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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백야행(白夜行) 上

4월에 서리가 내렸다. 지민이 사는 냇골은 한여름에도 선선한 느낌을 받을 정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 뒤 소복이 쌓인 흰 눈은 놀라울 만했다. 마치 한겨울마냥 냇골 전체를 뒤덮은 눈송이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내게 했다. 4월에 이 정도의 눈이라. 미닫이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입 속으로 되뇌이던 지민은 수풀 사이로 자그마한 정수리가 보이자 눈을 의문스럽게 깜박였다. 선생님! 외치는 목소리는 작지만 우렁차기까지 하다. 무슨 일이길래 저리 뛰어오며 부르는 걸까. 궁금해하며 서둘러 밖으로 발을 딛었다. 앞머리가 휘날려 이마를 훤히 까 보이며 달려온 소년은 지민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니? 그리 뛰어오고."



어지간히 급했는지 헥헥이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허리를 굽힌 지민이 물었다. 물이라도 마시련? 말을 건넸지만 고개를 도리질 치기만 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아이의 입에서 들려온 말은 지민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쩌어기, 냇골 앞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을 듯 용케도 잘 내려가는 아이를 따라 지민도 바쁘게 다리를 놀렸다. 이 곳은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 곳에 이방인이 쓰러져 있다니 놀라서 제게 달려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기에요! 작은 손 끝이 앞을 가리켰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하얀 눈송이 가운데에 놓여 있는 남자 하나.






백야행

白夜行

 

- 상편 -





지민은 냇골의 선생이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지식을 나눠주며 어떠한 사람으로 자라나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물론 어떤 사람으로 자라야만 한다고 강제로 주입하진 않았다. 배우는 과정에서 아이들 스스로가 판단하고 제가 무슨 사람이 되어야 할 지를 정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에는 대답을 해주었지만, 선택의 길로에서 설 때에만은 한 발치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를테면 지민은 방향을 정해주는 사람이었다. 훗날 냇골을 떠나 독립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만들어주는 사람. 꼭 가르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지민은 놀이나 식사 시간, 혹은 잠에 드는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했다. 선생으로, 친구로 항상 있어주는 지민을 아이들이 따르지 않을 리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고 또 사랑했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신기한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 말해주는 작은 아이들. 어제, 냇골 앞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빠른 시간 내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사내와 소년 사이의 얼굴. 많이 쳐 줘 봐야 스물 둘, 셋 정도 될 나이로 보였다. 흰 눈이 내려 새하얗게 변한 냇골에 이질적으로 덩그러니 쓰러져 있던 이방인은 간단한 봇짐조차 지고 있지 않았다. 지민은 누워 있는 이방인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앳된 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세상을 많이 겪어본 느낌이 풍겨져 나왔다. 긴 속눈썹과 옅은 혈색이 도는 입술을 지난 시선은 귀에 달린 장신구에서 멈췄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길이의 은색 줄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보는 지민의 눈이 약간 가늘어지다 싶더니 이내 돌아왔다. 이방인이 번쩍 눈을 뜨며 몸을 곧장 일으켰기 때문에. 급하게 흔들리는 귀걸이에서 차랑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말을 건네자마자 경계 태세로 돌변하는 앳된 남자를 보고서도 지민은 태연했다. 옷이 조금 젖어있길래 내가 갈아입혔어요. 다른 건 손대지 않았으니 걱정 마시고요. 앞에 쓰러져 있던 걸 아이가 알려줘서 빨리 발견할 수 있었어요. 아니면 고뿔에 걸리셨을 걸요. 이상하게 눈이 온 터라. 천천히 말을 해주자, 지민은 남자의 눈에 어려 있던 경계심이 반쯤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일단, 감사합니다. 여기가 어디죠?"

"냇골이에요. 작아서 지도에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



부드럽게 웃어주며 지민은 방금 전 처음 들은 목소리를 생각했다. 목소리가 청량하네. 꼭 시냇물 같아. 냇골... 입으로 작게 중얼거리던 남자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불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손을 응시하던 지민이 말을 꺼냈다. 간단하게 드실 거라도 내 올게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등을 돌려 방을 나오면서 지민은 의문의 남자가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제 등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은 자신의 모습이 사라지면 곧장 창을 통해 나가겠지. 그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는데도 여유로웠다. 지민의 여유로움을 부리는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 하고 꽤나 큰 소리가 들려왔다. 찻잎을 우려내던 지민은 손을 멈추고 턱을 넘어 마당으로 나갔다. 복작거리는 소리. 와, 높아! 목마 태워주세요! 이름이 뭐에요? 선생님이랑 친구에요? 다다다 몰아치는 질문 사이에서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뻘뻘대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러던 도중 지민이 오는 걸 발견한 아이가 고자질을 했다.



