 하지 않기 위해 도둑질은 수도 없이 해봤으며, 수없이 많이 맞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때려보기도 했으며,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다. 검은 과거. 그대로만 자란다면 언젠가 잘못 걸려서 비명횡사하거나, 완벽한 암흑가의 사람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남준은 생에 집착이 강했다. 죽지 않으려면 그 누군가가 자신을 해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 하거나,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보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깨달은 남준은 어느 날, 제 발로 암흑가의 조직으로 걸어들어갔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하고 무감정한 눈동자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쓰러진 다른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남준은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그들에게 물었다.
'합격인가요?'
남준은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그 뒤로 조직에서 시키는 것들을 묵묵히 따랐다. 손에서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치안이 엉망인 데다가 사람이 매일 죽어나가는 음지 중의 음지인 이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정상이었다. 남준은 자신이 평생 음지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난 것도 이 곳이고, 지금 살아가는 곳도 이 곳이고, 훗날 죽는 곳도 이 곳이리라.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남준은 터진 입가를 한 채 강제로 무릎이 끓려져 있었다. 일이 틀어진 탓이었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에 길게 자란 앞머리가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남준은 제 양 팔을 부서져라 잡고 있는 사내들을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잡힌 이상 반항할 생각은 없는데도. 몸싸움 도중에 오른쪽 어깨가 뒤틀려 지금 압박하고 있는 힘에 식은땀이 배어나왔지만 남준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한 남자가 차 안에서 내렸다. 문을 열어준 사람이 차에서 나온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남준의 바로 앞에까지 걸어온 남자가 입을 떼었다.
'그 눈.'
'.........'
'충견의 눈은 아니군.'
남자는 남준의 앞에 우뚝 선 채 그렇게 말했다. 말이 오가지 않는 침묵 속을 빗소리가 채웠다. 어떻게 할까요.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그렇게 물어왔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동안이나 남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계속 그렇게 음지에서 살 테냐, 아니면 양지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볼 테냐.'
남준은 눈꺼풀을 따갑게 때리는 빗방울 속에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끝이라고 생각했더니 또다른 기회가 찾아와 있었다. 선택지가 없었기에 음지에서 살아왔지만, 지금처럼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택할 것이었다. 남준은 대답했다. 그러자 대답을 들은 남자가 다시 말했다.
'그러하면, 앞으로의 네 이름은 알엠이다. 과거는 버려. 이름도, 네 모든 것도.'
'.......'
'그러지 않으면 따라오지 못할 거다.'
남준은 이름을 버렸다. 그러하자 모든 것을 버린 셈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남준에게 주어진 것은 어차피 이름 하나밖에 없었기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버린 남준, 아니 알엠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주어졌다. 그를 데려온 남자는 선박회사의 중심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알엠을 데려온 회장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뜻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여 토를 달지는 않았다.
거추장스럽게 이마를 길게 가리고 있었던 앞머리를 바르게 쓸어넘겨 고정하고, 행동이 편하게끔 헐렁하게 입고 다녔던 옷 대신 몸에 딱 맞는 셔츠와 바지를 입은 알엠은 저를 부르는 회장을 돌아보았다.
'오늘부터 네가 옆에 있어줘야 할 아이다.'
알엠은 제 허리께밖에 오지 않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이의 눈동자는 맑았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잡아온 작은 손을 느낀 순간, 알엠은 본능적으로 이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이 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2.
"이거 언제 끝나?"
아침부터 일어나기 싫다며 늑장을 부리고, 차를 타러 가는 그 순간에도 가기 싫다느니 안 가면 안 되겠냐느니 불평을 토해내던 정국은 바쁜 하루를 마무리짓는 연회장에 도착해서 한동안은 사람들과 잘 섞여있는 듯 했으나, 결국 두 시간을 채우지 못 한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알엠에게 다가왔다.
"피곤해."
"...내일은 특별히 깨우지 않겠습니다."
"그런 소리가 아냐, 지금 집에 가고 싶다는 소리인걸."
"하지만 회장님이 아직 자리에 계십니다만."
