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번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대. 데자뷰라는 거 있잖아? 분명히 처음 겪는 장면인데 과거에 했던 듯한 느낌을 받는 일. 데자뷰가 바로 그 능력 때문이야. 무의식중이든 의식적이든 예전에 능력을 써서 시간을 돌렸다면 그런 느낌을 받는 거래. 거짓말이라며 웃네. 어디 한 번 들어보자. 그래,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시간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말이 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단 한번씩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걸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거든. 그 능력은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지. 아주 가끔씩, 인간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이 있어. 자각은 곧 능력이 돼.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이 능력들을 제 것으로 뺏어갈 수 있지. 그럼 그런 사람들은 몇 번이고 시간을 돌릴 수가 있으니 불공평하다고? 마음만 먹으면 인생을 자기 입맛대로 굴릴 수 있겠다고? 그야 어쩔 수 없지. 너도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 이 사실을 몰랐잖아. 뺏긴 사람들은 빼앗긴 줄도 모를 테니 불공평하다고는 볼 수 없지. 내가 몇 번이나 시간을 돌렸는지 궁금하다고? 남자의 하얀 와이셔츠 끝단이 펄럭였다. 왜, 잘못하면 그냥 시간을 돌리게?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푸스스 웃은 남자는 대답했다. 난.. 딱 두 번 돌려봤어.
근데, 너도 알게 될 거야. 안 돌리는 일이 행복하다는 걸.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됐다. 그 때 그가 말한 말의 의미를. 왜 시간을 안 돌리는 일이 더 행복한지. 정국은 절 보며 웃는 지민에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시간을 달리는 소년
전정국, 22살. 세간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고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본인도 유명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늘 알아보는 목소리들이 딸려왔고, 혼자 돌아다녀도 못 알아보겠지 라고 생각한 나라에서조차도 알아보기가 일쑤였으니까. 사람들은 정국의 나이를 들으면 놀라워했다. 스물 둘이라고, 아직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에 저만큼 성공했으니 부럽다, 좋겠다 고. 남들이 알기에는 그랬다. 스물 둘. 이 세상에서 정국 혼자만이 표기된 나이가 틀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국은 옷을 챙겨입은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호텔 복도는 조용했다. 한시까지만 해도 다른 멤버들의 방에 놀러가는 듯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다 자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도 두 시까지는 룸서비스를 시켜먹고 이야기하느라 웃음소리가 새어나왔을 텐데 아닌 이유에는 오늘 일정이 유난히 빡센 탓이 컸다. 그래서 오늘을 선택한 이유기도 했다. 검은 후드끈을 달랑이며 막 모퉁이를 돌아나온 정국은 마주친 사람에 당황했다.
"어디 가?"
"산책하러요."
"이 시간에?"
되물은 지민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시선을 내렸다. 새벽 2시 27분을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올리는 지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많이 늦었는데, 들어가서 자.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팔목을 가볍게 잡아 끌고선 같이 발을 옮기려는 행동에 정국은 어깨를 으쓱이며 잡힌 팔목을 빼냈다. 이 시간이 어때서요?
"형은 저번에 태형이 형이랑 새벽 세시에도 나갔다면서요."
"음..."
"나 내일 힘들어할까봐 그러는 거죠? 내일 안 피곤해할 자신 있는데."
"그럼 같이 나가자."
"아냐, 괜찮아요. 조금만 돌다가 바로 올라올 거라서."
피식 웃은 정국은 혹시 따라올까 재빨리 손을 흔들곤 몸을 움직였다. 돌아서기 전에 할 말이 있는 듯 지민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나중에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없던 일이 되겠지만 그에게는 최소한의 거짓말만 하고 싶어서. 호텔 밖을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앞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정국은 어딘가를 향해 다리를 옮겼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져 있는 야심한 밤. 검은 후드에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안다.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시간을 돌리면 그들은 자기가 이 곳을 왔고, 그들 모두와 접촉했다는 사실도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정국은 양 손목을 두어 번 돌려 풀곤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최대한 많이. 늘 하던대로 다짐한 후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힘을 주었다. 귀를 찢을 듯 크게 울리는 노랫소리를 따라 문을 열자마자 정국이 한 일은 막 나오는 사람의 뒷목에 손을 댄 거였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국은 그가 가진 능력을 가져왔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타임리프 능력을 빼앗는 일은 쉽다.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대기만 하면 자신의 것이 된다. 말했다시피,
자각은 곧 능력이 되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정국이 가진 시간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갔다. 내부를 다 흝고 나온 정국은 이번에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진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높이'가 필요했다. 과거로 가고 싶은 시간 만큼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 예를 들어, 한시간 정도를 돌리고 싶으면 일 미터의 높이에서 뛰어내리면 되지만 하루를 돌리고 싶다면 최소한 1층의 높이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오늘은 두 시간만 돌리면 되겠지. 난간을 붙잡고 선 정국은 밑을 가만히 응시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돌려야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곧 일어날 횟수까지 포함하면 42번을 돌린 셈이 된다.