"선생님! 이 분이 창을 넘고 나왔어요! 선생님이 창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이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낭패가 어렸다. 아마도 도망가려 했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자기들처럼 숨바꼭질을 하기 위해 창을 멋대로 넘나드는 일과 똑같이 여겨 일러바친 거겠지. 지민은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다가가 남자의 다리 주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타일렀다.



"선생님이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잖니."

"치, 그치만 조르진 않았는걸요."

"잘 했어. 그럼 너희들끼리 놀고 있을래? 선생님은 잠시 이 분과 말을 할 게 있어서."

"알겠어요!"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고 금세 사라지는 아이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지민은 입을 열었다. 제가 기다리고 계시라 했는데.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려는 거였어요?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째선지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머무를 곳이 없으시면 여기서 머무르셔도 돼요. 그러자 눈이 저를 향한다. 냇골은 평화롭게 살기에는 딱 좋은 곳이거든요. 여름에도 덥지 않고 선선해서 살기 좋아요. 지민은 햇빛이 드러나 반쯤 녹은 들판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이상하게 4월인데도 눈이 와서 좀 쌀쌀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봄이 오면 각양각색의 들꽃들이 만발한답니다. 아이들이 노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왜요?"

"왜.. 제게 그러한 말을 하시죠?"

"지쳐 보였거든요. 얼굴이."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멍해졌다가,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다소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잠시만 머무를게요. 지민이 말을 받았다. 원하실 때까지 마음대로 있으세요. 제 방 한 켠을 내드릴 테니. 이번에는 남자가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충 마무리 된 듯 하니 도로 들어가서 차나 마실까요? 지금쯤이면 딱 적당하게 우려졌을 텐데.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움직였다. 조금 앞서서 걷던 지민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뱉더니 뒤돌아서 물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곧바로 나왔다.



"정국이에요. 전정국."






정국은 냇골에 지민을 제외하고서는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다. 대강 가늠해 봐도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가 열 다섯 부근쯤으로 보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제 눈에 안 보이는 것 뿐이지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지민의 입에서 본인을 제외하고는 다 미성년이라는 확답을 듣자 큰 눈이 더 커졌다. 아이들의 부모님은 없나요? 약초 잎을 뜯어보던 지민이 대답했다. 없거나, 혹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더 많아요. 하나 확실한 건 냇골에 지내면서 좋은 기억을 쌓고 있을 거라는 거죠.



"선생님이 아버지 노릇을 하는 건가요?"

"대충 그렇죠. 가르쳐주고, 보호해주니까요."

"아이들이 아플 때는 어떻게 하나요? 옆 마을에라도 가셔서 의원을 불러오시는지..."

"제가 의술에도 조예가 있는 터라. 애초에 크게 아픈 애들이 없기도 하지만요."

"이렇게까지 아이들밖에 없으면 혹여나 있을 도적떼의 습격에 걱정되진 않으시나요?"

"그건 전혀 걱정할 거리가 못 돼요."



정국의 얼굴에 큰 물음표가 뜨는 걸 보며 지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제가 힘없이 나자빠질 것처럼 보이나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말을 줄였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지민은 쪼그려 앉았던 다리를 피고 일어나 정국에게 푸스스 웃었다. 볼 기회가 있다면 아시게 될 거예요. 의문이 통 해소되지 않은 채로 응시하던 정국은 지민을 따라갔다. 근데 정국 씨는 어쩌다 여기로 온 거예요? 원래부터 여기에 오려던 목적은 아니셨던 것 같고. 얼마 전에 사방을 희게 물들일 정도로 내렸던 눈들이 그늘을 제외하고는 다 녹아 없어진 샛길을 지나며 지민이 물었다. 그러자 음... 하고 말이 늘어졌다. 지민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 말해도 돼요. 이번에도 말을 삼킬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대답이 들렸다.



"도망쳤어요."

"도망?"

"너무 힘들어서요. 숨이 막혀서... 도망쳤어요."



무거운 내용이었다. 정국의 목소리는 텀을 두다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안 그랬는데, 저는 그를 신뢰했고, 분명히 좋게 만들어줄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했어요. 나중에는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하고 견디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도망친 거예요.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지만 제가 눈치채지 못한 걸 수도 있겠죠. 정국이 낀 귀걸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잠자코 듣던 지민은 질문했다. 정국씨가 크게 잘못한 게 있나요? 정국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도 못하고 방금 전 들은 단편적인 내용들만이 전부였지만 지민은 그리 물었다.



"글쎄요, 잘못한 게 있다면 초반에 말리지 못한 거겠죠."

"도망친 거라면, 여기 있어요."



꽤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마주한 얼굴은 언제 단호하게 뱉었냐는 듯 따스했다. 원하지 않는데도 나중에 정국씨를 찾아와서 데려가려고 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도적떼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으니까요. 무기로 쓰일 법한 날붙이조차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지민에 정국이 피식 웃었다. 감사해요. 믿지는 않았지만 감사인사도 했다.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저 아래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도와주신다고 하니, 저도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같이 아이들의 안전을 지킬게요."