정국이 얼굴을 돌려 제 아버지가 있는 곳을 눈으로 찾다가 발견하고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엠은 바뀌는 정국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정국은 제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회장이 무척이나 바빴던 탓에 정국의 곁에 많이 있어주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풍기는 것과 동시에 자식에게마저 엄격한 탓이 컸다. 그래서 정국은 어리광이라는 것을 제 아버지에게 부린 적이 없었다. 대신, 그것들을 아버지 대신 항상 제 옆에 있었던 알엠에게 풀어내는 성향이 있었다.
"피곤한데..."
정국이 진심으로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엠은 정국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여러 곳을 이동한 탓에 눈동자에 피곤함이 묻어나오고 있었고, 쌍꺼풀도 한층 무거워져 있었다. 각질이 일어난 정국의 입술을 주시하던 알엠이
"그럼, 쉴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하고 말을 떼었다. 목소리에 정국이 그를 돌아본다. 무전으로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고 하던 알엠은 잠시 후에 원하던 대답을 얻었는지 정국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별관에 빈 방이 있는 모양입니다. 거기서 잠시 주무시게 해드리겠습니다."
정국은 몸을 돌려 걸어나가는 알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그의 뒤를 따라갔다. 걸어가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들었던 바 대로 별관으로 옮겨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와 쉴 곳을 안내해주었다.
조용하고도 쾌적한 방에 안내된 정국은 외투를 벗어놓고 갑갑하게 목을 옥죄이고 있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알엠은 정국에게서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고 있는 참이었다. 마침내 비교적 가벼운 복장을 한 채 푹신한 침대 위에 누운 정국은 방을 닫고 나가려는 알엠을 불렀다.
"이리 와."
별다른 말 없이 알엠은 정국이 앉아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와 한 쪽 무릎을 끓었다. 정국이 눈을 깜박이다가 알엠이 앉아있는 쪽으로 몸을 살짝 틀고서는 말했다.
"같이 잘래?"
"근무중입니다."
"그럼 나가지 말고 옆에 있어줘."
곧바로 선택지를 바꾸는 정국의 말에 알엠이 그를 바라보았다. 깜박, 깜박.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한동안을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던 정국이 한 손을 들어올려 알엠의 얼굴을 만지려는 듯 뻗어지다가 침대보로 추락했다. 정국이 입을 열었다. 알엠.
"나, 곧 성인이 돼."
"미리 축하드립니다."
"그 말은, 더 이상 애가 아니라는 소리야."
정국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애가 아니야, 알엠.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었어.
이어지는 문장들을 듣고서도 알엠은 침묵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말 뜻에 정국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눈치챌 수 있었지만 차마 답해줄 수가 없었다. 있잖아.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성인이 되면 아버지께 부탁을 하나 할 거야."
"........"
"너를 계약에서 풀어달라고."
알엠은 조용히 정국을 응시했다. 계약이 끊어지면 더 이상 나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도, 선을 지킬 필요도 없어져. 그럼 당신이 나를 도련님이 아닌, 그저 전정국으로 볼 수 있는 거지.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줄 거지?"
"주무세요."
알엠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3.
20살. 미성년에서 벗어나 성년이 될 수 있는 날. 성인이 된 정국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가 열렸다. 홀에서는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웨이터들은 와인잔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주인공인 정국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알엠은 한 쪽 구석에 서서 그런 정국을 바라보았다.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아치는 정국. 지켜보던 알엠의 머릿속에서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버지께 알엠을 계약에서 풀어달라고 할 거야.'
회장과 자신 사이에 눈에 보이는 계약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낸 적도 물론, 없었다. 그것은 둘 사이에 체결된 암묵적인 조항이었다. 어린 정국을 저 대신 옆에서 항상 지켜주고 보살펴주되, 선을 넘지 말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사랑을 갈구하고 싶은 정국이 정말 회장에게 저를 놓아달라고 부탁하더라도 결과는 정국이 원하는 대로 될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무것도."
옆에서 물어오는 물음에 알엠이 단답으로 짧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서도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가 알엠의 시선을 따라 파티의 주인공인 정국에게로 향했다. 그리고서는 흐뭇하게 웃으며 중얼거린다.
"그렇게 작던 도련님이 어느 새 다 크셨네요."
"그래."
"느낌이 어떠십니까?"
