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ong

사랑에 대하여 외전 : For your Heart

"헤어지자, 지민아."



지민은 눈을 깜박이며 애인, 아니 이제는 남이 된 인호를 바라보았다. 며칠이고 연락이 되지 않다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끝은 이별 통보였다. 연락이 닿지 않을 때부터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던 터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도 나름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다 그래, 하고 대답하자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별로 놀라지도 않네. 약간은 허무하다는 목소리.



"내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안 궁금해?"


 

노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인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지민은 인호의 뒤로 몰래 지나가는 고양이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네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나에게 웃어주는 얼굴, 따스한 목소리나 행동들 말이야.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기시감이 느껴지더라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분명히 내 눈을 보고 있는데,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냐.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이 정말 예쁘다고 말한 거 기억 나? 맑은 호수 같다고 했었지."



지민은 고개를 들었다. 맑게 빛나는 유리알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사람. 아니, 비단 눈동자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눈이든, 손이든, 혹은 걸음걸이든. 비슷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저절로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때부터 계속 이랬다. '그 애'와 조금이라도 닮은 점을 가진 애인과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그러나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는 느낌. 그저 찜찜하고 가끔 가슴이 턱 막힌 기분만을 가지고 살고, 그러다 헤어지고. 한참동안 헤매던 미궁의 답을 찾아낸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가, 지민아."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전혀 저조하지 않았다. 다리를 움직이는 지민의 발걸음은 하나의 깃털마냥 가벼웠다. 미안한 게 있다면 이제는 전 애인이 되어버린 사람에게 사과를 건네지 못했다는 것. 미안하다고는 하지 마, 내가 찼으니까.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버린 거야. 장난스레 말하며 제 말문을 막는 모습에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적막한 길을 걸어가며 지민은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신호음과 함께 이어지는 한 뭉텅이의 기억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 줄 알아요? 누워 있다가 불쑥 물어오는데 대체 뭘 말하는 거지 싶었다. 넌센스야? 물어보니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개그는 아니에요. 라 답한다. 지민이 즉답했다. 다이어트, 실천하는 일이 무지 어려우니까. 도리도리. 그럼 건강? 또 아니랜다. 몇 번 더 던지다가 연이어 틀리자 지민은 미간을 좁히며 깊은 고뇌에 잠겼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답이 들려왔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면요,


 

- 사람의 마음이요.


 

남이 조종하기에도 힘들고, 자신이 조종하기도 힘드니까. 지민은 눈을 돌렸다. 봐봐요, 이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어서 노력한다- 물론 될 수야 있죠.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뜻대로 안 될 때가 있고, 마음은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내 마음인데도 내가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가령 누구를 좋아해버리는 일이나, 혹은... 싫어하게 되는 일이요. 정국은 턱을 괸 채 저를 보고 있었다. 후자의 내용이 열병을 앓고 난 자신을 향해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안 좋아해야지 안 좋아해야지, 하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바로 안 좋아하면 기계지 사람이에요? 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둬요, 제일 어려운 거니까.. 반대로 제일 쉽게 놔두면 금방 풀릴 거예요.


마음. 혹은 감정. 내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것이다, 그리 인정하고 나니 홀가분해졌다.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민은 깜짝 놀라며 뒤돌아 본 정국을 향해 웃어보였다.