 

하나보다는 둘이 수월한 법이잖아요. 지민을 바라보다 아이들 쪽으로 도로 돌린 정국의 눈빛이 이상한 물체를 잡고 날카로워졌다. 빠르게 달려가는 세 명 뒤를 쫓아가는 늑대 한 마리. 크기는 작았지만 연약한 어린아이들을 충분히 상처입힐 수 있을 만한 힘은 가지고 있을 터였다. 정국은 깜짝 놀라 곧바로 그쪽으로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정국을 막은 건 지민의 손이었다. 선생님?



"괜찮아요."

"그게 무슨 소리..."

"저길 다시 봐봐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지민을 보던 정국의 시선이 앞을 향했고,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저들을 쫓아오는 늑대에 겁을 먹을 줄 알았던 아이들이 모두 웃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빨리 오라는 듯 손짓까지 했다. 도무지 파악이 안 되어 초조한 얼굴로 보고 있던 정국은 늑대가 아이로 바뀌어 앞서가던 세 명의 아이들과 합류하고 나서야 멍한 얼굴로 입을 작게 벌렸다.



"원이는 늑대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류에요."

"아..."

"저렇게 늑대로 변해서 달리는 걸 좋아하는데, 자주 볼 터이니 익숙해지도록 해요. 원이 말고도 반류인 애들이 더 있어요. 원이가 특이한 경우고 다른 애들은 자주 변하지 않지만요."



어떤 아이들이 있는지 차차 알려드릴게요. 설명한 지민은 정국을 살폈다. 동물의 모습이 본체인 반 인간, 즉 반류들의 존재가 있다는 게 알려졌긴 하지만, 그 수가 드물어서 실제로 보는 건 드물었다. 또한 반류의 삶은 최상위 혹은 최하위 이렇게 양분되어 있는 게 보통이었으니 정국은 놀라야 했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반류 아이들이... 있군요.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뛰노는."



가만히 읊조리는 정국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편히 풀어져 있었다. 행복해 보여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너무나도 짙은 진심이 배어나오는 말이었다.



* *



아이들의 안전을 지킨다는 말을 했던 정국은 벌써 스무 날일을 지내면서 지킨다기 보다는 놀아주는 일을 주로 했다. 지민과 정국이 지내는 집 옆에 붙어 있는 다른 집 아이들이 먹고 지내는 곳이었는데, 정국의 아침은 아이들이 웃음소리로 잠에서 깨는 것부터 시작했다. 일어나요, 일어나요! 아침이 밝았어요!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에 부스스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들이 여럿. 입고 잤던 옷 그대로 나가 놀아주는 경우도 있었다. 지민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정국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처음 봤을 때만 했어도 세상에 아주 지쳐 보이던 표정에 생기가 도는 듯 했으니. 하얀 피부와 청색빛이 도는 옷이 흙바닥에 넘어져 금세 갈색 얼룩이 묻는다. 하지만 흙투성이가 되어도 정국은 반짝거렸다. 이따끔씩 돌려야 하는 시선을 때를 놓쳐 정국과 시선을 마주할 때가 종종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질문이 들리면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그저 웃었다. 아무것도요. 너무 빛이 나서 보고 있었어요, 라며 사실대로 말할 정도로 가까워졌는가는 아직도 아리송했기 때문에.



"하영이가 선생님이랑 제가 비슷하대요."

"응? 무슨 소리야?"

"냄새가 난대요."

"냄새...?"



당황한 정국이 화닥닥 제 신체를 킁킁거렸다. 잘 씻는데 냄새가 난다니. 그러자 여자 아이가 바보야! 하고 남자 아이에게 앙칼지게 쏘았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푹신푹신한 냄새가 난다고 했지! 정국의 얼굴은 더더욱 묘해졌다. 일단 더러운 건 아니라서 안심했는데, 느낌도 아니고 냄새가 푹신푹신 하다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정국이 알아듣지 못하자 아이는 지민을 붙잡고 말했다. 그치 않아요? 쟤랑 선생님이랑 비슷한 냄새 나요. 음... 선생님 쪽이 훨씬 더 푹신푹신하긴 한데...



"하영아, 선생님은 못 맡아."

"아 맞다. 음... 그치만 정말 비슷해요!"