알엠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정국을 보다가 알엠에게로 다시 시선을 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저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도련님이 다섯 살이었을 때부터 옆을 지켜오신 게 아닙니까. 결혼은 아직 하지 않으셨지만 자식 하나 키운 느낌이시겠네요. 사내는 저가 말해놓고서 하하 웃었다. 알엠은 웃지 않았다. 자식 하나 키운 느낌은 맞았다. 그러나 단어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는 스스로 걷게 도와드려야겠지."
"예?"
"아이가 아니시다. 언제까지고 옆을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절 바라보는 정국의 시선을 잠깐 마주하던 알엠은 곧, 몸을 돌렸다.
4.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파티도 무사히 마치고 시간은 차근차근 흘러 거의 2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소처럼 잠에 취해 이른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하던 정국은 커텐이 촥 열리는 소리에 미간을 찡그렸다. 제 옆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곧 익숙하게 '도련님,'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제 귀를 파고들자 정국은 단번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 안으로 들어온 인영은 지금껏 아침마다 절 깨워왔던 그처럼 머리를 쓸어넘겨 고정시키지도 않았으며, 그처럼 어두운 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정국이 몸을 일으켰다.
"알엠은?"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완벽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은 정국은 사내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알엠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사내의 입에서 대답이 들려왔을 때 정국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어제부로 그만두셨습니다."
이미 인수인계도 다 마치셨는데요. 아시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남자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저택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각이 잡혀있는 셔츠와 정장을 걸친 채 정국의 옆에 있던 것과 달리, 지금 알엠은 면 티와 편한 바지 차림으로 혼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알엠은 회장에게서 무언의 대답을 들었다. 잠시동안만으로 시선을 교환한 알엠은 회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회장은 알엠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알엠은 그 날부터 바로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빠르고 조용하게, 정국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약 2주간 수습을 마치고 마지막 날이었던 어제 밤 잠들기 전에 제게 인사를 건넨 정국을 보며 알엠은 생각했었다.
저 웃는 얼굴이, 과연 내일 자신이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웃고 있을까 하고.
5.
당신을 풀어주면 안 되냐고 물었던 건, 나를 도련님이 아닌 당신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편하게 대하면 안 되겠냐는 생각에서 한 것이었는데. 도망갈 줄은 몰랐다.
정국이 주먹을 말았다. 코끝이 시큰했다. 물어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알엠이 그만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더라. 자신만 몰랐었다. 말도 한 마디 없이 떠날 줄 몰랐다. 아니, 마음 속으로는 언젠가 이 사람이 떠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동요 없이 떠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받기 전날, 방문을 닫고 나가는 알엠은 일상과 같았고, 또한 일상과 같은 인사를 건넸다. 문이 닫혔고 잠이 들었다. 평소와 다른 점을 보인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배신감이 컸다.
15년이다. 15년을 알아왔다. 그것도 매일, 눈을 뜨면 보이는 게 그였고 잠들기 전까지 늘 보았던 게 그였다. 5년을 알아온 사람이라도 저렇게 작별을 통보하면 상처받는다. 하물며 15년이나 된 사이에 작별을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됐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뻔히 알고 있었던 거라면.
"어디 가세요?"
계단을 내려와 성큼성큼 나가는 정국을 보고 물어온 목소리였다. 정국은 그 말을 무시한 채 제가 원하는 말만을 뱉었다. "아버지가 내가 어디 갔는지를 물으면 모른다고 해." 그렇게 말한 정국은 저택의 문을 열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짙게 내리고 있었다. 정국의 뒤를 따라나온 남자가 우산을 든 채 정국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국은 남자의 손에서 우산을 뺏어들었다. 우산을 피는 정국을 보던 사람이 조바심이 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정말 안 알려줄 거니까, 그대로 말해."
정국은 빗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도련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은 정국은 빗줄기 사이로 사라졌다.
6.
안경을 쓴 채 책을 읽고 있던 알엠은 쏴아아아 하고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창 밖을 바라보았다. 가을비가 답지 않게 거셌다. 빨래는 내일 해야겠군. 심심하게 생각하던 그는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일자리를 그만둔 지 거의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다시 일자리를 구하러 나가야겠지만 현재의 그는 일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서 가까운 곳에서 장을 봐 오거나, 서점에서 책을 골라오는 일들을 제외하고서 밖으로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돈이 떨어질 즈음이면 곧 일자리를 구하러 밖으로 나가야겠지만 그 시점은 빨리 오지 않을 터였다.
