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구름이 많이 낀 흐린 상태였다. 박지민의 말대로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온 나는 302호를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닥에 배를 붙이고 엎드려 노트북을 하던 김태형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과연 박지민은 무슨 핑계를 대며 김태형을 보냈을까. 전정국과 섹스를 해야 해서 넌 이만 가봐야겠다고 하지는 못했겠지.
"정말 김태형 보냈네?"
박지민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제출일 별로 남지 않았다며. 박지민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국아, 네가 보내라고 했잖아. 그리곤 내 앞에 다가와 목을 살살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안 보냈으면 지랄했을 거면서."
맞는 말이었다. 만일 박지민이 내가 아니라 제출일이 얼마 남지 않은 과제를 선택했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박지민에게 키스를 한 다음 그의 혀를 씹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자. 박지민은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말을 내뱉었고, 말이 끝나자 두 입술이 격하게 부딪혔다.
우당탕, 하고 책상에 놓여있던 음료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우리들은 떨어진 음료수를 치울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처음 몸을 섞을 때를 제외하고서 박지민은 성급하게 군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세게 짓누르고 강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하루 일정을 틀어지게 만든 내가 조금은 미운 모양이었다.
"아..."
가슴을 깨무는 몸짓에 신음이 터져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밤보다도 더 새카맣고, 우리들의 속처럼 검은 박지민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에서 느끼고 있는 걸 그대로 드러내며 뒷머리를 붙잡는 내 손에 얼핏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위험하고 아름다울까. 나는 새삼 박지민이라는 존재에 대해 감탄했다.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잔잔하게 떨리며 박지민을 향해 역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차가운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하는 손은 뜨거웠다.
만일 흑요석을 가공하여 얇게 실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내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보석으로 눈을 만들 수 있다면, 이런 눈동자를 하고 있을까. 속이 너무나도 깊어 내 모습조차 거의 비치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물질도 박지민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나타낼 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추악한 동시에 아름다우니까.
그 때, 문이 덜컥 열렸다.
"핸드폰을 놔두고 와서 찾으러 왔..."
조금은 귀찮은 목소리가 누가 잘라낸 듯이 끊겼다. 나는 눈을 올려 불청객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김태형이었다.
김태형은 방 안의 풍경을 보자 얼어붙어 있었다. 날 내려다보고 있던 박지민의 시선이 김태형에게로 향했다. ...씨발. 나즈막히 읊조리는 박지민의 욕설을,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증거들이었다. 박지민의 밑에 놓인 나, 벗겨진 셔츠, 나에게 키스하고 있던 박지민, 입술에 번들거리는 타액.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멍하니 서 있던 김태형의 입이 마침내 열려졌다.
"미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예상한대로다.
"너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건데!"
김태형이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박지민의 손을 잡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인에게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매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태연스럽게 행동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김태형은 더욱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우리를 바라보는 김태형의 두 눈동자는 경멸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핸드폰을 두고 왔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어딘가에 있을 김태형의 핸드폰을 찾았다. 책상 모서리에 놓여져 있는 김태형의 핸드폰을 그제서야 찾아볼 수 있었다.
"미쳤어, 미쳤다고."
그러나 정작 김태형은 두고 간 핸드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건지, 그렇게 내뱉었다. 나는 놓고 간 김태형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반사적으로 화면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2분. 뒤를 돌아보자 일렁이기 시작하는 김태형의 주변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러운 새끼들아,"
그 말에 박지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김태형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지껄이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나는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솔직히 따지고보면 김태형은 피해자였다. 생 포르노를 원하지 않고 목격해버린. 나는 김태형에게 다가가려는 박지민을 저지했다. 그리고 김태형을 불렀다.
"김태형."
"씨발 둘이 남자인 건 둘째 치더라도,"
"김태형,"
"너희 가족이잖아."
"태형아."
"가족이라며. 피 안 섞였어도, 가족이잖아, 형제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들고 있던 김태형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는 김태형이 어떤 놈인지 알고 있었다. 김태형은 막 20살이 된 미성숙한 남자애였다. 그의 주변에는 치근대는 여자애들이 많지만, 정작 김태형은 여자를 겪은 적이 없었다. 겉으로는 능숙한 척 하지만 사랑이 서툴어서 기회를 일부러 피하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난, 난...!"
김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로 저런 반응을 보면 안다.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저런 애송이 하나쯤 뜻대로 휘두르는 방법은 쉽다. 결론을 내린 나는 김태형을 벽에 밀어붙이곤 무릎을 끓었다. 뭐하는 거야 미친년아. 김태형은 나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보다 내가 더 빨랐다.
"너만 입 다물면 돼."