지민의 말에 아이는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치더니 정국에게 선생님이 더럽다는 뜻은 정말정말 아니었어요! 하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곤 남자 아이를 이끌고 사라졌다. 무슨 소리에요? 지민의 옆으로 슬며시 다가온 정국이 물었다. 아, 하영이는 특히 후각에 예민한 혼현을 가진 반류거든요. 지민이 설명했다. 수현이는 고양이라 푹신푹신한 냄새가 난다고 예전에 제게 말하긴 했어요. 정국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런 정국을 발견한 지민이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의미를 두고 말한 게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요즘 늦게까지 못 주무시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문을 열고 나와서 한참이나 마당을 서성거리시는데 모를 리가 없죠."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민은 정국이 닷새 전부터 쉬이 잠에 못 들고 마당을 서성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시간을 족히 돌아다니니 걱정이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불면증이라면 그에 좋은 차를 타드릴게요. 이것이 단순하 호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건지 지민은 말을 내뱉고서야 생각했다. 괜찮..., 까지 말하던 정국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향이 정말 좋아요. 긴장이 다 풀어지는 것 같고..."


 

찻잔을 받아든 정국은 평소에 비해 나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차에요. 몸의 긴장을 다 풀어지게 만들어서 잠에 더 편하게 들 수 있도록 도와줘요. 아마 한 잔만 마셔도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정국의 눈동자가 지민을 보며 잠시 휘어졌나 싶더니, 곧이어 차를 들이켰다. 지민은 앞에 고대로 앉아서 정국의 목울대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왠지, 죄를 짓는 기분에 시선을 돌렸다. 정국이 내려놓은 빈 잔을 들어올려 들고 온 목재 판 위에 놓은 지민은 이부자리를 정돈해 준 후 정국에게 누우라고 손짓했다. 누운 정국에게 이불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 난 지민은 촛불을 끄려다 절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멈칫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아뇨. 선생님이 정말 다정하구나, 싶어서요."



근래에서 들은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었다. 마치 자신이 차를 마신 것만 같은 기분에 지민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불 끌게요. 후 불어 촛불을 끄자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졌다. 그럼 푹 자요. 말을 건넨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닫이문을 닫을 때 정국이 그랬다. 선생님도 푹 주무세요. 웃으며 마저 문을 닫고 나온 지민은 제 방으로 향했다. 돌아오자마자 이부자리를 깔고 촛불을 끄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왜 이러지? 지민은 오늘따라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갈수록 정신은 또렷해졌다.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창 모서리에 있던 별이 오른쪽으로 이동했기에 두어 시간 정도는 지났음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지. 한숨까지 푹 쉰 지민은 자세가 문제인가 해서 똑바로 해서 누웠다. 역시나 마찬가지였지만. 게다가, 천장을 보고 있으니 자꾸만 어떠한 형상이 비춰 보였다. 가령, 낮에 아이들과 함께 넘어져서 웃고 있는 정국의 얼굴이라든지. 잠, 잘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지민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잡혔다. 희미하게 끙끙거리는 소리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고 있었다. 정국이 있는 쪽이었다. 생각에 미친 지민은 오지도 않는 잠을 제치고 방을 나와 정국이 머무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더 선명하게 들리는 앓는 소리. 아까 준 차가 안 맞았나, 걱정이 된 지민은 서둘러 정국의 옆으로 다가갔다. 맥박을 쟀지만 몸의 이상에 관한 징후는 잡히지 않았다. 다만,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음, 찌푸려진 눈살만이 정국이 지금 악몽을 꾸고 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정국씨,"

"으으... 싫어... 제발....."

"정국씨, 일어나요."



살살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잔뜩 괴로워하면서. 더 세게 깨워야겠다, 결정한 지민이 손을 고쳐잡던 참이었다. 싫어!! 외마디 외치며 정국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쪽 귓가를 손을 가리며 소리 질렀다. 하지 마, 하지 마!! 굳게 감겨 있던 정국의 두 눈이 뜨였다. 그러나 초점은 없는 상태였다. 매달린 차랑차랑한 귀걸이가 정국의 손에 멋대로 이리저리 부딪쳤다. 악을 쓰며 발작하는 몸뚱아리. 눈동자가 푸르른 안광을 발해 어둠속에서도 시퍼렇게 보였다. 그와 동조하여 무섭도록 푸른 색으로 빛나는 귀걸이. 결국 지민은 정국의 뺨을 양 손으로 조금은 아프게 잡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요!!"

 

 

그러자 초점이 돌아왔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절 마주한다. 악몽에서 드디어 깨어난 정국은 지민이 앞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울었다. 서럽게, 아주 서럽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구슬프게. 지민은 정국을 감싸 안고 도닥여주며 달랬다. 입으로는 괜찮다는 말을 한없이 반복하고 손으로는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면서도 눈은 서서히 사그라드는 푸른 빛의 귀걸이에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민은 저 귀걸이가 무엇인지 정국을 처음 봤을때부터 알았다.


반류들이 혼현을 드러낼 수 없도록 강제로 제어하는 힘을 가진 장치. 오로지 인간으로만 살 수 있게끔 하는, 고통스럽고 자비없는 물질.



오래 전, 이 곳을 떠난 제자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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