* * *





지민에게 정국을 두 단어 안으로 정의내리라고 하면 '내 동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는 그 단어 안에는 수많은 뜻들이 숨어 있었다. 쏟아부은 애정, 시간, 사랑, 손길 등등. 이들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마땅한 단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내 동생, 이라는 건 지민에게 만큼은 기존의 단어와는 다른 뜻을 가진 새 단어이기도 했다. 외동으로 태어난 지민은 생글생글 웃으며 짧뚱한 팔다리로 움직이며 집 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었지만 어머니는 미안한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특히 제 몸보다 훨씬 큰 인형을 껴안고 잠든 모습을 보면 더더욱. 원래대로라면 두 명을 낳으려고 했었다. 아이 하나만을 낳으면 많이 외로움을 탄다더라, 두 명을 낳으면 외로워하지도 않고 서로 잘 논다더라. 그리고 후에 자신들이 늙어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 아이들끼리 지탱하더라- 핏줄이라는 게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다고. 그러나 지민을 낳은 후 다시 시작한 생리에서 전에는 없었던 생리통이 점차 심해져 병원을 찾자 나팔관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 후에 눈앞에 들이밀어진 건 불임 판정.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남편이 많은 도움을 주어 이겨냈지만 홀로 자라야만 하는 지민을 보면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왜 나는 동생 없어?', '나도 동생 갖고 싶어'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정국이 태어났을 때 그녀 또한 마음이 편해졌더랬다.


못생겼어.

그치만 귀여워.


포대기 안에서 꼬물거리는 정국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은 그거였다. 머리털도 제대로 나 있지 않고, 불그스름 하기만 하고, 정말 못생겼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꼭 말고 있는 작은 두 손과 웅얼거리는 조그만 입은 너무나도 귀엽고 신기했다. 지민은 잠시도 정국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도 안 뜨고 잠만 자던 아기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지민은 그만 제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엄마야 눈이 너무 또랑또랑 해...! 충격적일 정도의 귀여움에 지민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 건 덤이었다. 기어다니기 시작하고, 첫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고, 첫 옹알이를 한 순간들에 같이 있었다. 마마, 우빠에 이어 정국이 세 번째로 말한 단어는 '혀아'였다.


지민은 마치 제 친동생인 양 정국을 한없이 감싸고 돌았다. 사실 절반은 지민이 키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모든 시간들을 함께 했고, 또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도 함께할 내 동생. 많이 좋아하고, 정말로 사랑한다. 그 애 앞에 닥칠 위협들이 있다면 모두 막아주고 싶었고, 대신 힘들지라도 자신이 겪을 테니 정국이 만큼은 순탄한 길만 걸었으면 했다. 곤란한 일들은 다 해결해주는 만능 해결사가 되고 싶다고.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고 나서는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정국은 꼭 지민을 찾곤 했다. 한참 새벽에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다. 아...대체 누구냐고. 부우웅 울리는 진동소리를 찾아 팔을 더듬은 지민은 눈을 뜨지도 않고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울먹이는 소리가 넘어왔다. 형, 혀엉...



- 나 밑이 축축한데...이거 어떻게 해.....


 

우는 목소리에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만 곧 이어진 말에 아님을 깨달았다. 오줌은 아닌데에... 세상이라도 무너진 듯 훌쩍이는 모습이 상상되어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일단 욕실에 팬티 들고 가서 비누로 깨끗이 빨아. 울지 말고,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냥 정국이가 다 컸다는 뜻이야. 형도 그랬다? 아냐, 안 놀린다니까 그러네. 지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어두운 새벽 공기 속에서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절 보고 있었다. 울긴 왜 울어. 이 울보야. 그러자 버럭 아니거든?! 하고 소리쳤다가 부모님을 깨울 거라 생각했는지 손으로 입을 헙 막는 모습까지 다 보였다. 지민은 창틀에 손을 대고 웃다가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만 민망하긴 할 테니까. 대충 닦아두고 세탁실에 던져 놔. 지민은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분명히 빡빡 씻어서 몰래 건조대에까지 널어놨고 완벽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다음 날 찰진 궁둥이 두드림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우리 지민이 어른 다 됐네~ 조금은 놀리는 어조까지. 지금에서야 이와 같이 또 생긴다면 어떻게 잘 빨아야 정말로 들키지 않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은근히 뿌듯한 마음이랄까. 정국의 부모님에게도 슬쩍 귀띔해주고 싶은 부분이었으니. 아까보다는 진정된 모습에 지민은 짖궂게 물었다.


 

'그래서 꿈에 누가 나왔는데?'