"달이 밝네."
흐린 하늘 아래서 짧은 소감을 중얼거린 정국은 망설임없이 뛰어내렸다.
호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엘레베이터 쪽으로 걷던 정국은 홀을 배회하던 지민과 마주했다. 시각은 새벽 1시 37분. 나갔었어? 지민은 홀에 있는 정국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텐데 뜬금없이 홀에서 마주쳤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국은 대충 둘러댔다. 아니, 나간 건 아니고 그냥 호텔 탐방이요. 아직도 어리기만 한 동생의 말에 웃는 소리가 났다. 옆으로 다가오면서 부드럽게 던지는 말투. 심심했어? 심심하면 형 부르지. 다 내려온 엘레베이터를 함께 타고 올라가는 동안 시시콜콜한 말들이 오갔다. 너 그 옷 3일 째다. 매일 빨래하는 거 알잖아요. 알지. 여전히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답하는 지민. 엘레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나란히 걷던 정국의 발이 제 방 앞에서 멈췄다. 잘 거예요?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가려던 정국은 그렇게 물었다. 잘 자라며 지나쳐가려던 지민은 던져진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밖을 걷고 싶었는데, 그냥 잘래.
"잘 자. 늦게 자지 말고."
머리칼을 두어 번 쓴 손이 떨어져 나갔다. 정국은 조금 더 걸어가 자신의 방문을 연 지민이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문을 닫았다. 과거로 시간을 돌리면 일어날 일이 미묘하게 바뀌곤 한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새벽 두시가 넘어도 지민은 방에만 있을 것이다. 정국은 방금 지민이 쓰다듬고 간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평소와 같은 스킨십의 일부였지만 기분이 몽실몽실해졌다. 괜히 새벽 감수성에 젖어서 그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정국은 지민을 좋아했다. 단순하게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닌, 키스를 하고 그보다 더한 일을 하고 싶은 '좋아한다'는 감정. 넌 시간을 돌리는 능력도 가졌는데 고백 한 번이라도 해 보지 그러냐. 박지민이 거절하거나 꺼려하면 그냥 과거로 돌려 없었던 일로 하면 되는 일이잖아. 혹자가 이를 안다면 그리 말했을 것이다. 물론 해보지 않았다고 한 적은 없다. 정국은 지민에게 고백을 했다. 그리고, 이뤄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또... 몸을 섞은 적도 있었다.
23살의 겨울, 정국은 고백했다. 콘서트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술 멤버, 석진과 지민에 자신 이렇게 셋이 따로 한 잔을 더 하고 있는 날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도 여러 번 주고받아 점점 취기가 오르던 무렵이었다. 이만 씻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석진을 두고 둘이서 막잔을 마시고 있던 중에 정국은 입을 열었다. 형 취했죠. 어. 홍조가 오른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었다. 떠도는 술내음 사이에서 대답을 들은 정국은 심호흡을 한 후 이었다. 형. 저 말할 거 있는데, 술김이니까...
'이상하다 싶으면 잘못 들은거라고 넘겨야 돼요.'
'응?'
'꼭, 그래줘야 해요.'
대체 뭐길래 그리 거창하게 말해.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지민에게서 신신당부를 받고 나서야 정국은 입을 열었다. 분위기는 몽롱했지만 정신만은 한없이 맑았다. 형,.. 부르고 한 텀 쉰 정국은 몇년이고 묵혀둔 감정을 꺼냈다. 저 형 좋아해요. 정국은 지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시간을 돌려 없었던 일로 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양 눈을 응시하며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의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도록. 형동생의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에요. 손을 잡고... 그러고 싶은 쪽으로, 좋아해요. 끝까지 말하고 나서야 입을 다문 정국은 눈치를 살폈다.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제 고백에 멈춘, 굵은 반지를 낀 손가락. ..돌려야겠네. 정국은 씁쓸하게 생각하며 반쯤 남은 술잔을 들어올리려고 했다. 그걸 막은 건 지민의 손이었다.