김태형의 바지에 손을 대 버클을 풀고 드로즈까지 빠르게 벗겨냈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차린 김태형이 경멸어린 눈빛으로 날 거세게 밀어내려 했지만 그러기 전에 입을 크게 벌려 김태형의 것을 담았다. 이미 박지민과 수십 번의 경험으로 숙달된 나였다. 맨 처음 펠라를 하던 날이 떠올랐다.
박지민은 의자에 앉은 채 내 뒷머리를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나는 서툴게 혀를 내밀어 그의 귀두를 핥았고, 곧 천천히 성기를 집어삼켰다. 나름 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혀를 놀렸으나 눈을 감으며 내 펠라를 받고 있던 박지민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정국아. 내가 한참을 서툴게 고개를 움직였을 때였다. 박지민이 온화하게 웃으며 그랬다.
- 너 펠라 진짜 못 하는구나.
그는 고개를 살그머니 기울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박지민의 눈에는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깃들어 있어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박지민은 내 입에서 제 것을 빼내더니 손 끝으로 내 턱을 간질였다. 그의 성기는 내가 몹시 서툴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전혀 서 있지 않은 상태였다. 바지 속으로 대충 집어넣은 박지민은 나를 일으켜 제가 앉고 있었던 의자에 앉히고, 반대로 그는 내려가 무릎을 끓었다.
- 펠라는 이렇게 하는 거야.
내 성기를 꺼낸 박지민은 손으로 모양을 잡아주고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 안으로 삼켰다. 그리고 볼이 움푹하게 파일 정도로 세게, 세게 빨았다. 하으, 나는 팔걸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바들바들, 팔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헛구역질도 하지 않고 목구멍까지 완전히 집어넣었다 반쯤 뺀 박지민은 이로 귀두 끝을 살짝 긁었다.
- 아아, 지민아아...
말이 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발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박지민의 축축한 입 안에 들어간 건 신체의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그 작은 영역에 나는 멋대로 헐떡대고 있었다. 그는 나를 어떻게 요리할지 간을 보고 있는 요리사였으며, 나는 물에서 끌어올려져 그의 손에서 요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물고기였다. 저 칼이 나를 내려칠 때 제일의 황홀경을 맛볼 테다.
"정국이 펠라 잘하지."
어느덧 김태형은 날 밀어내려던 손 대신 내 뒷머리를 움켜잡은 채 낮게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려 의자에 앉아서 김태형의 성기를 애무해주고 있는 날 쳐다보는 박지민을 바라보았다. 박지민은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 우리들을 관음하고 있었다.
"맨 처음엔 정말 형편없을 정도로 못했는데, 많이 늘었어."
헉헉대고 있던 김태형도 박지민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지민이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가르쳐준 게 누군데, 잘 해야지. 조근조근하게 감상평을 내뱉고 있던 박지민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박지민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태형의 것은 이제 다 서서 물기도 힘들 정도로 커져 있었다. 박지민이 명령했다.
"보내."
그의 명령에 따라 나는 힘있게 빨아들이며 김태형의 사정을 유도했다. 윽, 김태형이 눈을 질끈 감으며 정액을 토해냈다. 나는 목울대를 움직여 비릿한 정액을 식도로 흘려보냈다. 풀이 죽은 그의 것을 뱉어내자 김태형이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날 바라보고 있는 김태형의 눈을 마주하고서 내가 지을 수 있는 웃음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웃어보였다.
"너...."
"정국아."
"......."
"이리 와."
멈칫거리던 김태형을 두고 박지민에게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있던 박지민은 내가 다가가자 지금껏 달고 있던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아무리 김태형의 입을 막을 수단이라고 했어도 화가 난 건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박지민은 턱을 괴고 있지 않던 다른 손으로 나를 툭툭 치며 말했다.
"벗어."
그의 말에 위태롭게 걸치고 있던 셔츠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바지도 벗었다. 완전한 나신이 되었을 때 박지민이 다시 입을 떼었다. 뒤 돌아서 엎드려. 착실하게 그의 말을 따랐다. 책상 위에 있던 로션 뚜껑을 여는지 딸깍 하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바로 손가락 두 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션으로 윤활제를 삼은 박지민은 검지와 중지를 익숙하게 놀리며 수축된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다. 아으, 유독 예민한 부분을 찌르는 손에 나도 모르게 몸이 무너지려 하자 박지민이 재빨리 다른 팔로 내 허리를 붙들었다. 한동안 입술을 깨물며 박지민의 손가락을 받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정도 풀어줬다 싶은 그가 손을 뺐다. 나는 당연히 박지민이 바로 들이밀 줄 알았으나 나온 말은 나의 예상을 빗나가는 말이었다.
"김태형이, 섰다."