- ......그냥...어제 본...배우.



우물쭈물 하면서도 대답하는 말에 큭큭댔다. ....뽀뽀만 했다구. 덧붙여진 말에는 눈물마저 찔끔 났다. 너 큰일 났다, 나중에 어떻게 할래. 계속 놀려대자 씩씩거리다가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보이곤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는 정국에도 지민은 웃을 뿐이었다. 뽀뽀만 했대, 정국이 정말 귀여워서 어떡하지.


가슴 큰 일본 av여배우였던 정국과는 달리, 지민의 첫 몽정 상대는 남자였다. 친숙한 상대도 아니었으며, 그저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 나오는 광고에 짧게 등장한 게 다였다. 소감은 흠 좀 잘 생겼네 정도. 그러나 그날 밤 꿈 속에서 자신은 그 남자와 혀를 섞고 있었다. 내용이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김이 서린 듯 뿌옇고 뜨거웠다는 것만 기억난다. 이상한 느낌에 일어났더니 팬티가 젖어 있었고. 지민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은 남자에게만 마음이 동한다는 것쯤은. 나는 왜 남자를 좋아하지? 하며 혼자 괴로워하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저에게 말해주었던 선생님. 꼭 남자랑 여자랑만 사랑해야 하는 거예요? 질문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건 아니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거나, 여자가 여자를 좋아해도 되죠. 서로가 좋고, 행복하면 성별은 상관없는 거예요.'



해 주었던 사람. 그 때문에 후에 저의 성향을 알았을 때도 자책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과는 달리 딱히 떠벌리고 다닐 만한 부분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정국이에게도, 이런 자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고.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건드렸다가 X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에 저 혼자 게이일 리가 없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저와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지. 다들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만 아는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다. 지민도 그렇게 살아왔고 문제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흔히 보이는 소꿉친구랑 키스하게 된 썰- 같은 일들 말이다. 전정국은 절대, 절대로 해당될 리 없다고.


지민은 눈이 높았다. 높다 못해 머리 꼭대기에 달려 있는 참이었다. 본인은 평범하면서 눈만 높으면 꽤나 힘들었겠지만, 다행이도 지민은 잘 먹혔다. 마성의 게이. 재수없는 소리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마음먹은 상대는 쉽게 낚을 수 있었다. 지금껏 사귄 상대들도 하나같이 준수한 외모였다. ...정국은 확실히, 특출난 외모이긴 했다. 하지만 그 애는 예외였다. 걔가 뭘 잘 생겼어? 의 말이 아니었다. 저도 눈이 있다. 전정국은 완전 잘생겼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남자가 모두 사라지고 그 애 혼자만 남게 되더라도 걜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였다. 그냥 그 애 자체가 자신이라서. 핏덩이 때부터 제 손으로 먹여주고, 재워주고, 길러줬던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지금은 뭇 여자애들의 시선이 붙어다니는 남자라지만 자신에게는 땡강부리던 어린애로만 보여서. 그래서 입을 몇 번 털었다.



- 야, 나도 눈이 있다고. 네가 어떻게 남자로 보이겠냐.

..혀 좀 제멋대로 놀리지 말고.


- 정국아 내가 다 좋아해도 넌 안 좋아할거니까 걱정 마.

...할 수만 있다면 저 말을 하는 과거의 나에게 달려가 목당수를 치고 싶다.


- 나보다 커져도 애기로 보이는 걸. 내가 너 업어주고 재워준 적이 몇인데. 그런 애기를 좋아하는 건 범죄지, 범죄.

......아마도 조만간 손목에 쇠고랑이 철커덩 채워질 듯싶었다.