'진심이야?'
'...네.'
'날 좋아한다는 네 말.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네. 미안해ㅇ,'
'잘못 듣지 않았다고 했어, 너.'
지민은 술잔을 잡고 있던 정국의 손가락을 떼어내며 천천히 얽었다. 잠시 저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다. 그러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심장이 터지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마구 뛰어댔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선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는 눈동자로 지민은 그리 말했다. 너는 날 좋아한다고 했지.
'나는... 널 사랑해왔어, 물론 네가 방금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각오한 것과는 달리 들려온 대답에 울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백했던 일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너무나도 기뻤다. 더 이상은 괴로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기적같은 연애가 시작되자 상상 속에서만 해왔던 입맞춤을 정말로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지척에서 절 사랑하는 눈동자를 보고, 숨을 뱉고, 귓가에 심장소리가 들리는 키스도. 24살이 되던 해, 정국은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다. 하고 싶다고 몇 번 종알댔지만 실제로 하려니 막상 무서워서 도로 없었던 일로 만든 적도 많았다. 그러나 저를 대하는 지민에 마침내 두려움은 물 씻기듯 사라졌었다. 좋은 기억만 만들어줄게. 그 말을 믿고 누웠다. 몸이 열리고 서로의 살갗이 부딪히면서 눈물로 베개를 적셔냈지만 제가 걱정했던 아픔 때문은 아니었다. 좋아서, 너무 벅차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행복한 일들을 모두 없었던 일로 돌려버린 건 몇 년 뒤에 일어난 한 사건 때문이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고통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특히, 대중들 앞에 서는 직업은 마주할 고통의 강도가 높은 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룹에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정국을 포함한 여섯 명의 멤버들도 힘들어했으나 지민은 유독 더 힘들어했다. 지민은 강한 동시에 여렸다. 모든 걸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굴다가도 한없이 약해질수도 있는 사람. 그런 지민을, 그런 나머지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정국은 시간을 돌리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혹시 과거로 돌린다면 지민이 자신을 받아주는 기적은 두번 다시 생기지 않을까봐.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과거의 수많은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번에도 이겨낼 거라고.
정국은 바랜 핏빛으로 물든 장면을 기억했다. 창백하다 못해 백지처럼 변해버린 지민의 손. 정국은 주저앉아서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펑펑 울다가 다리를 세워 어디론가 달렸다. 위층으로, 더 위층으로. 과거로 가야 해. 형을 죽게 만든 원인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점으로. 앞머리가 훌러덩 까져 동그란 이마가 바람을 끊임없이 받아냈다. 뛰고 뛰어 마침내 철커덩 문이 열린 회사의 옥상에서, 정국은 뛰어내렸다. 시간을 돌렸다, 지민을 되살려내기 위해. 숙소에서 호석과 장난치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절 끌어안는 정국에 뭐냐며 웃다가 운 흔적을 발견하고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왜 울었어, 피디님이 뭐라고 했어? 정국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대답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익숙하고 따스한 온기에 안정을 되찾았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고 있으니 그걸 대비해야겠다고 여겼다. 삼 개월 뒤, 정국은 잠잠한 인터넷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 해결되었구나.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 사고가 발생했다. 스케줄에서 돌아오던 지민은... 또다시.
뭐가 문제지? 정국은 시뻘개지고 젖은 눈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혼잣말을 했다. 뭐가 문제냔 말야. 계속, 계속 돌렸다. 다른 사람들을 사냥해 시간을 모아가면서. 15번을 돌렸고 레파토리는 달랐지만 결말은 똑같았다. 개인이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수의 악플들, 공사중인 건물의 철골 구조 추락과 그 밑을 걸어가던 지민, 가끔씩 다른 형들 또한 지민과 같이 발견된 끔찍한 상황도 있었지만 항상 지민만은 빠지지 않았다. 왜 이런 거냐고. 26번째로 옥상에 올라갔을 때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형에게 고백하지 말았어야 했나.