눈을 들어 바라보았더니 정말 김태형이 제 걸 세우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는 왜 다시 세우고 지랄이람. 확인한 날 본 박지민은 완전히 또라이같은 말을 내뱉었다. 가서 한 번 대줄까, 우리 정국이. 병신같은 제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주는 난 한번쯤은 상관없었지만 소유욕이 강한 박지민이 무슨 생각으로 저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의도를 파악하려 박지민을 노려보는 와중에도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한 번 맞추곤 반복했다.
"태형이한테 갔다 와."
정말 병신같았지만 나는 착실히 몸을 일으켜 김태형의 앞으로 걸어갔다. 김태형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그 눈빛이 유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완전히 벗은 내 몸을 보고서는 침을 꿀꺽 삼키기까지 했다.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좆같다는 눈빛 사이에서도 나와 몸을 섞고 싶단 눈빛을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태형의 다리 옆으로 발을 뻗어 몸을 지탱한 다음, 손 하나를 밑으로 내려 단단히 선 김태형의 것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흐윽,"
아까 해줄때도 느꼈던 거지만 김태형의 것은 컸다. 그저 내려앉기만 했을 뿐인데도 안이 가득 들어찬 느낌을 받았다. 후으. 천천히 내뱉으며 숨을 고른 나는 천천히 위아래로 왕복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박지민이 충분히 풀어주었을 텐데도 크기가 남달라 뒤가 얼얼했다. 둔탁한 통증을 느끼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날 보던 김태형은 본능적으로 내 허리를 붙잡고 제가 흔드려 했지만 내가 쳐냈다. 어딜 감히. 방 안은 철퍽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고 박지민은 또다시 그런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한동안 그렇게 흔들고 있던 나는 김태형이 갈 기색을 보이자 뒤에 힘을 주었다. 아마추어 같이 김태형은 그런 내 몸짓에 휘둘렸다. 참지도 못하고 싸지른 그는 두 번의 사정으로 인해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일어나는 나를 보고 김태형이 손목을 턱, 하고 잡아왔지만 박지민의 목소리가 공중을 갈랐다.
"정국아."
김태형의 손을 잡아떼고 박지민을 향해 걸어갔다. 다가온 나를 붙잡은 박지민은 내 고개를 붙잡고 깊숙히 키스했다. 뒷목을 어루만지는 손, 척추 하나하나를 짚고 내려가며 내 몸을 연주하는 손. 귓가를 살짝 물고 떼어진 박지민은 자연스럽게 나를 바닥으로 눕혔다. 아까 김태형이 내게 손을 댈라치면 뿌리쳤던 나는 나를 붙잡는 박지민의 손에 더 해달라고 달라붙기 바빴다. 박지민의 목 뒤에 팔을 두르며 그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조금 후회된다."
박지민이 속삭였다. 차라리 그냥 소문 내라고 할 걸. 박지민은 몹시 유감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손은 거침없었다. 내 다리를 활짝 벌려 구멍에서 찔끔찔끔 새어나오는 정액을 긁어내고서는 제 걸 바로 들이밀었다. 김태형이 방해할 때부터 참아왔던 박지민은 이제 제어 장치를 버리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능숙하게 인터코스를 끝낸 박지민은 처음부터 내가 느끼는 지점만을 찔러댔다.
"하ㅇ,ㅈ,지민아,아...!"
그의 허릿짓에 흔들리면서 나는 정신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민아, 박지미인, 아, 좀 더, 좀 더 세게 같은 말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방은 곧 음란한 신음소리로 가득 차고 더워지기 시작했다. 다리를 벌리고 내 몸을 들쑤시던 박지민은 발목을 붙잡고 내 몸을 휙 하고 돌렸다. 박지민의 얼굴을 보던 나는 그가 의도한 바에 따라 개처럼 엎드려 우리를 멍하니 보고 있는 김태형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까는 몰라도 지금 내 눈에는 김태형 따윈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좋았다. 박지민과의 관계가. 퍽퍽 힘있게 치다가 나가려고 하는 박지민에 다급해져 뒤에 힘을 주었지만 박지민은 당황하기는 커녕 힘을 빼라고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오늘 좀 힘들겠다."
박지민이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응응 신음을 흘리며 흔들리기 바빴다. 박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형아,
"너도 합류하려면 해."
나에게 박지민이 하는 모든 말은 천상의 목소리였으리라.
김태형은 공범자가 되었다. 그는 박지민과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미친놈이었고, 박지민 또한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미친 사람들 사이에 말려들은 김태형은 정상적인 사람에서, 점점 비정상적인 루트를 타게 될 것이었다.