팔랑팔랑, 책을 읽고 있던 알엠은 빗소리에 희미하게 섞여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 번 울린 초인종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세찬 비 소리에 혹여나 집주인이 듣지 못했을까, 여러번 울려도 될 법했는데 그러지 않는다. 알엠은 이걸 누른 손의 주인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끼익. 칠한 나무 문이 열렸다. 알엠은 세찬 비에 거의 젖다시피 한 정국을 내려다보았다. 문이 열렸을 때, 정국은 우산을 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탁. 바닥으로 떨어진 우산이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알엠은 정국에게 자신이 어디로 갔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저택에 살던 그 누구에게도 알려준 바 없었다.
"알엠."
"......"
알엠은 침묵했다. 비가 안에까지 들이쳤다. 하지만 알엠은 정국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았으며, 정국 또한 집 안으로 들어가고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서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입술은 핏기가 빠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알엠."
"........"
"남준."
제 본명을 부르는 소리에 남준이 정국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국의 눈은 처연했다. 남준은 과거, 정국의 물음에 설핏 알려주었던 제 이름을 생각했다.
정국은 남준을 보자마자 왜 말도 없이 그만두었느니 따위를 묻지 않았다. 남준. 그의 이름을 하나 부른 것만으로도 남준은 그 안에 섞인 정국의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들이치는 비에 남준의 옷이 차차 젖어들기 시작했다. 정국이 이제 덜덜 떨리는 입술로 남준에게 내뱉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알엠이 아니야. 나도 더 이상 당신이 보살펴 줘야 할, 도련님이 아니고."
그리고 말을 마친 순간 정국은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남준은 쓰러지는 정국을 급히 안아들어 이마를 짚었다. 짚은 이마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비를 뚫고 한참이나 걸어온 탓이었다.
7.
정국이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두어번 깜박이자 또렷해졌다. 남준이 제 옆에 앉아 안경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정국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각. 책장이 넘겨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남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정국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기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비가 그렇게 오는데 옷을 얇게 입고 다니시면 어떡합니까."
정국은 남준을 바라보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열에 시달리다가 방금 내려간 탓에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본 남준이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으세요."
정국은 말을 듣지 않은 채 남준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가져가며 말했다.
"책, 거꾸로 들고 있었어."
남준이 답지않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왜 오셨습니까.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반 정도 가리며 중얼거린 남준의 말에 정국이 대답했다.
"글쎄, 왜일까."
"......."
"확실한 건, 그리워서 온 건 아니라는 거야."
남준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정국은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준. 정국이 다시 그를 불렀다. 정국이 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정국이 말했다. 손 줘. 예전처럼 손을 주는 대신, 움직이지 않는 남준을 바라보던 정국은 엺게 미소지었다. 이거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왔어."
정국이 도로 손을 거두었다. 담담한 어조에 남준의 입술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예상했다는 어조. 포기한 말투였다. 내내 생각했어. 왜 나에게 말도 없이 떠났을까, 그 전에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충분히 떠나지 않고도 곁에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그 눈동자에 비친 감정을 내가 잘못 읽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렇다면,"
정국이 남준을 바라보았다. 풀어달라고 한 게 시작점이 되었던 걸까. 선을 넘지 않은 채 내 곁에 머무를 것. 정국이 남준과 회장 사이에 존재했던 암묵적인 계약을 읊었다. 남준의 시선을 읽어낸 정국이 문장을 덧붙였다.
"제어장치가 사라지자 나를 혹여나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해서 떠나간 게 아닐까."
정국이 이불을 걷어내고서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있는 남준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정국이 양 손을 남준의 볼에 가져다댔다. 처음으로 닿는 그의 온기에 황홀감마저 느껴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관계를 새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
비가 그치고 있었다. 남준이 정국의 손을 잡아내리고서는 끌어안았다.
서서히 그치는 빗줄기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창문 속에는 사랑을 시작한 연인 두 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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