지민을 핏빛으로 몰아간 최초 사건은 그룹 내 동성연애 스캔들이었으니. 한참동안 고민하던 정국은 결국 결심을 했고, 고백 이전으로 되돌려 버렸다. 달려서, 23살의 시간으로. 만일 고백이 원인이었다면 괜찮겠지. 가슴이 한없이 아렸지만 사건을 막는 일이 가능하다면 포기할 거였다. 조금 더 앳된 얼굴로 돌아온 정국은 걱정을 그만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고백이 주 원인이 아니었음이 틀림없었다.
몇십 번이 반복된 지금도 정국은 23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 *
죽음을 목격하는 시간은 갈수록 빨라졌다. 정국이 24살 때 절대로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지금은 23살일 때 일어나고 있었다. 바뀌지 않는 미래에 심장이 부서질 듯 아프고 절망하면서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과거로 가면 되니까. 그러나.
지금에서야 형이 죽으면 살리고, 또 죽으면 또 살려서 기회를 만들면 된다지만.. 수백, 수천, 수억 번을 돌려, 전 세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빼앗아서 마지막으로 시간을 돌렸는데도 형이 죽는 결과로 끝난다면? 더는 돌릴 수도 없게 완벽하게 끝나버린다면.
불안감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언제까지고 무한대로 돌릴 수는 없다. 기회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애초에 뭐가 이 사태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미래는 바뀌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화되기까지 하고 있는데 찾아야 해도 뭘 찾아야 하냐고. 479번째 뛰어내리는 순간까지도 정국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제 지민의 죽음은 더 빨라져 곧 정국이 22살인 시점으로까지 돌려야 할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479번째로 돌린 날, 정국은 짧은 꿈을 꿨다. 최초로 시간여행을 시도한 이후로 단 한 번도 꾸지 못했던 꿈이었다. 꿈 속의 지민은 스물 다섯 살이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정국은 그 사실을 알았다. 지민은 어느 대학교 안을 걷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지민이 그냥 걸어가게 내버려두었다. 스타가 나타났다며 사진을 찍지도 않고, 싸인을 해달라고 오지도 않았다. 마치 데뷔했던 일이 없는 것처럼, ...평범한 일반인인 것처럼. 지민은 민낯으로 강의를 들었으며, 당구장에 가서 친구들과 내기 당구를 쳤다. 학교에서 당구장, 술집,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까지 정국은 다 볼 수 있었다. 직감했다. 이 모습의 지민에게는 일평생 불의의 사고는 닥쳐오지 않을 것이라고. 스타가 되어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내던 모습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는 빛만큼 빛나면서 사는게 가능하다고. 알게 됐다. 지민이 데뷔하지 않아버린다면 더는 돌리지 않고 시간을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수 있다고.
"형. 형은... 이 직업을 가진 걸 후회한 적 없어요?"
어쩐지 비슷한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것만 같은 기분을 떨쳐냈다. 관객들이 모두 나가 텅 빈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던 지민은 정국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 지민은 대답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어디 힘드냐느니, 아니면 초심을 잃었냐는 둥의 말이 들려올까 정국은 황급히 덧붙였다. 제 말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교를 다니고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는 그런 걸 할 수가 없었잖아요, 우린. 그러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덧씌워졌다.
"...너랑 똑같아."
"네?"
"인생의 전부인 직업이라며. 아주 소중한 우리 멤버들을 만나서 너무 행복하다고. 이 이외의 직업은 생각해본 적 없다고."
수많은 인터뷰들 사이에서 얼핏 저렇게 말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가수가 일생의 꿈이었고 이루어서 행복해요. 천직이 아닐까 싶어요.' 지민의 멘트에 정국은 감동받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저만치 앞서가는 등을 보던 웃음이 서서히 흐려졌다. 만일 지민에게서 다른 대답이 나왔으면 그날 정국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데뷔하기 전의 시절, 아니, 아예 소속사와 컨택하지도 않은 먼 시절로 가기 위해. 가끔은 평범한 사람의 삶도 부럽다느니 했다는 말을 해줬더라면 그랬을 거다. 정국은 해결책인 꿈을 꾼 날부터 제 모든 것 -가수인 현재의 삶-을 포기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의 전부라고 말하는 지민에게마저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떨구지만 않았으면 쥐어지는 지민의 주먹을, 정국은 봤을까.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뭐. 언젠가는 형이 죽지 않는 미래가 있다고 믿을 수밖에. 그래서 정국은 십 년 정도의 기간을 반복하는 데에만 보냈다. 죽지 않는 미래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머리로는 알았다. 저번에 본 장면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거라고. 성황리에 콘서트를 마치고, 팬들로 이루어진 바다를 건너 호텔로 돌아온 정국은 여섯 명의 형들과 크게 웃으며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매니저 형에게 부탁했다. 저 이따 개인 뷔앱 하고 싶은데,...