* *
지루한 수업을 듣고 있는 때였다. 이번 주는 발표 주였으므로 딴 생각을 하기에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아까운 2시간을 버리느니 잠을 자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버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모두의 앞에 나가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발표를 하고 있는 박지민. 피피티 한 장이 넘어가고 S사의 재무제표를 나타내는 장이 나왔다. 전날 종이를 들고 날 보면서 예행 연습을 하던 박지민을 못해도 열 번은 넘게 보았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 또 달랐다.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나가서 그런가 박지민은 지적인 동시에 금욕적인 느낌을 받게 했다. 나는 그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정한다. 박지민이 말하는 내용들에 집중한 건 아니고, 그의 목소리와 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지금 발표자분께서 S사의 해외 진출에 관한 문제점을 말해주셨는데, 그 중..."
생각치 못하게 날아든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을 확인했다. 아, 저 사람 질문봇으로 유명했다. 나는 매우 못마땅했다. 그냥 쳐 듣고 딴 애들처럼 잘 것이지, 왜 집중하며 묻느냔 말이다. 혹시 내 차례에도 질문을 날리면 어떡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김태형이었다. 벽 측에 앉아있던 김태형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런 김태형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곤 살짝 깨물었다. 김태형의 미간이 구겨졌다. 재밌네. 나는 혀를 내밀어 검지손가락을 정성스럽게 빨았다. 그러자 김태형이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친년..."
나즈막한 목소리가 귀로 흘러들어왔다. 김태형은 완전히 외면한 채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서 흥미를 끄고 박지민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막 발표를 마치고 걸어오는 박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박지민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정말 잘 했다고 칭찬해주는 그의 조원들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박지민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잉,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 걔 신경쓰지 말랬지 ]
박지민이었다.
박지민은 인기가 많았다. 학기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여자들이 치근댔다. 그는 그년들을 쳐내지 않고, 그저 웃으며 받아주고 있었다. 처음대로였다면, 나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런 여자들 중 하나의 뺨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박지민의 얄팍한 술수 따윈 알고 있었다. 질투는 무슨...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내 옆에 앉아있던 선배에게 몸을 기울였다.
"선배, 목 안 말라요?"
"으, 응?"
"음료수 사줄게, 잠시 나갔다 와요. 나 휴게실에 계속 있었더니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
일부러 젠틀하게 대했다. 이 여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옛적에 알고 있었다. 내 제안에 그럴까? 하고 밝아진 목소리로 하고 있던 내용을 저장하곤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 무슨 음료수 좋아해요? 박지민의 옆을 지나가며 나는 자연스럽게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부드럽게 웃고 있던 표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너무 웃겼다.
넌 날 못 이겨.
아마 박지민은 잠시 후 무슨 일이 있다고 핑계대곤 나와 나를 붙잡을 것이다. 그럼 나는 모르는 척 어 너도 사줄까? 하며 같은 카페로 데려갈 것이고. 착각하고 있던 여자 선배에게는 난 너에게 관심 따위 없다는 걸 둘러 보여줄 것이다.
아슬아슬한 사이가 이어진다. 아니, 이미 경계선을 넘은 건 한참 전이고 그저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했다. 박지민이 없는 자취방에 들어앉아 있을 때마다, 종종 어떤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엄마와 아저씨가 남남이라면 우리는 굳이 이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될 텐데. 둘이 이혼하면... 진동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을 멈췄다. 액정에 비치는 엄마라는 글자를 보자 죄책감에 물들어졌다.
"여보세요?"
- 정국아, 엄마가 반찬 보냈는데. 받았니?
"응? 아니, 못 받았는데?"
문이 열리며 박지민이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어, 아냐 잠깐만. 지금 받은 거 같아. 나는 통화한 상태 그대로 박지민이 들고 들어온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드르륵 거리는 커터칼로 테이프를 찢고 뚜껑을 열자 김치와 멸치 반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맛있겠다. 엄마가 한 거야?"
- 응. 지민이랑 같이 먹어. 부족하면 좀 더 보낼게.
"아냐, 이거면 충분해."
"맛있게 잘 먹을게요."
내가 통화하고 있는 게 엄마라는 걸 눈치챈 박지민도 옆에다 대고 말했다. 엄마가 만든 김치를 유독 좋아하는 박지민은 안 그래도 다 떨어져가던 김치에 아쉬워하고 있을 적에 도착해서 무척이나 신난 모양이었다. 어린애마냥 방긋방긋 웃으며 냉장고에 옮겨 담는 박지민을 보던 나는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 둘이 사는 거 안 불편하니? 엄마가 한 번 가봐야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큰일날 말이었다. 만일 엄마가 말도 없이 들이닥쳤다가 혹시 들키기라도 했으면... 끔찍하다. 나는 절로 주먹을 쥐었다. 어느 새 반찬을 다 넣어둔 박지민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내 어깨에 고개를 대고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박지민의 손은 내 허벅지를 지분대고 있었다.
... 죄책감 따윈 개나 주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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