진심으로, 지민은 정국이가 연애의 대상이 될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꿈에서도 해본 적 없었다. 게이라는 사실을 들키고 나서 정국이 조심스럽게 물어왔을 때 얼마나 어이없었던지 모른다. 너무 내 생각을 안 한 거 아니냐고. 선택지가 너 또는 평생 솔로밖에 없다면 평생 솔로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애의 하나하나를 진득하게 흝고 있었다. 만들어낸 흑역사를 떠올리며 이불킥을 하고 있자면 답 없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전화를 걸고 있는 정국의 모습이 예상됐다. 거기 112죠? 네, 여기 변태가 하나 있어서 신고하려고요. 지민은 철창에 갇혀서 변태로 낙인찍힌 저를 상상하고서는 몸을 푸드득 떨었다. 그러다가도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아예 기회조차 없는 건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가망성이 있다고 착각해서 괜한 희망고문을 당하는 게 더 괴롭다. 내가 더 잘해주면 어쩌면 나를 좋아할 수도 있잖아? 보다, 내가 아무리 잘 해주고 아무리 마음을 티 내더라도 저 애는 날 좋아할 가능성이 1%도 없을 테지, 가 잔인하지만 낫다. 애초에 남자를 연애대상으로 보지 않는 정국이기에 역으로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물론 가끔 희망따윈 보이지 않는 말을 직격으로 들으면 아프긴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민은 자신이 이제 누구도 사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구 주위를 맴도는 인공위성처럼 정국의 주변을 마냥 맴돌기만 하겠지. 몇 번, 몇 십번이고 맴돌다가 정국이 누군가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볼 거였다. 괜찮아, 좋아, 그래도 돼. 지민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나와 사는 세상이 다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천사처럼 새하얗던 마음이 배신감으로 물든 건 그 뒤였다.



* *



나쁜 놈.

어떻게 나한테 그래.


안 봐도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뻔했다. 저와 부딪친 사람이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하며 곁을 빠르게 지나갔다.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가 또렷해졌다. 눈꺼풀을 한 번만 깜박이면 눈물이 주르르 흐를 것 같아서 재빨리 돌아선 건데 그 사이에 메말라 버렸다. 지민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가 달리기 시작했다. 뒤돌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나쁜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억울해, 슬퍼, 화나, 또 나한테 짜증이 나. 머릿속은 목격했던 장면만이 가득 차 있었다. 정국을 향해 숙여진 남준의 고개. 언제부터 둘이 그런 사이가 되었냐고, 입까지 맞추고... 어쩐지 요즘 들어 김남준을 자주 언급한다 했다. 남준이 형 옷 진짜 잘 입지 않아요? 기럭지가 길어서 그런가 봐. 웃을 때 쏙 들어가는 보조개도 신기하고, 매력 포인트. 둥둥 떠다니는 정국의 목소리. 정국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준을 칭찬하는 말을 할 때마다 질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래서 질투가 났던 걸지도 모른다. 둘이 잘 될 것 같은 직감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질투를 했던 거다. 공중을 향해 크게 악을 썼다. 총 세 명에게 화가 치밀었다.



첫 번째는 김남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잖아, 정국이한테 더 뭐 할 마음도 없다며, 이미 다 사라졌다며. 약속했으면서 어떻게 그래, 이 위선자야.


두 번째는 전정국.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이제는 상관없다니 무슨 상황이니. 하늘이 두 쪽 나도 일어날 일 없다고 선을 그었으면서 왜 이제와서 맘대로 없던 일로 만드는데.


마지막으로는 박지민, 자기 자신.



기숙사 앞에 다다라서도 지민은 도어락에 손을 대지 못 했다. ...등신 새끼. 정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정국이 받아들일 리 없다고 여겼다. 나도 미친 척 질러볼 걸. 좋아한다고 말해보기라도 할 걸. 혼자 판단하고 아무런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자기 자신이 제일 미웠다. 지민은 도어락을 풀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룸메이트, 태형이 고개를 돌렸다.



"웬일로 오늘은 일찍..."



말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진다. 지민은 쌀쌀맞게 지나쳐 제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야아. 눈치를 보며 건네는 작은 소리에도 답하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러냐.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지민은 보지도 않고 무음으로 변경하고선 옆으로 던졌다. 뻔할 거다. 전정국에게서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듣기 싫었다. 변명이든, 사과든, 뭐든 간에.