열두시가 넘어 방송을 켰는데도 5만 명이 순식간에 찼다. 왜 안 주무세요? 내일 월요일인데. 다들 야행성이신가 봐여. 침대에 엎드려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정국은 키득였다. 오늘 공연 보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1초에 수십 개식 올라가는 댓글들의 내용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그것들을 대충 보면서 혼잣말 같은 대답을 했다. 저 밥 먹었죠, 스테이크 먹고 컵라면도 먹었는데. 그래서 내일 얼굴이 부을 것 같슴다. 정국은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몇 분 가량 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자기 전에 질문 몇개만 받을게요. 역시 예상 범주 안의 질문들이 올라왔다. 다음 앨범은 언제냐, 잘생겼다 -이건 질문이 아니었지만- , 같은 질문에 대답해주던 정국은 어떤 질문을 보고 말을 멈췄다.
[가수 말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국 군은 지금쯤 뭘하고 있었을까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국 군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라셨네요.."
표정이 무너졌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한참동안 정국이 대답을 않자 걱정으로 아우성인 댓글들이 치고 올라왔다. 줄곧 덤덤하게 대처해왔다고 자신했으나 아니었다. 질문 한 줄에 정국은 답지 않게 쏟아냈다. 자신의 발언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런는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이십 대 초반이지만 정신은 열다섯에 머문 아이처럼, 마구.
"행복했겠죠. 훨씬 더. 걱정과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마주하며 살아서 행복했겠지... 지금쯤 강의실에 앉아서 수업을 듣고, 나는 진짜.."
옛적에 각오를 했단 말이야. 프로답지 않은 모습으로 정국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안 봐도 댓글창이 어떻게 되어있을지 알았다. 예상치 못한 말에 간간이 걱정도 보이겠지만 당황과 비난으로 가득하겠지. 그렇지만 신경쓸 수가 없었다. 덤덤한 척 했지만 속은 옛적에 썩어 문드러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정국은 방송을 종료시키려 팔을 더듬었다. 예상했던 대로 댓글창은 비난과 걱정들로 엉망이었지만 그 순간, 정국의 눈은 한 사람이 올린 말을 포착했다.
Level - : JIMIN
정말?
다른 댓글들에 밀려 화면에 보인 건 0.5 초도 안 되었지만 강렬했다. 흰색이 아닌 다른 색이었다. 그렇지만 멤버들이 댓글창에 댓글을 달았을 때 쓰는 색과도 달랐다. 과연 별 거 아닌 일일까? 오류인가. 애초에 지민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팬의 닉일 가능성이 컸다.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국은 제 방을 열어젖히며 다급하게 외치는 석진을 바라보았다. 빨리 나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석진의 손에 끌려가던 정국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 방 바로 뒤에까지 화염이 낼름거리며 와 있었다. 비상벨과 화재 진압기가 고장나서 아무도 큰 불이 난 걸 알지 못했다. 정국은 자신을 기다리는 나머지 네 명의 멤버들을 보았다. 지민의 방은 이미 화염에 삼켜진 후였다.
* *
- 왜 내게 알려준 거예요? 시간을 돌릴 수 있다고, 왜 알려준 거예요?
- 넌 어차피 알아도 안 돌릴 거니까.
- ....그렇긴 하지만요.
- 되도록이면 쓰지 마. 이게 괜히 인간한테만 주어진 게 아니야.
내 생각에는... 시험 같다고. 어디까지 사람이 괴로워질 수 있는지 보려는 신의 농간, 이라든가.
- 행복해질 순 없는 거예요? 나쁜 일도 바꿀 수 있으니 보통 좋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텐데.
-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했어. 나도 마찬가지고.
- 그럼, 아주 만일. 내가 이 능력을 쓰게 된다면, 이걸 써서...
반드시, 반드시 행복해질게요.
* *
어.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명히 네 시간을 돌렸다. 그러면 지금은 새벽 2시여야 했다. 그러나 뛰어내려 지상에 도착한 정국이 본 시간은 열두 시였다. 왜 여섯 시간이 돌아간 거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정국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겨버렸다. 내가 너무 많이 타임리프를 해서 오류가 났을지도. 정국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유난히도 퀭해 보이는 눈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다가 내렸다. 열두시면 형들을 마주칠 수도 있겠네. 그렇더라도 둘러댈 핑계는 넘쳐났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도착한 엘레베이터에서 내린 정국은 제 방을 찾아 오른쪽으로 돌았다. 돌자마자 우뚝 서 있는 지민을 보고 잠시 놀랐으나 여유있게 물었다. 왜 정승처럼 서 있어요? 아까 일찍 잔담서 아직 자지도 않고. 하지만 지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국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에 만들었다. 정국아.
"너, 시간 돌리고 있지."
정적이 흘렀다. 질문이 아닌 확신. 식은땀이 등줄기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형이 어떻게 알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터질 것만 같았다. 정국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지민은 그런 정국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농담이었다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정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으나 이내 멈췄다. 지민은 다 알고서 말하는 거였다. 정국은 풀로 붙인 듯 무거운 입술 사이를 간신히 떼 물으려고 했다. 형... 형이,
"왜, 내가 계속해서 죽기라도 해?"
또다시 심장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정국은 자신에게 가까워진 지민을 보고서도 뒤로 물러나지 못했다. 제 팔을 잡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행동을 거부하지도 못했다. 어떻게 형이 알아, 그 모든 걸 다, 어떻게...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지민은 정국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알아들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의 지민은 말없이 정국의 손을 끌어당겨 제 목덜미 부근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손 안으로 느껴지는 수천 개의 타임리프 개수에 정국은 경악했다. 경악한 얼굴을 보고서야 지민은 엷게 웃었다.
"너도 나랑 똑같지, 안 봐도. 내 세계에서는 항상 네가... 그렇게 되거든."
지민이 가지고 있는 수천 개의 시간에 사고회로가 정지한 정국은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제 볼을 어루만지는 지민의 손길이 슬프다. 정국을 침대에 앉힌 지민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난 분명히 하루를 돌렸는데 한 달이나 전으로 돌아가 있더라고. 처음에는 착각이겠지 생각했는데.. 다음에는 세 시간을 돌렸는데 여덟 시간이 돌아가 있었고. 몇 번을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 우연히 똑같은 타이밍에 시간을 돌리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면 타임리프는 더 뒤로 돌린 사람의 것으로 따라가고,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건 똑같은 타이밍에 돌려서라고...
"내 시간에서는 네가 죽어 정국아."
말하기 싫을 정도로 아주 많이.수천 번을 돌려도 그래. 무슨 짓을 해도 똑같더라고... 나는 말이야 정국아. 2014년까지 돌린 적도 있단 말이야. 우리가 아직 빛을 보지도 못한 그 시절까지 가봤어. 하지만 몇 년이 지나서 이 시기쯤 되었을 때, 또 네가 죽어. 정국은 울 것만 같은 지민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도 같은 생각을 했니? 우리가 데뷔하지 않은 일반인이어야, 이 굴레가 끝난다고.
"그렇다면 너의 꿈을, 우리의 꿈을 영원히 포기해야 할 거라고."
그때서야 알았다. 아주 오래 전 지민에게 이 직업을 가진 걸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을 하며, 왜 어디선가 들었던 기분이 들었던지. 이전에 지민은 먼저 자신에게 물어봤던 거겠지. 정국아. 지금 이 직업은 너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야? 제 인생의 전부요. 단 하나의 꿈이었거든요. 지민은 끝낼 방법을 오래 전에 알아내고서도 저의 말에 그러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을 때, 정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 인생의 전부라고 거짓말을 한 거고. 이미 옛적에 빛나는 지금의 인생은 리셋되어도 괜찮다고 결정내렸는데도. 정국을 위해.