"안 받아?"

"안 받아."



툭툭 내던진 지민은 그대로 옷도 벗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밤새 몇 통의 전화가 올까. 액정은 끊임없이 빛났다. 연애나 사랑에 관해서는 항상 깔끔하게 가자는 주의였고 주로 주도하는 쪽이었지만, 정국을 좋아한 날부터 지민은 모든 일에 치졸해졌다. 네 번까지 세고선 의미없는 짓을 그만뒀다. 이 와중에도 수신거절 하지 못하고 무음으로만 해두는 자신이 웃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이 꺼졌다. 보통 새벽 2시에 자고 일찍 자봤자 12시에 눕지만 오늘은 10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끈 걸 보니 아마 절 보고 눈치껏 불을 꺼 준 것일 테다. 태형의 배려에 고마워했지만 그 덕에 악몽을 꿨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새벽에 깬 지민은 두 손으로 눈 위를 짓눌렀다. 아... 죽고 싶다.

 

주말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아무데도 나가지 않았다. 금요일처럼 속이 다 뒤집어진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분은 여전히 잔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과제라도 해볼까 하는 심산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손이 움직인 자리에는 말이 되지도 않는 문장만이 죽 이어져 있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비딱하게 턱을 괴고 있던 지민은 코앞에 들이밀어진 햄버거에 고개를 들었다. 먹어라. 너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거절하려던 지민은 마음을 고쳐먹고 노트북을 닫고선 햄버거를 받아들었다.



"핸드폰에 원수라도 졌냐."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씹고 있는데 태형이 물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 그대로 핸드폰은 저 구석에 버려진 채였다. 거의 이틀째 방치된 핸드폰은 이미 전원마저 나가 있어 화면이 시커맸다. 앞으로 계속 볼 거면 빨리 화해하는 게 나아. 누가 더 잘못했는지 따지고 존심 지키기보다는 먼저 사과를 건네면 상대는 풀어지기 마련이거든. 지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운 거 아냐."

"그럼?"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새 햄버거를 다 먹어치운 태형이 포장지를 둘둘 말아 쓰레기통으로 골인시키며 조언을 건넸다. 많이 생각하는 것도 안 좋다? 그거, 좀먹거든. 여기를. 긴 손가락으로 가슴께를 톡톡 두드리며 씩 웃는다. 괜히 생각없는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게 아냐. 다 스트레스를 사서 하는 짓이라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지름길.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게 된 월요일 아침, 지민은 핸드폰을 켰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수십 개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들이 상단에 우수수 떴다. 보낸 주인들은 대개 정국이었지만 아닌 것들도 몇몇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밀린 기록들을 빠르게 흝어내려가는 사이 망막에 잔상이 남겨졌다. 대체 왜 그러느냐, 왜 화났는지 알려달라로 시작한 정국의 문자는 남준이 오늘 떠난다는 말과 함께 연락 그만 씹으라는 답답한 어조로 끝나 있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지민은 말없이 액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발신인은 김남준. 두 번 부르르 떨리는 꼴을 보던 지민은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네 번째에 받아들었다.



- 드디어 받았네.

"..........."

- 할 말 있었는데, 다행이다.

"뭔데요?"



마냥 곱지만은 않게 말이 튀어나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쯤은 괜찮다고 단정지었다. 나는 잘못한 거 없으니까, 다 이 형이 잘못한 거니까. 그러나 다음으로 들린 말은 지민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너 전정국 좋아하지?

 

 

 

* * *

 

외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정도 되는 부분을 공개합니다

지민이 시점으로 본편에서 가려졌던 이야기들이 먼저 드러난 후, 사귀고 나서의 외전이 따로 진행될 것 같아요. 열심히 하겠습니당! ᕕ( ᐛ )ᕗ

'Long'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