정국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오열을 참기 위한 견딤이었다. 답을 듣지 못했지만 지민도 알고 있을 거였다. 정국도 이 사태를 끝낼 단 하나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또한 지금으로 인해 정국의 결론이 어떤지도, 다. 알고 있지만 지민은 소리내어 질문했다. 물어볼게, 정국아. 가수가 안 되어도 후회하지 않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읽혀지는 일은 없게, 확실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아요. 입 밖으로도 그리 말했다. 다음으로 정국이 물었다. 그럼, 형은.... 형도, 가수가 안 되어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바라보는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가수로 멤버들을, 그리고... 너를 만난 거니까,"
"............."
"이 직업 말고도 너를 만날 수 있으면 괜찮아."
123층에 다다라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자 강풍이 들이닥쳤다. 두 사람의 손에는 핸드폰조차도 들려있지 않았다. 새벽의 잠실타워는 폐장되었기에 조용해야지 정상이었지만 사이렌 소리로 시끄러웠다. 잠금 장치를 모두 부수고 최상층까지 올라온 탓이었다. 2분도 안 되는 시간이면 경비원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탑 아이돌 두 명이 소란을 일으킨 기사가 내일 신문을 장식하겠지. 하지만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모두, 곧 없는 일이 될 테니까. 정국은 난간 바로 앞에 섰다. 단단한 몸이 흔들릴 정도로 고층의 바람은 거셌다. 그리고 지민을 돌아보았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보였다. 네가 가. 올라오면서 지민은 제게 기회를 넘겼다. 정국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난간 밖으로 다리 한 짝을 빼고 다른 한 짝도 뺐다. 양 팔만 놓으면 곧장 떨어지는, 아찔한 모습. 꽤 높네. 지나다니는 차조차 별로 없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국은 생각했다. 아래 말고 정면으로 보이는 야경은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지민을 보려 고개를 돌리려던 정국은 지민의 팔이 절 껴안는 걸 보고 굳었다. 매섭게 부는 바람 사이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귓가 바로 옆의 목소리.
"널 만난 순간부터 줄곧 사랑해왔으니, 부디 찾아와 줘."
새로 쓰는 미래의 고백은 내가 할게. 장난스럽고도,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틀었다. 위태로운 난간 하나를 두고 인영이 얽혔다.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 사이로 나누는 - 누구는 기억하지 못할 마지막 키스. 소란스러운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지민은 몸을 떼었다. 그리고 손을 흔든다.
나중에 봐, 미래의 내 사랑.
팔이 아프게 붙들리고서도 하얗게 웃는 지민을 보며 정국은 한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지민과 경비원들의 모습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걸 봤다. 높게 솟았던 건물이 점점 내려가고,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검게 물들었다가 새파랗게 변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떨어짐이 끝났을 때는 등에 푹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손을 움직이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층의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이 곳은 푸르른 잔디가 깔려 있고, 주변에는 나무가 서 있던 곳이었을 거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정국의 얼굴을 온통 비췄다. 햇살을 막으려 손을 올린 자신의 눈에 확연하게 작아진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 돌렸구나.
* *
캠퍼스를 걷는 한 남자의 모습에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힐끔 보다가 도로 시선을 돌렸다. 가끔 있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했기에 자신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터였다. 정국은 보폭을 넓게 해서 성큼성큼 걸었다. 약속에 늦은 건 아니었고 그저 그의 습관이었다. 몇 분을 걸어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던 정국은 가게 안에 설치된 티브이에 무심코 시선을 주었다. 스크린에 나오고 있는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보다가, 가만히 웃는다. 이번에도 컨셉 하나는 잘 잡았네. 하긴, 누구 아니랄까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국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거의 다 왔어요, 같이 갈 거예요. 남준이 형은요? 정국의 입에서 나온 '남준'이라는 이름에 옆에 서 있던 여학생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본명과 똑같아서 반사적으로 그런 게 분명했다.
"웬일? 그 형이 벌써 왔다고요?"
말도 안 돼. 오늘 혹시 해 서쪽에서 떴어요? 정국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한 번 들썩했다. 그러다 핸드폰 저편에서 지민이는? 하고 묻는 소리에 음...하고 길게 끄는 소리를 냈다. 음, 지민이 형은... 석진에게 대답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정국은 저 앞에서 저에게 손을 흔드는 지민을 보고 햇살보다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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